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LM은 임신중지를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방편이자, 여성으로 하여금 강제된 모성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행위로 보았다. - P53

 앞서 말했듯, 임신중지 법 개혁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나 임신중지를 사회적선 혹은 도덕적 선으로 나타내면서 얻어진 게 아니다.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불법적으로, 규제 바깥에서 행해지는 ‘뒷마당‘ 임신중지보다 규제 아래 이루어지는 치료적 임신중지가 더 나은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 P59

임신중지 여성은 자율적인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상황의피해자로 묘사되곤 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모성을 거부할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혹은 잠재적인 아이를 극심한 가난이라든지 ‘미혼모‘라는 사회·경제적 지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뿐이다. 입법자와 대중에게 연민을 호소하는방식은, 임신중지 여성을 논쟁의 주체 자리에서 타인의 선의에의해 구조받는 ‘절박한 여성‘, 즉 물질화된 객체로 탈바꿈했다. - P63

 WLM의 임신중지 캠페인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또한 ‘강제된 모성‘을 주입하는 국가로부터성적 주체라는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운동의 목표를 대중에게 전달했다. 학자이자 활동가인 로절린드 페체스키RosalindPetchesky의 말에 따르면, WLM 활동가들은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것이 모성을 강요하는 일이라는, 그리고 모성은 형벌이나 숙명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여야 한다는 강력한 아이디어"를 퍼뜨렸다. 동일임금, 보육, 성적대상화 반대 등 다른 핵심적인 캠페인도 같은 맥락에서 생겨났다. - P65

여성해방론자들은 임신중지권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몸과 삶을 통제할 권리‘로 여겨져야 한다고 믿었다.  - P66

여성해방론자들은 임신중지가 모성보다 감정적으로 이롭다는 관점을 전파했다. "당신은 임신중지를 해서가아니라 아이를 낳고서 정신과에 갈 확률이 더 높다. "65 이들은 임신중지를 죽음과 등치하던 기존 관점을 뒤엎으면서, 임신중지를
‘생명을 주는 행위‘로 재현했고 임신중지를 원치 않은 아이를 낳는 일과 대비했다. 원치 않은 아이를 낳는 일은 "희망의 죽음, 혹은 창조적 정신의 실패라 할 수 있었다. "66 WLM은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임신중지를 개념화하며, 기존의 수치와 죄책감을 안도의 감정으로 대체했다.  - P68

RTL에게 임신중지를 통해 재현되는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은 이전까지 ‘눈에띄지 않은‘ 정체성(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이 가진 특권의 상실 이상을 의미했다. 이는 반대론자들이 무척이나 추구하던 안정적인 정체성(자연히 존재하는 어머니라거나 가부장 등)의 상실이기도 했다. 여성해방론자들도 자기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위해 대안적인 정체성과 삶을 찾는 데 골몰했다.  - P75

RTL은 임신중지의 선택을 태아살해와 연결했고, 뉴스레터에 실린 묘사를 통해 임신중지 여성을 무아적인 ‘모성애‘의 정반대에 위치시켰다. 이 담론의 반대편에 WAAC가 있다. WAAC는 여성중심적 임신중지 정치를 구사하면서, 남성중심적 재현 체계가 임신중지에서 태아중심의 도덕률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임신중지를 비밀과 수치에 연결 지어 여성을 어머니 역할에 묶어 두기 위함이라고 비판했다. 비록ALRA는 임신중지 법의 전면 폐지를 요구했으나, 반임신중지 정치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에 중요한 토양을 내주었다. ALRA의 수사에서 선택은 자기결정권이기보다는 절망에 따른 결과였다. 이들이 보기에 그런 선택은 끔찍하긴 해도 여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또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며 잠재적으로 태만한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 P83

그러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있다는 것은 욕망으로서 모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디어, 정부 정책, 정치 담화 등 다양한 맥락에서 여성의행복을 규범화하는 전제는 선택이라는 관용어를 통해 모성을 다시금 자연화한다. 모성이 임신한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하게 행복한 선택일 때, 임신 중지는 여성에게 괴롭고도 가슴 찢어지는선택이 된다. - P90

 개인의 선택이라는 수사는 일과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을 다르게 위치 짓는 구조적 장벽과 문화적 규범을 은폐한다. 그런 장벽·규범 - P99

에는 돌봄의 젠더화, 높은 양육비와 양육시설 부족, 성별 임금격차, 가정과 재생산 영역의 책임에 얽매이지 않은 ‘이상적인 노동자‘ 모델 등이 포함된다.  - P100

 이런 반응은 많은 의원들이 법안에 반대한 이유가 임신중지란 접근하기 어렵고, 공동체에서 낙인찍혀야 하고,
뭔가를 침해하고, 불편한 선택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임을 말해 준다. 그래서 임신 중지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막으려 하고, 나아가 임신중지를 행한 여성을 처벌하려 한 것이다. 타냐 플리버섹은 법안 반대자들이 임신중지를 "최대한 어렵게 만들어 여성들을 가르치려 들며 (・・・) 생식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섹스를 한 데 대한 벌로 여기게끔 하려고 애를 썼음을 지적했다.  - P118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온, 고통받는 ‘좋은‘ 여성과 이기적인 ‘나쁜‘ 여성의 이분법 (1장 참고)이 임신중지 문제에서도 다시등장한다. 이런 이분법은 원치 않게 임신한 여성의 주체로서의위치, 그리고 자기 본위로 행하는 임신중지의 정당성을 퇴색시킨다. 임신한 여성이 곧바로 임신하지 않은 몸이 되는 것, 아이가 없는 것, 혹은 더는 아이가 없는 것이 임신중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입밖에 낼 수 없게 된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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