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 P50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다섯시경이 되면 우리도 거리에 나가 사람 구경을 하거나 장을 봤다. 여행안내서에 이 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섬‘, 기리에선 모두가 모두에게 인사를 한다. 차가 멈추면 그것은 인사를 하기 위해서고 클랙슨이울려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 P78

그렇다면? 그저 나는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사랑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이왕 힘들여 극장을 지을 거라면 바다가 보이는 데가 좋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고향이 그랬으니까. 아테네가코린트가 그랬으니까. 지금도 전 세계의 이민자들은 자기가 살던 곳과 비슷한 곳에 정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시칠리아를 떠난 이민자들도 바다가 있는 뉴욕, 그것도 섬인 맨해튼에 정착했고 지평선만 보고 살던 독일 중부와 체코의 이민자들은 미국의 중부에 주로 자리를 잡았다.  - P88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 P91

구름들이 절벽을 스쳐 해협을 통과하며 붉은 지평선을 향해 몰려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내가 본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의 2.5인치 액정에 담긴 해협과 절벽, 불카노의 풍경은 빛바랜 관광엽서처럼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쿠터를 타고 달려와 맞이한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수백만 년 전 내 발밑 저 깊은 곳에서시작된 지각변동이 이 섬과 저 건너의 불카노를 만들었다. 지도만 보고 작다고 무시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 P120

어떤 풍경은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생수라는 만화에서 외계의 생물이 지구인인 주인공의 일부,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이 되어 살아간다. 그렇듯, 풍경의 장엄함도 우리 몸 어딘가에,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진 채 깃든다고 믿는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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