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둘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는 경제 모델을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벌써 한 세대가 넘도록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엔저를 무기로 한 수출주도형 기업들이 무한한 자본과인력을 가져다 쓰던 경제 모델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저에 깔린 만성적 경제 문제가 겉으로 드러날 때마다(그런 일이 과거 반복해서 발생했고 2012년 말에 또 한 번 찾아왔다) 정치 지도자들은 매번 똑같은 낡은 수법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엔화를 크게 평가절하하고, 인구가줄어만 가는 지방에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돌려대고, 세계가 일본 제품을 더 사주기를 바라는 수법이 그것이다.  - P418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사례가 정치가 부재해도 사회가 정상 기능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은 정치와 권력이 사라진 시장 중심의 사회라는 신자유주의적 환상과는 거리가 먼 국기다. 오히려 일본에서 정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시장을 간섭하고 동제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정치의 존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P421

메이지 지도자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로, 일본 정치에는 의심의여지 없는 명확한 통치권을 갖는 권력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관계에 있는 권력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온전히 합법적인 판단을 내려줄 제도적인 절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이 전혀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켰던 것 또한 공개적인 정치 절차가 없었던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 P424

하지만 전후에 등장한 너그러운 형태의 질서 또한 일종의 정치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외부 상황이 급변할 때 일본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종류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필요로 했던 정치 시스템은 권력에 도전하는 잠재 세력들을 필요에 따라 흡수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정치였다. 막강한 정부 부처들 사이에서 또는 그 부처들과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였다.
그리고 해외 국가들에게, 일본이 그들에게 친숙한 정당과 선거와 총리와 법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운영되는 나라라고 안심시켜줄 수 있는 정치였다.
이러한 정치 시스템을 1955년 체제‘라고 부른다.
- P425

자민당은 정책을 결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정책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일본 관료가 오를 수 있는 커리어의 정점인 각 부처 사무차관들의 일이었다. 자민당의 주요 임무는 방해가 될 만한 힘을 가진 모든 주요 이해관계자가 정책을 지지하도록 매수하는 것(자민당은 야쿠자는 물론이고 PTA,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주부들의 연합까지 사회의 모든 주요 그룹과어떤 식으로든 연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지배 엘리트층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완충 작용과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 P434

고이즈미의 연례 야스쿠니 참배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주변국들의 분노를 유발함으로써 얻는 실질적 이득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일본 정치라는 연극무대에서 상징이 샂는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 P482

무역 협의에 방해될까봐 또는 주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봐 일본을 위해 순국한 가미카제비행사와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한다는 것은 많은 일본인에게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전범의 위패가 함께 있다고 하는 사실도대다수 일본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3장에서 보았듯이,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행사했던 일로 여겨져 그 정당성을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누가 전범으로 기소되고누가 기소되지 않았는가는 상당 부분 운의 좋고 나쁨의 문제였고, 실제로 얼마나 책임 있느냐보다는 누가 더 관료사회 내부의 정치에 능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P483

그러나 아베가 총리로 등극하면서 우파들은 선을 넘고 말았다. 고이즈미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오히려 고이즈미 시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잊고 만 것이다. 우파의 패권 장악이라는 늑대는 개혁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아베는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때에도 가벼운 립서비스에만 그쳤을 뿐인 일련의 어젠다를 현실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후 헌법의 개정, 사과를 모르는 강한 군대, 일본 주권 체제에서 황실의 중심적 위치 인정, 1930년대 일본의 행위가서양 제국주의 및 동아시아에 무력을 통해 강요된 해외 사상 사회주의,
자유주의)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다는 견해의 보급이그것이다.
그러나 아베의 이런 어젠다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의 대부분은 이 모든 것에 그저 당황했을 뿐이다. 그들의 삶, 그들의 고민과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였기 때문이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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