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었지만 일본 근현대 소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전율이 오는 것 같은 세밀함이고, 두번째는 짙게 깔린 허무였다. 커다란 산맥 같은 유럽 소설과 극적 요소가 강한 드라마 같은 한국 소설에 비해 일본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처음 맛본 ‘이상한 과일‘ 같은 느낌이었다.
- P13

"봄은 꽃, 여름엔 두견새, 가을은 달, 겨울엔 눈雪, 해맑고 차가워라."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소감 첫머리에 도겐의 시를 인용한다. 너무나 선禪적인 이 문장은 『설국이 어떤 출발점에서 쓰인 소설인지를 웅변해준다. 『설국』은 스토리 위주의 서구식 소설 작법을무시한 채 흡사 점선을 찍듯 분절적 기법으로 써 내려졌다. 그 하나하나의 점에는 자연과 계절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간사가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가는 독서법으로는 『설국의 참맛을 도저히 느낄 수 없다.
- P32

『설국』에서 애타게 시도한 자신의 문학적 실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작품의 형태를 정비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적인 필연을 죽였다"는 것이다. 절대미의 완성이라는 주관적인 필요를 위해 현실성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P49

『설국은 줄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 시마무라가 살고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 즉 에치고유자와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우리가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 P82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이자 동시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는 "어떤 시대관념도 가와바타 씨를 기만하지는 못했다"라고말한 바 있다. 근대, 신감각파, 지성, 국가주의, 실존철학, 정신분석등 온갖 관념이 우리 시대를 백귀야행처럼 나돌고 있으나, 그는 그어느 것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 P75

터널 밖 세상은 환상에 기반한 모자이크 같은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소설은 독자들을 힘들게 만든다. 독자들은 습관적으로 인과관계를 통해 하나의 전체상을 포착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 시를 읽듯 이미지로 읽어나가는 것이다. - P82

이 무렵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적어도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서구의 자기장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그가 발표한 수상 소감문의 제목은 「아름다운 일본의 나였다. 그는 진짜일본의 미가 전쟁 이전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서구 문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고전의 미학을 설국』에 적용시키고 싶어 했다.
소설에 하이쿠가 등장하고, 노벨상 시상식장에서 13세기 승려 시인인 도겐의 시를 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 P112

사실 ‘체념‘이라는 단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다.
니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 체념한다는 것, 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 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말하기도 했다.
- P138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시에 그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며, 자신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 고도 덧붙였다. 어떤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치고는 꽤나 단정적인 발언이었다. 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 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 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같은 것이었다. 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P243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거리 두기의 천재다. 「천 마리 학 에서는죽음도 외설도 한낱 멀리 있는 대상이나 현상에 불과하다. 그는 이야기에 직접 뛰어들어 개입하지 않는다. 어떠한 가치 평가도 하지않는다. 그가 그리는 모든 장면은 그저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이런 고도의 장치 속에 소설을 집어넣는 것은 그만의 특출한 마술적 재능이다.
- P247

그는 훗날 "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보다는 비속화된 다도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시 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늘 아름다.
워 보이는 것에서 추함을 찾는 악취미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민낯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일깨워준다.
- P24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신비주의와 마성은 현실에는 아름다움도깨달음도 없다는 그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지는 문학적 경향이다. 그에게 현실은 이미 죽은 것이었다. 젖먹이 때 부모가 죽고, 소년이 되기도 전에 누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그에게 현실은 이미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원체험을 가진 그에게는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 부정의 욕망이 이글거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을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면 안 되는 이유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그의 내면을 만나기란 불가능하다.
- P261

줄거리 진행을 기준으로 그의 작품을 보면 ‘이게 뭐지‘ 하는 의문에 빠지기 쉽다. 그의 소설에는 환희와 분노도, 선과 악도, 적과 동지도 없다. 이런 것들을 일부러 거세한 듯 그의 소설은 무한을 향해갈 뿐이다. 그의 소설에는 궁극이 있다. 궁극의 욕망, 궁극의 삶, 궁극의 관계. 궁극을 찾아간 그의 귀착지는 허무다.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인간의 생은 허무한 것이므로....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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