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하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말 그대로 암흑이다.
민중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데 없고, 모든 조선의 백성들은 다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일제에 저항적인 맘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일본인은 모두 나쁜 놈 왜놈이고......
물론 그 시대가 암흑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김학철씨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이면의 장면들이 꽤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 상황들은 절대로 일반화 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수많은 예외적인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그 상황의 풍부함을 비주류로 한구석에 치워버리거나 아니면 획일화의 칼 속에 던져 넣을때 억압이 시작된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가 원산항에 기항 했을 때의 장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선생님 인솔하에 등함한 우리를 깨끗한 수병복을 입은 젊은 수병이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는 절로들 어깨가 으쓱거렸다.
"우리 해군이 세계 제일이다."
"우리 무적 함대 앞에 어느 놈이 감히!"
우리는 긍지감에 가슴들이 부풀 지경이었다.
반일 감정과 친일 감정이 밀물과 썰물처럼 아침저녁으로 갈마들고 섞바뀌는 기이한 시절이었다.(14쪽)
원산대파업때의 풍경 -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항구에서 깡패들이 동원돼 파업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때) 안벽에 선복을 붙이고 있던 (파업때문에 여러 날째 화물을 부리지도 싣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던) '쓰리가마루'라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관전을 하고 있던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러댔다.
"파업만세!"
"형제들 버텨라!"
이것을 신호로나 한 듯이 안벽에 정박해 있던 다른 일본 기선의 선원들도 모두 다 응원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일제히 우렁차게 기적들을 울려줌으로써 파업자들의 기세를 와짝 올려주었다.
나는 금세 우쭐우쭐 어깻바람이 났다.
- 잘한다. 우리 편이 이긴다!
그러나 다음 순간
-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편을?......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왜
놈들은 다 악당이어야 하잖는가......(41-42쪽)
이재유의 탈출사건 -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 이 이재유가 놀랍게도 온 장안의 예상을 뒤엎고 경성제국대학의 한 일본인 교수 댁에 가 숨어 있었을 줄을. 미야케 시카노스케라는 그 교수의 이름이 신문에 선명하게 찍혀 나왔을때
- 제국대학의 한다하는 일본 교수가 우리 탈옥수를 숨겨주다니!
나는 정말이지 제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