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 즉 인간의 의식활동에 대한 기술, 습성과 행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 수많은 정치체제에 대한 기록은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의 현상학적 논의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따라우리 안에서 또는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험이나 측정 기구 없이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읽기의 가장 큰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P17
‘관찰자‘와 ‘국외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테오로스theros‘ 다.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면 국외자의 시선이 필요하고, 국외자가 할수 있는 일이 관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명적으로 ‘테오로스‘ 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곳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철학을 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 P2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과 달리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참여할 수도 없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의 현실과 그를 둘러싼 자연의 현실을 더욱더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생애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각각 비오스 테오레티코 스 bios thedretrikos그리고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관찰자 삶의 전형을보여준다. - P23
다채로운 자연이나 사포의 애절한 서정시 말고도 레스보스섬을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레스보스는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섬에 머물면서 물고기와 철새 들을 연구한 것이서양 생물학 연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레스보스는 식물학과 광물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레스보스에 함께 머문 것을 시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탐구에 동행한 테오프라스토스가 식물과 광물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레스보스의 에레소스가 고향인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섬 체류를 권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에레소스의 해변에 사포를 기리는 조형물과 함께테오프라스토스의 두상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94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는 새로운 아카데미, 노천 아카데미아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변증술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었다. - P117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나눈 대화는 난민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난민 때문에 고민이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여행 전 본 기사에서 시리아난민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던 할머니가 했다는 말과 똑같았다. 기사에 따르면 어머니가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피해 레스보스섬에 온 난민" 이었다는 할머니는 "난민 자녀로서 그들을 친절하게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고 말했다. - P131
윤리적으로승인된 행동은 반복을 통해 내면의 습성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정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일을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일을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II 1) 이것이 에토스다. 에토스는 흡혈박쥐의 나눔처럼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획득된 행동 성향이다. 공동체는 에토스를 공유하며 윤리를 형성한다. "난민 자녀로서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는 레스보스섬 할머니의 말은 이런 에토스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P133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사람도, 마케도니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시민권이 없는 거류민이었다. 이런 조건이 정치에대한 거리두기를 내면식 성형으로 굳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대중의 마음과 권력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을때 강해진다. 이소크라테스나 데모스테네스는 그런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지를 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앞을 향한 의지는 권력을 향한 의지를 대신했고, 그는 이 의지를 최대한 발휘할 조건을 찾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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