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으로부터 이어진 넓은 길은 조사위원들을 "절대적 폐허의무(nothingness of absolute ruin)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식은 용암지대와 같은 회색의 돌무더기와 자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돌조각과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 여기저기 크게 쌓여있는 돌무더기, 부서진 벽, 불타고 남은 건물 목재, 잿빛의 기둥, 바닷가에서 퍼온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는 자갈들까지 그곳에는 무엇 하나온전한 것이 없었다. 몇시간의 조사를 통해 대략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 그저 추측 가능했을 뿐이다.  - P173

이렇듯 수많은 북한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지내다.
가도, 언제든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급속히 추락하곤 했다. 사실상 이 당시 북한사람들의 상당수가 일종의 정신적 외상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줌의 재로 사라진 상황 속에서, 그리고여전히 폭격기가 일상적으로 머리 위를 배회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건강함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188

이 감옥들은 전쟁 이전 시기의 물류창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내에서 가장 큰 농산물 보관소나 화약창고 같은 곳이 사람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활용되었다. 응당 이곳에는 화장실이나 세면실 같은 것이 따로 설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이곳에 함께 수용된 수많은 성인남녀와 아이들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모욕감까지 안겨주었다. 마치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향해 달려가던 유대인 수송열차 안처럼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행 열차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져 죽고 밟혀 죽고 병들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황해도의 여러 창고 안에서도 병약한 아기들과 노약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갔던 것이다.
- P19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역 기독교 인구가 급증하는 데 ‘전쟁‘ 이라는비평화적 상황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전화(戰禍) 속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교회로 몰려들면서 기독교가 평안도와 황해도 각처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기에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생존을 위해 교회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과거와는 달리 비참한 상황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주민들은 미군이 교회를 폭격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집단적으로 폭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들 중 하나였던 교회는 오히려 미군 폭격기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펠턴이 노인에게 물었다.
- P196

"당신은 기독교도인가요?"
그는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펠턴은 다시 물었다.
"크리스천이세요?"
노인은 고개를 들면서 펠턴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펠턴은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로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의 노쇠한 몸이 떨리고있었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기때문에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 P197

이렇듯 미군을 학살의 직간접적 주체로 지목하고 있는 증언들은 사실상 국제여맹 조사단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분석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 국내학계의 황해도 집단학살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학살사건의 명백하고 중요한 가해사 중 하나로 이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인 ‘우이 치안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논저들은 대체로 한국전쟁당시 황해도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대부분 피란민)의 구술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관련 구술자료는 꽤나 일관성 있고 방대한 편이다. 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에 대한 미군의 직접적 지시나 방조 여부에 대해서는여전히 학계 내의 합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황해도 본토박이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 가담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 P205

1948~49년 제주4·3사건 당시 진압군을 지휘했던 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이 그로부터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폭력적군사문화의 일본군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간과할 사안이아니다. 게다가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도 온건한 입장의 송호성(宋, 광복군 출신)을 대신하여 일본군 출신의 백선엽(白善華), 백인엽(白仁壁), 김백일(金山一), 김종원(金宗元) 등이강경진압을 주도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신참변과 난징대학살로 이어진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성은 불행히도 해방 직후의친일파 미청산 및 친일군인들의 권력 장악과 함께 한국현대사 속에서부활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펠턴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고, 나체로 끌고 다니고, 무차별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믿기지 않았겠지만, 수년 전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같은 일들은 언제든 현실에서 재발 가능한 악몽이자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건들이었다.
- P226

국제여맹의 현지조사 시점은 미공군의 ‘초토화정책 수행 직후의시점이었던 것이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북한지역내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실제 11월 8일 신의주 대공습을 시작으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불살라버리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1950년 11월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에 대한 미공군 자체 평가에 의하면,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75퍼센트, 희천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 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폭격 피해에 대한 국제여맹의 주장은 전혀과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 P286

보고서 발표 직후 덴마크의 한 언론은, 이 여성들이 자신의 고국으로돌아오기 전까지 "서방 국가의 어떤 사람들도 한국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 P294

그러나 북미와 서유럽에서 위와 같이 국제여맹 보고서에 대해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고서에 반영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철저히 묵살되거나 노골적으로 탄압받곤 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 P295

1951년 매카시즘이 정점에 달해 있던 미국에서 레드콤플렉스를 활용한 특정 세력의 무력화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미국정부는 그 같은 ‘빨갱이‘ 낙인찍기 임무를 미국 내의 보수적 여성단체들에게 위임했다. 정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 자국 내의 애국주의적 여성단체들을 활용해 좌파적 여성평화운동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P295

그런데 국제여맹은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보낸것이 결정적 문제로 지적되어 , 결국 1951년 유엔 내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16 냉선 초기 가 많은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던 국제여성단체가 한국전쟁 관련 활동을 이유로 유엔 내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했던 것이다.
- P296

수난은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명의한국전쟁 조사위원들이 북한지역 조사활동을 이유로 끔찍한 정치 · 사회적 탄압을 받았다. 물론 중국,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공산국가출신 조사위원들은 귀국 후 특별한 정치적 조치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P296

명확한 자유주의적 정치성향의 덴마크 조사위원들이 북한여성 원조에 적극적으로 임한 이유는 간명했다. 북한지역에서 다수의 타협할 수없는 진실들" (irreconcilable facts)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펠턴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펠턴은 조사 과정 내내 다양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있었다. 펠턴은 이를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란 "시체가 매일 쌓여갔다"는 것이었다. - P316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전쟁 상황하에 살아가고 있다. 분단체제라는 전쟁과 같은 굴레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할 것이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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