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거리는 흐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인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거리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밝게 빛나는 쇼윈도와 반대 방향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만 신경을 집중한다. 그들은 민감한 센서를 장착한 로봇들처럼 여러 방향에서 흘러오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나 거리의 존재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거리의 거주자이며 따라서 거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게 된다. 담장 위의 길고양이가 오직 다른 길고양이만을 바라보듯, 그들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본다. 이것이 거리의 삶을 시작한 제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78페이지)

 

 소설은 충격적인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을 토막냈다가 살려내는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가 나오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내시를 토막내고는 살려내보라하는 황제가 나오고, 그리고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는 토막났다가 살아난 마술의 또하나의 주인공 어린 조수가 나온다. 마술사는 황제의 행동에 놀라 마술에 사용했던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그리고 상황은 종료된다. 하지만 이야기 어디에도 그 어린 조수가 어찌 됐는지는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관심가져주지 않는 어린 조수의 이야기, 그것이 제이의 이야기이다.

 

  제이의 삶은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서 어린 소녀가 혼자 낳은 아이, 어쩌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 있었던..... 버스터미널은 머무는 이의 장소가 아니라 떠나가고 떠나오는 자들이 흘러가고 흘러드는 곳이다. 작가가 얘기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리는 흐름의 장소이지 멈춤과 성찰의 장소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제이의 삶이 그렇게 거리에서 거리로 흘러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이에게 멈춤의 공간이 전혀 없었던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들마저도 잠시 스쳐 가는 곳이지 거주의 장소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장소가 그렇듯이 사람 역시 그러하다. 동규와 목란이 약간의 예외랄까? 제이에게는 모두가 스치는 사람일뿐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제이가 만든 것일까? 아니 제이는 그저 떠밀려다녔을 뿐이다.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졌고, 그렇게 내처졌다. 제이의  삶은 일상의 안정과 머물 장소를 소유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있는지 모르고, 알고싶지 않고, 알아도 잊고싶은 비루함일뿐이기 때문에......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세계와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들의 도덕과 생각은 사회의 통념과 다르다. 누구도 그들에게  안락한 머뭄의 공간을 제공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사회의 통념을 따르라고 하는게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거리 안쪽의 세상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과시하듯 자랑스레 생각하는 이념들 - 안락한 생활, 보장된 미래, 가족의 따뜻함, 어른의 보호- 그 어느것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의 아이들은 그들을 내친 사회가 그들을 내친 방식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완벽하게 일방적이고 완벽하게 폭력적인 그 오랜 과정들을 말이다. 사람들은 거리에 나온 제이가 처음 만난 가출한 아이들의 생활에 경악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즉각적인 응징과 본드와 섹스와 매춘, 그리고 기생하는 삶.......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과장이겠지? 가출한 아이들이 이렇게 산다고? 설마......" 그러나 정말 몰랐을까? 진짜? 당신의 머리속을 구석구석 파헤쳐봐. 알잖아. 그냥 외면한 거잖아.

 

  이 책은 읽는 시간은 갑갑한 우울의 시간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슬픔이다.

   제이와 아이들의 8.15 대폭주는 스펙트클한 슬픔의 폭발이다. 거리의 아이들은 분노를 표현하고 소리지르고 내달린다. 그러나 어른들은 절대로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인정하지도 못한다. 슬픔을 인정하면 그들의 분노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해있다.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바꿔봐! 좀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너의 에너지를 표출해봐!'라고 말하는 순간 더이상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저 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목란이 얘기한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오토바이를 탈거예요."

나는 말한다. "너는 내일 죽지 않을거야. 그게 문제야"라고.....

그래서 제이와 목란은 제이와 목란일 뿐이다.

 나는 나일 뿐이고....그들에게 나의 시각은 꼰대의 시각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나에 의해서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제이는 모든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제이의 목소리는, 거리의 아이들의 목소리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은 나의 목소리를 제발 들어줘라고 해석해야 할지도.....

소설속 에필로그에서 제이의 얘기를 전했던 여인이나 제이의 얘기를 썼던 소설가(혹시 작가 김영하 자신일지도 모르는)에게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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