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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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1979년작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의 투표권에 대한 여러 제한이 공식적으로 폐진된 것이 1965년이다. 하지만 차별의 역사에서 법적 권리의 확보는 평등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예제가 폐지된지 100년만에야 흑인들이 제대로 된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979년 흑인여성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 <킨>을 발표했다.

 

1979년의 미국은 어땠을까? 흑인 여성작가가 SF장르의 소설을 쓰고 출판을 하는 것이 그리 녹록한 사회였을까?

지금도 SF장르는 백인남성의 전유물인것처럼 다른 인종과 다른 성의 진입이 쉽지 않은 장르이고 여성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도 아주 야만적인 형태로. 작가 역시 이런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 P124 

 

1817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 다나의 독백은 아마도 작가의 독백일 것이고, 그것이 1817년 노예제 하의 미국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 흑인 노예의 아이들이 노예매매 시장을 재현하며 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값을 매기며 왜 내가 그정도 가격밖에 안되냐를 따지며 놀고 있다. 이 장면을 보던 다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노예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수월하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구나. 이제 이유를 알았어."
"무슨 말이야?"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억압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억압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작가는 소설을 통해 노예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노예제는 그저 채찍질이나 힘겨운 노동이나 감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정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을 전혀 지킬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조차도 존중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노예의 삶이고 노예제라는 것을 고발한다.

 

또한 눈에 분명히 보이는 악인 노예제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당사자와 관찰자가 얼마나 인식이 다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는 중요 남성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절대악은 주변인물로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백인 농장주인, 다나가 생명을 구해주고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는 백인 농장주인의 아들이자 이후 농장주인이 되는 루퍼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다나의 남편인 백인 남성 캐빈까지 노예제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층위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노예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왜 아직도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나를 죽일 뻔한 남자의 노예로 남아 있을까? 왜 그러고도 또 채찍질을 당했을까? 그리고 왜……… 왜 나는 지금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왜 조만간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겁이날까? -  P342

 

오직 다나만이 노예제가 외부의 온갖 억압과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 노예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다. 1979년에 다나라는 여성을 창조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뛰어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이론가, 페미니스트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1817년을 그대로 배경으로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당대에 뛰어난 사회소설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작가가 소재로 쓰고 있는 것이 타임슬립이다. 세상에 타임슬립이라니..... 지금이야 영화고 드라마고 소설이고 너무도 흔해빠져서 식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만 1970년대에도 그랬을까? 타임슬립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필립 K. 딕의 1964년작 <화성의 타임슬립>이 처음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마크트웨인까지 거슬러 간다지만 이 시대에 그리 흔한 소재는 아니였을 것이다.

 

작가적 재능이라고는 일도 없는 내가 타임슬립을 상상하면 뻔하다. "로또 번호를 알아가야겠네, 아 너무 빠른 시대로 가면 주택복권 번호를 알아봐야 되나? 아! 로또나 주택복권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딱 여기까지가 나의 상상이다. 조선시대나 구석기 시대 동굴로 갈지도 모르는데 그건 상상이 안된다. 어쨌든 지금의 타입슬립 소재의 드라마 영화 소설 등등은 클리셰화되어 나의 저 로또나 주택복권 번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욕에 빠진 나와 달리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과거의 원한이나 과거에 미제사건이나 걸치고 있는 옷은 다 다르지만 그것도 결국 복권에 다름 아니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소비되는 방식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의 머리속에는 그런 클리셰가 하나도 없었나보다. 주인공 다나를 그것도 흑인 여성인 다나를 노예제의 한복판으로 데리고 가버린 걸 보니말이다. 이제 소재는 소설의 이야기적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미국 노예제사회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 소설에서 타임슬립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공포이며 안타까움이고 ,소설의 극적 긴장을 고조시켜 주인공 다나의 감정으로 독자를 몰입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2개의 시대를  연결하면서 과거 세계와 지금의 세계의 사회문제를 말 그대로 리얼하게 파헤치는 리얼리즘 소설로 만들어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소설 <킨>은 SF라는 장르에 갇힐 수 없다. 리얼리즘 소설로서도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1979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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