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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존스턴 별장 자리에 세워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먼저 세창양행 사택은 1884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세창양행은 독일 함부르크 상인 에드워드 마이어가 설립한 무역회사로, 직원 사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현재 맥아더장군상이 있는 자리에 이 사택을 지었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쉽게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세창바늘’이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세창양행이 바로 이 바늘을 팔던 회사다. 세창양행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재정차관 10만냥을 제공하기도 했고 1886년 ‘한성주보’에 최초의 신문광고를 싣기도 한, 우리에게 의미가 남다른 서구 회사였다.
현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서 있는 자리에 위치했던 존스턴 별장의 주인은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상하이에서 항만건설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번 제임스 존스턴이다. 그는 여름철을 보내기 위해 이 별장을 지었다. 존스턴 별장은 존재 그 자체로 ‘다문화’를 웅변했다. 설계는 독일인이 맡았고 건축자재와 가구는 영국에서 가져왔으며, 붉은 기와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공수해왔다. 실내 조각장식은 존스턴이 직접 중국에서 데려온 12명의 1급 중국인 조각가가 맡았고, 인부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원됐다. 이 별장의 건축비는 35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는데, 당시 인천 최고 갑부의 전 재산이 35만원이었다고 한다.
존스턴은 여름철마다 상하이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데리고 이 별장으로 와 머물렀다. 아예 기선 한 척을 통째로 세내어 많은 군중을 데려온 적도 있는데, 그중에는 개, 고양이, 중국인 아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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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포구에서 바라본 1907년 당시 인천항 풍경.
한 모퉁이를 둥근 탑으로 쌓아올려 작은 돔을 세운 것이 특색인 알렌 별장은 주한 미국공사이자 선교사이며,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 광혜원을 설립한 알렌의 별장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상심한 고종황제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알렌 별장 바로 옆 부지에 피서용 이궁을 지으려 했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파라다이스 호텔이 있는 자리에 위치했던 영국영사관은 붉은 단층 벽돌집으로 정원이 특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1903년 건축된 러시아영사관은 다소 성급하게 건축됐다. 당시는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때로, 러시아는 커져가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둘러 인천에 영사관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만국공원 일대의 ‘평화로운 문화 공존’은 점차 와해돼갔다. 열강이 떠난 근대건축물은 일본 차지가 됐고, 광복 후에는 미국 몫이 되었다가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에 의해 점령됐다.
복원 예정 근대건축물 세부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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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턴 별장 |
세창양행 사택 |
알렌 별장 |
영국영사관 |
러시아영사관 |
건립 연도 |
1905 |
1884 |
1893 |
1897 |
1903 |
멸실 연도 |
1950 |
1950 |
1956 |
1950년대 |
1974 |
멸실 사유 |
인천상륙작전 함포사격 |
인천상륙작전 함포사격 |
소실 |
6·25전쟁 당시 없어짐 |
철거 |
현재 상황 |
자유공원 내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
자유공원 맥아더장군동상 부근 화단 부지 |
인천 전도관 |
파라다이스 호텔 |
상업건물 |
의의 |
인천의 랜드마크, 인천의 상징물로 기능 |
인천 최초의 서양식 건물 |
고종황제의 이궁 예정지 옆에 세워짐 |
영국영사관으로 발전에 중요 역할 수행 |
인천해관, 러일전쟁, 제물포 해전 관련한 역사적 장소 |
주요 기능 |
별장, 여관, 고급식당, 장교 숙소 |
외국인 주택, 인천부립도서관, 인천시립박물관 |
별장 |
영사관 |
체신국 출장소, 미국 철도 수송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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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영사관의 옛 모습.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영사관은 일본군에 의해 포위됐다. 러시아 공사 파브르프는 인천항에서 쫓겨나다시피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닷새 동안 배 안에서 러시아 거류민, 부상병 등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출항했다. 이후 러시아영사관은 일본군 철도수송대 사무실 등으로 이용됐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패망하자 인천에 있는 독일인들의 재산이 동결됐다. 세창양행 사택에 거주했던 독일인 파울 슈르바움은 1916년 일본군에 의해 쫓겨나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존스턴 별장은 독일인과 결혼한 존스턴의 딸 월터 부인이 재산 동결로 경제적 고충이 심해지자 일본인 히로자와에게 4500원이라는 헐값에 팔아넘겼다. 히로자와는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자작에게 이 별장을 뇌물로 바칠 생각이었는데, 거절당하자 다른 일본인에게 매각했다. 이후 존스턴 별장은 해방될 때까지 ‘인천각’으로 불리며 고급여관 겸 요정으로 사용됐다.
존스턴 별장, 인천 점령자들에게 최고 인기
인천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전망이 좋았던 존스턴 별장은 인천의 점령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물인 듯하다. 광복 이후 이 별장은 미 군정청이 점유해 독신장교 숙소로 사용됐고,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주요 간부 숙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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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영사관의 옛 모습.
만국공원 복원 프로젝트는 현재 인천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4월3일부터 열흘 동안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던 ‘만국공원의 기억전’에는 1300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전시를 주관한 인천문화재단 관계자는 “현재의 자유공원이 과거 이러한 역사를 가진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어 뜻 깊었다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인천문화재단은 5월1일부터 인천터미널 역에서 추가 전시회를 열었다. 상지대 조우 교수(관광개발학과)는 “연간 인천을 찾는 관광객은 1000만 명 수준인데, 월미도와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등을 돌아본 뒤 실망감만 안은 채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근대건축물들이 복원되면 개항기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어 관광객들의 만족도가 크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인천에 소재한 재능대학 손장원 교수(실내건축디자인과)는 “벽돌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100년 전 건물을 다시 짓는다는 것은 껍데기만 만들어놓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영국영사관, 러시아영사관, 알렌 별장 등은 만국공원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도 만국공원으로 옮겨와 복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관광단지 개발에 불과한 것 같아 아쉽다”고도 덧붙였다.
이제 우리도 근대의 시발점이었던 100년 전 개항기 역사를 간직한 ‘특별한’ 공간을 갖게 될까. 만국공원 복원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될지 사뭇 기대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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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사진 : 바람구두(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벽돌 한 장, 설계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건물을 복원한다는 다소 무리해 보이는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아무리 근대건축물의 복원이라지만 단지 사진 몇 장으로 증거되는 건축물, 그것도 식민시절의 추억을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이 과거의 만국공원, 현재의 자유공원이기 때문이다.
아다시피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있고, 이 동상을 철거하기는 커녕 옮기기도 쉽지 않은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일종의 꿈수를 두는 셈인데... 물론 나는 맥아더 동상이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편이긴 하다. 그러나 우스운 건, 현재의 식민지성 혹은 불구성을 감추기 위해 과거의 불구를 찾아 제자리에 돌려두는 일은 과연 옳은가? 본질적으로 과연 얼마나 다른 일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 나는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