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저녁의 시작이며,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을 때가 저녁의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지, 먹는다면 누구와 먹을지 고민을 하는 순간부터 저녁이 시작되며, 밥을 다 먹고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두었을 때쯤 저녁이 끝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P17

입춘
온갖 무렵을 헤매면서도
멀리만 가면 될 것이라는 믿음
그 끝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 P21

밥을 먹고 나서, 선배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물론학교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교문과 담벼락 사이를 걸으며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을 짓다가 돌아왔습니다. 서울로오는 길에는 선배의 시집을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 먹어본진주비빔밥도 학교 앞에서 한가하게 발을 옮기는 시간도 선배에게 받은 선물 같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P33

여리고 순하고 정한 것들과 함께입니다. 살랑인다 일렁인다 조심스럽다라고도 할 수도 있고 나른하다 스멀거리다라는 말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저물기도 하고 흩날리기도 하다가도 슬며시 어딘가에 기대는 순간이 있고 이내 가지런하게 수놓이기도 합니다.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잡으면 놓칠게 분명한 것입니다. 따듯하고 느지막하고 아릿하면서도 아득한 것입니다.
- P37

어제는 유난히
바람이 거센 하루였습니다

가지가 많은 나무가 아니더라도
바람 잘 날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바람을 타고 씨앗들은
얼마나 신나게 날아갔을까요.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던 외진 곳
새로 푸르게 돋아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 어제의 바람 덕분일 것입니다.
- P59

요즘 저는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이어 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꾸미기에는 조금 지쳤고 이미 꾸며진 일들에는 마.
음이 선뜻 닿지 않습니다. 이러한 닫음이나 닫힘이 좋은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냥 이렇게 알고있다는 정도로 경계와 반성을 대신합니다. - P67

정의

사랑은 이 세상에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
그리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 P101

용서 못할 사람이 잘못이지, 용서 못한 사람이 잘못인가?
노력해서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를용서하는 것은 내 노력으로 안 되는 거야. 잘못보다 더 천천히 와야지, 잘못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워야지. 용서라는 것은말이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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