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 P14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 P18
이들은 듣는 이와 달리 늘 다른 공간에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적어도 세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지금 내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때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사람, 그리고 나. - P24
광학에는 ‘집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사체를 잡아내는 렌즈의 정확도를 말한다.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은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여자‘의 전쟁이 ‘남자‘의 전쟁보다더 처절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남자들은 역사 상황이니 따위의명분 뒤로 숨고, 전쟁은 이념이므로 이해관계를 내세워 그것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또는 그것에 맞서야 한다고 유혹한다. 반면에 여자들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언젠가 총을 쏘게 될 상황에 미리 대비한다. 여자들은 총 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아니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다른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기억하는 방식도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한다. - P28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리 남편한테 물어봐. 그 양반은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오죽하면 지휘관들, 장군들 이름은 물론 부대번호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생각도 안 나는데, 나는 내가 겪은 일만기억나 내가 겪은 전쟁만,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 나는 그끔찍한 외로움을 알지. - P65
또 무슨 일이 있었나………… 글쎄・・・・・・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 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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