
보광사엔 왜 장기수 묘역이 조성되어 있을까? 중생들 사는 세상엔 여러 모양이 있다
박상표 수의사
침묵하고 있는 풍경과 나누는 묵언의 대화
세상에 어찌 사연이 없는 풍경이 있을까마는 말을 붙이거나 농(弄)을 걸어도 풍경은 언제나 묵묵히 침묵하고 있다. 풍경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너스레를 떨지도 않고 남을 깎아내리기 위한 허튼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저 그곳을 찾는 사람과 묵언(默言)의 대화를 나눌 뿐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고령산(高靈山)에 있는 보광사도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절집이다. 그러나 보광사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은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연을 전해주지 않는다.
왜 이곳에 장기수묘역 ‘연화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한나라당의 색깔공세에 호응한 극우단체가 이곳을 훼손했는지, 언제 이곳이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원찰이 되었는지, 무슨 이유로 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사령관을 지낸 이희성이 1981년에 이곳에 호국대불을 세웠는지, 무슨 영문으로 1994년 새로 지은 원통전과 지장전의 바깥벽에 특이한 벽화를 그렸는지를 얘기해주지 않는다.
숙빈 최씨의 원찰, 고령사
보광사(普光寺)의 옛 이름은 고령사(高靈寺)였다. 고령사는 숙빈 최씨(1670~1718)의 원찰(願刹)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이름 없는 절집에 불과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11의 양주목 불우(佛宇)조를 보면 “고령사(高靈寺) : 고령산(高靈山)에 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3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들 중에서 금(昑, 연잉군)이 훗날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그러나 숙빈 최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경기도 양주목 고령동(高嶺洞) 옹장리(瓮場里)에 묻혔고, 무덤의 이름은 ‘숙빈묘(淑嬪墓)’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중반에 제작된『해동지도』「양주목 지도」와 19세기 전반에 제작된『광여도』「양주목 지도」에 반영되어 ‘고령사’와 ‘숙빈묘’가 표기되어 있다.
1724년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제였던 연잉군이 왕이 되었다.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소령원, 육상묘, 어실각
영조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숙빈 최씨의 무덤(墓)을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키고, 그녀의 신주를 모시기 위한 사당(廟)으로 육상묘(毓祥廟)를 세웠다. 그리고 고령사를 원찰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세워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셨다.
고대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저승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저승관에 따라 죽은 사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廟)을 짓고, 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무덤(墓)을 만들었다.
한편 불교는 중생은 생전에 자신의 행위인 업장에 따라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이라는 육도윤회를 한다는 사후관을 가지고 있다. 왕실이나 귀족들은 망자(亡者)가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함으로써 부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원찰(願刹)을 세웠다.
소령원과 육상묘, 그리고 보광사는 바로 이러한 저승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739년에 겸재 정선이 그린「육상묘도(毓祥廟圖)」(보물 873호)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1753년에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하였으며,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추시했다.
조선말에 고령사에서 보광사로 이름이 바뀌다
고령사가 언제 보광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문헌기록과 지도를 통해서 추정해보면, 조선후기에 보광사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보광사 대웅보전에는 불국옹(佛國翁) 여여(如如)가 1869년(고종 6)에 쓴「고령산 보광사 상축서(高靈山普光寺上祝序)」가 걸려 있다. 응진전에도 1870년(고종 7)에 여여(如如)가 쓴「양주 고령산 보광사 십육성중전 이건기서(楊洲高靈山普光寺十六聖衆殿移建記序)」라는 판각이 걸려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 봉은사나 보광사 등 왕실의 원찰도 함께 중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1872년(고종 9) 지방지도』중의「양주목 지도」에도 ‘소령원’과 ‘보광사’라는 표기가 나타난다. 1899년에 편찬된『양주군읍지(楊洲郡邑誌)』불우(佛宇)조에는 “고령사 : 주의 서쪽 40리 백석면이 있는데 지금은 보광사라 한다.”고 기록했다. 1901년에 낭응 경림(朗應鏡臨)이 지은「고령산 보광사 법전 중창 병단호기서(高靈山普光寺法殿重創幷丹호記序)」에도 ‘보광사’라고 표기했다.
노동자·농민·학생·전경이 어깨를 걸고 탑돌이를 하는 원통전 벽화
보광사의 원통전과 지장전 바깥벽에는 일반적인 사찰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벽화가 있다.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이 사는 집이다. 원래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키테슈바라'에서 유래했는데,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라는 뜻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곳에 두루 있으면서 중생들의 고통을 씻어주고 소원을 들어준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이 사는 집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할 때까지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온 힘을 다 바치고 있다. 지장보살은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있고, 저승세계인 명부(冥府)를 관장하는 진광대왕·염라대왕·전륜대왕 등 10명의 시왕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지장전을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호세전(護世殿)이라고도 부른다.
보광사 원통전의 벽에는 정병을 들고 흰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머리띠를 질끈 동여 맨 노동자, 삽을 든 농민, 책가방을 둘러 맨 학생, 전투모를 쓴 전경 등을 두루 보살펴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한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전투경찰 등 모든 중생이 어깨를 걸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석탑을 빙 돌면서 탑돌이를 하는 그림도 있다.
불기 2540년(서기 1996년) 9월 7일에 완성한 이들 그림들은 마치 80년대 대학가의 걸게그림을 연상하게 만든다. 사실 걸게그림은 불교의 괘불탱화(掛佛幀畵)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원통전 벽화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불교의 자비정신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따사로운 손길은 왕이나 왕비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전투경찰에 이르기까지 뭇 중생들을 두루 어루만져준다. 그 손길에는 차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기에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떠나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역을 조성했던 것이리라.
게 눈 속의 연꽃
지장전의 벽에는 모든 민중들이 용이 이끄는 지혜의 배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그림이 있다. 반야용선에 탄 사람들의 모습은 서양인이나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이를 통하여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구름 위의 허공 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구체적 현실 속으로 내려와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1994년에 신축하기 전에는 이 건물을 ‘호세전(護世殿)’이라 불렀는데, 황지우 시인의 ‘게 눈 속의 연꽃’이라는 작품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시인 황지우는 호세전 벽화에 그려진 게 눈 속의 연꽃을 보러 문학평론가 김현과 함께 보광사를 다녀온 이야기를 시와 대담(평론)으로 남겼다.
게는 바다로 나아가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김현과 황지우는 결국 게 눈 속의 연꽃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벽화를 촬영한 사진이 보광사 종무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몇 년 전 홍수가 나서 아쉽게도 분실되었다고 한다.
계엄사령관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시주한 까닭은
보광사 뒤편 언덕에는 1980년 5월에 계엄사령관을 지낸 이희성이 시주했다는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위압적으로 서 있다. 이 미륵상은 고령산의 산세나 절집의 규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자비·우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에서 유래한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 세상에 출현할 미래의 부처라고 한다. 그는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예정이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무슨 생각으로 12.5m가 넘는 거대한 미륵보살상을 시주했을까?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죄를 씻고 극락왕생을 꿈꾸었는지, 현세의 뛰어난 무공(?)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는지 궁금하다.
우익단체 회원들의 장기수 묘역 '연화공원' 훼손
보광사 진입로 왼편 야트막한 언덕에는 장기수 묘역인 ‘연화공원’이 있었다. 연화공원에는 금재성(1998년 8월 사망), 최남규(1999년 12월 사망), 정순덕(2004년 4월 사망), 손윤규(1976년 4월 사망), 정대철(1990년 사망), 류락진(2005년 4월 사망) 등 여섯 명의 비전향장기수 유골이 안치되어 있었다.
최근 한나라당과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연화공원에 대해 색깔시비를 제기했다. 이에 고무된 대한민국애국청년동지회·대한민국HID특수임무청년동지회 등 우익단체 회원들이 지난 12월 5일에 보광사에 난입하여 빨간 스프레이를 뿌린 다음 비석을 때려 부수었다. 또한 우익단체 회원들은 장기수들의 유골을 파헤치고, ‘남파 공작원은 영웅이고 북파공작원은 역적이냐’ ‘연화공원을 찬양조성한 주지 일문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연화공원은 철거되었고, 장기수들의 유골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다.
연화공원에 묻혔던 여섯명의 장기수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998년 당시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유해마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비전향장기수 금재성의 자그마한 묘비를 진입로 왼편 호젓한 숲속에 세웠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의사 고 금재성지묘 - 선생은 일제강점하 민족해방투쟁으로 3년의 소년옥과 해방 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해 57년 투옥되어 30년의 형옥 속에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당신의 지조를 지키며 빛나는 생을 마치다. 부인 이명숙, 아들 금환·금충렬, 딸 금두심”
금재성은 1924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 온 가족이 함경도 원산으로 이사했다. 해방 전 원산에서 노동운동에 가담한 그는 1944년 금촌 소년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해방직후 출소 했다. 출소 후 원산으로 돌아가서 45년 5월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해방 후 독찰대(헌병) 원산지구 대장으로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으로 참전하였다.
정전협정 이후 인민군을 제대하여 원산 주을전기전문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금재성은 1956년 평화통일을 선전하는 정치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고향 땅 대전으로 내려왔다. 남파된 이듬해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유신시절의 악법 가운데 하나였던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청주보호감호소에 수감되었다가 1989년에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어 출소했다. 수감 중 그는 비인간적인 전향고문에 저항해서 싸웠다. 출소 후에는 췌장암으로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다가 1998년 8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중생들이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 형상이 있으나…
1999년 12월 11일에는 87세의 비전향장기수 최남규 노인이 사망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오갈 데 없는 그의 유해를 또 다시 보광사에 안치했다. 최남규는 청진교원대학 지리학교수로 일하다가 1957년에 소위 ‘평화통일을 위한 대남 정치공작사업’에 동원되었다.
남파된 직후에 체포된 그는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29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징역을 살았다. 1989년에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어 출소한 그는 오랜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폐렴·중풍·치매를 앓다가 1999년 12월 11일 서울의 보라매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작가 류시춘이『안개너머 청진항』(창작과비평, 1995)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시키기도 했고,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이 엮은『현대사 증언록 1 ; 끝나지 않은 여정』(대동, 1996)을 통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정순덕은 1963년에 지리산에서 체포된 여성빨치산으로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손운규는 빨치산 출신으로 유신정권의 조직적 전향공작과 고문·폭력 등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1976년에 사망했음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혀냈다. 정대철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한 빨치산으로 21년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류락진은 빨치산·혁신정당·호남 통혁당 재건위·구국전위 사건 등으로 모두 4차례에 걸쳐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남과 북은 이들을 서로 상반되게 평가하고 있다. 남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간첩’ 또는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북에서는 ‘통일애국투사’ 또는 ‘의사’로 찬양하고 있다. 이처럼 분단과 냉전이 만들어낸 적대의 골은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깊기만 하다. 아마 옳고 그름을 따져 이들에 대해 통일된 평가를 내리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전쟁의 당사자들이 옳고 그름을 따져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종교의 역할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광사 원통전 벽화의 화기(畵記)에는 “중생들이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 형상이 있으나 반드시 부처님의 법 가운데로 돌아온다(衆生世界諸形相 必竟歸來佛法中)”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은 따스한 손을 내밀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계엄사령관 이회성, 노동자, 농민, 학생, 전경, 비전향장기수뿐만 아니라 소, 말, 개, 돼지, 새, 물고기까지 세상의 모든 존재를 두루 어루만져 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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