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소이탄 공격을 통한 신의주의 완전 파괴는 당대 미공군 문서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입증된다. 앞서 간략히 설명했듯이, 1950년10월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대량의 소이탄을 사용한 신의주 대공습 작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유엔군은 공중폭격정책을 과감히 수정하여 기존과는 완연히 다른 노선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의 초토화정책이 현실화된 것이다. 11월8일 신의주 대폭격의 실행은 한국전쟁기 유엔군 작전사는 물론, 인류평화사와 냉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 중 하나였다. 유엔군은 과거의 역사 속에 박제해버리고자 했던 2차세계대전의 악령을 한반도 상공에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다.
- P138

유엔군은 신의주라는 도시 자체를과거 아무런 인공적 구조물도 없었던 시절로 돌려놓으려는 듯이 맹렬하게 파괴했다. 1950년 11월 17일, 맥아더는 주한미대사 존 무초를 만난자리에서 북한지역 전체가 사막화될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이는 결코과장된 허풍만은 아니었다.  - P146

그녀의 주거공간은 무덤 크기 정도의 토굴이었다. 그녀는 그 구덩이안에서 남편 및 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목재가 토굴을 떠받치고있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주먹질만으로도 곧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토굴 안에는 양초와 작은 양푼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가재도구의전부였다. 그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의 식량은 시 당국에서배급하는 쌀과 콩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물은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급수 펌프에 의존했다.
- P149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 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조사위원들은 "어째서 피해가 이다지도 막심한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반복적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었다.
"시의 직원들이나 데중들을 만니 우인히 대화를 나누며 질문한 결과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와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은 첫번째의 파상적인 소이탄 투하 이후 불을 끄기 위해 거리로 나간 사람들이 저공비행기총소사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었다고 말했다. 도시에 대한 완전소각은 화재진화를 시도한 민간인들을 기총로사하는 과정에서 초래되었다. - P151

북한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직후 도시 전역에 걸쳐 시한폭단을 투하하는 행위였다. 국제여맹 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공군 폭격기들은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다량의 시한폭탄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경우도 있었다. 며칠 뒤 국제어맹 조사위원들은 평양지역 현지조사 과정에서10~20분 간격으로 세발의 시한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지적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조사위원들의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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