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글.사진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참 예쁜 글!

만약 작가를 모르고 봤다면 여자가 쓴 글이라고 생각했을듯도 하다.

남자들의 글속에서 감성은 곧잘 모자라고, 여자들의 글에서 감성은 곧잘 지나치게 넘치는 경우를 자주 본다.(물론 모든 남녀가 그런것은 당연히 아니다. 언제나 예외들은 존재하는 법!)

그러나 영화의 촬영지를 찾아간다는 어쩌면 낭만적일 수 있는 여행길에서 자신의 감성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풀어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넘치는 것은 모자란만 못하다지만 어디 그것이 쉬운일인가 말이다.

 

이 책에서 다니는 여행지는 이미 말한대로 영화의 촬영지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모두 유명세가 대단한 영화들이지만 그 촬영지들은 영화가 아니라면 절대로 관심이 가지지 않을 것같은 곳들 - 외지고 한적하고 그래서 가려면 죽도록 고생해서 가야하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이동진 이사람이 아니라면 언제 이런 곳을 책으로라도 보겠는가 말이다.

 

호주의 에어즈록에서 작가는 말한다.

"서로 몸을 맞대고 반갑게 비비기라도 하듯, 평상에 드러누워 끝없이 속살거리기라도 하듯, 별들은 일제히 소리를 냈다. 별이 별을 부추기고 별이 별을 흔들어 깨우는 압도적인 풍경을 올려다보고 있다니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 밤, 나는 별의 잔해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바위 에어즈 락, 그 바위외에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과 하늘 외에는 없는 그곳의 밤이 나를 감싼다. 이 순간 나 역시 별의 잔해가 된다.

 

"사막에서는 모래 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어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이는 모래는 고체이고 액체이며 기체였다..... 사막에서 모래는 무형의 형질로 그 모든 것이 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이룬 모래는 잔바람에도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이제 어둠이 사막을 완전히 삼킨 후에도, 모래는 잠들지 않고 오래도록 수군댈 것이다."(스타워즈의 촬여장 - 튀니지) 모래는 바람의 잔영일테다. 아마도 나 역시 잠들지 못하고 모래의 수군거림을 내내 듣고 있었으리라....

평이한 문장들 속에서 이토록 깜찍하게 튀어나오는 문장들은 갑자기 나를 공간이동시킨다. 그저 평범한 여행이 특별함이 되는 보석같은 순간들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촬영지 피지 모누리키섬을 찾은 것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머감각이 빛나는 곳이다.

아니 도대체 영화의 촬영지라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1박2일동안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보겠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톰행크스처럼 불을 피워보려다 결국은 포기하고 라이터로 불을 피우고, 야자열매를 따서 목마름을 해결하겠다고 나무를 오르다 실패하고.... 농담 한마디 없이 웃기는 것도 가능하구나... 이 정도면 21세기 톰소여에 그대를 임명할 수 있겠구나... ^^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여행지는 어디였을까?

세계적인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무덤이 있는 스웨덴 포러섬이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세계적인 거장의 겉을 모두 빼고 자연인 잉마르 베리만 하나만 남은 흙무덤 하나 보겠다고 스웨덴까지 날아가다니....

하지만 글을 따라 함께 가다보면 작가가 왜 이 곳을 굳이 가야했는지가 수긍이 간다. 무지 어려울것 같은 분위기와 명성에 압도되어 그의 영화를 하나도 못본, 그래서 잉마르 베리만이라는 영화감독에 대한 존경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의 무덤은 신성한 성소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의 삶이 마지막조차도 이렇게 비장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니....

 

또 하나 이 책의 마지막 아름다움은 여행의 본질을 잊지 않음에 있다.

"여행이라는 것 역시 나그네에게는 삐걱대는 삶을 수리하는 기간일 것이다."

"누군가 잠깐 들른 휴식 공간이 다른 이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 여행자는 종종 죄책감의 삯으로 환상을 소비한다."

"전경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들이댈 때, 멀리서 나를 알아본 테오의 엄마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사진 찍는 것보다 마주보며 나도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감성이 얼핏 평범해보이는 여행에세이를 비범하게 빛나게 한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그와 함께 한 여행이 끝났을 때 내 입가에 미소 한자락을 머물게 한다.

 

(글 속의 붉은 글씨는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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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6-0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전문기자로 여자로는 김혜리를 좋아합니다.금요일 밤 10시 문화방송 FM 성시경의 푸른밤에 고정출연하는데 아주 해박한 지식과 감칠맛나는 언변으로 영화이야기를 해줍니다.목소리가 좋아서 매주 듣습니다.추천!

바람돌이 2013-06-04 23:22   좋아요 0 | URL
김혜리씨의 책도 눈팅만 하고 있었는데 챙겨놔야 하겠네요. ^^
라디오를 따로 챙겨듣지는 않는데 혹시 팟캐스트로 떠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