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평화‘와 ‘인도주의‘의 문제가 전쟁의 발발, 전개, 정전 과정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좌파적 여성주의자들 또한 동시기 평화운동의 적극적 주체로서 세계 모든 대륙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 P12

그러나 최소한 이 책은 1951년 당시 북한지역에 거주하는여성들을 ‘북한여성 (North Korean women)이 아닌 ‘한국여성‘ (Koreanwomen)으로만 호칭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자 했던 외부세계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보여줄 것이다. 냉전은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왼전히 삭제해버리려 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달냉전의 현실 속에서 국제어맹의활동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국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던 이들이 왜 유서를 쓰고 압록강을 건너갔는지, 그리고 그 잿빛 현장에서 여러차례 북한여성들을 부둥켜안고 쏟아낸 굵은 눈물의 의미가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22

그런데 스티버니지 개발계획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추진된 막대한국방비 증액에 의해 그 실행 과정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노동자들은 자신 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미래가 빠르게 되색되어가는모습을 무력하게 비라보았다. 냉선과 한국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화의 파고가 영국의 정치와 노동자들의 일상을 격렬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펠턴의 한국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P26

전쟁 승리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처칠 정부가 외교와 군사문제에집중할 때, 노동당은 국내문제‘에 대한 주요 책임과 역할을 떠맡았다.
유럽 전역에서 독일이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해나갈 때, 처칠 정부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영국인의 ‘공동체의식‘과 ‘사회개조‘ 의 필요성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구가 광범하게 유통되었고, 토인비(A. J. Toynbee), 케인즈(J. M. Keynes)와 같은 지식인들이그 같은 기대에 진보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전쟁 승리는 반드시 진보와동행해야 할 것이었다." 그 같은 진보와의 동행은 『타임즈 ( The Times)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우리의 적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위한 정책이었다.
- P28

 1951년 4월 북한행 직전의 모니카 펠턴은 영국사회의 정치 - 경제적미래상에 대해 우울하고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영국의 ‘희망이 벌써 사라져간다 거나, ‘세계를 향한 우리의 희망의 일부분‘
이었던 스티버니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펠턴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 과정이 영국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역행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외교와 재무정책은 급속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두려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P30

국제여맹 영국 지부가 한국전쟁 조사단 참여 여부를 의뢰하는 초청장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비록 그 이전까지 이 단체와 연결된 적이전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초청에 응하는 것이 노동당 평생 당원으로서 노동운동에 도움을 주고, 노동당의 가장 훌륭한 전통의 일부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이 나라의 국민들은 북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심지어 지난가을 이래로 남한으로부터 제공된 보고들 또한 점점 디 심하게 검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영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동력은 언제나 사실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견해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반 당원들의 열정으로부터형성되었다. 나는 한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었다. 그 유일한 목표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진실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것이었다. - P35

한국전쟁은 1945년 이래 애틀리 노동당 정부가 추진해온 사회주의적정책을 심각하게 역진시키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구호 아래 시행된 다양한 사회보장과 주택 정책들이 막대한 국방비 증액에 의해 휘청거렸다. 이에 맞서 노동당 좌파 의원들은 당의 사회주의적 전통에 따라 쉽게 묵과할 수 없었던 미국의 비인도적 공중폭격과 이승만 정부의 잔학행위 관련 보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과연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영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희망던 사회보장 계획을 퇴보시키면서까지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증액하는것이 적절한 선택인지 논쟁이 일었다. 1951년 4월, 펠턴은 이 같은 논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 P36

국제여맹은 이내 전후 여성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1949년 미국 내의 페미니스트들조차 국제여맹이 "이제껏 세계가 보아온 그 어느 조직보다도 단연 대단한 여성 조직(the most tremmendous women‘s organization)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국제여맹 자료를 가장 광범하게 조사하여 이 분야 최고의연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프란시스카 더한(Francisca de Haan)의 표현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1945년 이후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여성단체"였다. 1951년 외제니 꼬똥(Eugénie Cotton)의 주장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전세계 9100만 여성들을 대변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 P57

즉 국제여맹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여성단체들 중에서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에 공명하는 단체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르고 연결하는 상위의 지붕조직이었던 것이다. 이 진보적 좌파조직의 핵심 주장은 평화,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으로서, 기존 여성운동의 주요 흐름이나 당대의 대표적 국제여성단체들과는 꽤나 상이한 주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 P58

국제여맹은 그 활동 초기부터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여성 조직들과의 연계를 형성하고, 그곳 여성의 삶을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단(fact-finding mission)을 파견했다. 1946년 국제여맹의 첫번째 진상조사단이 아르헨띠나,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에 파견되어 현지 여성 실태조사와 그곳 여성운동가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이해에 개최된 국제여맹 평의회(council meeting)를 통해, 향후에 개최될 모든 평의회에서 반드시 식민지 여성의 삶의 문제와 인종차별의 젠더적 영향에 대해 논의할 것을 결의했다. 표현 그대로 남아메리카 아시아 · 아프리카 여성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국제여맹 이전의 어떤 국제여성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중요한 역사적 변화였다.
- P68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유럽에서 파시즘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식민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응당 세계 곳곳의 수많은 여성들의 일상에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국제여맹은 이렇듯 파시즘과 식민주의로 고통받는 여성들과의 연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던 당대의 유일한 국제어성단체였다. 또한 국제여맹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시점부터 스페인, 남아메리카, 동남아 등의 지역에 지속적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던 세계 유일의 국제여성단체이기도 했다. 1951년 국제여맹의 북한 현지조사단 파견 조치는 결코 이 단체의 역사와 무관한 일회성의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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