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군림했던 장 레옹 제롬은 인상파 화가들의 앞길을가로막았다. 예술은 지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에게 인상파는 허용할 수 없었던 미술이었다.
- P21

지금껏 패배를 몰랐던 영웅호걸이 러시아의 혹한과 노련한 적장에게 처절하게 박살나 버린 일을 후세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두 번이나 쉽게 이겼던 러시아군이었기에 아무리 자신만만했어도 상대편 지휘관이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로 바뀌어 전략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까지 당도했지만 비참하게 패하고달아나야 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65만 명의 대군 가운데 살아서프랑스로 돌아간 병사의 수는 겨우 3만 명이었던 사실을, 또한 역사를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집무실의 본인만은 아직 모른다. - P53

예로부터 가로수길은 왕후와 귀족이 사유지에 냈던 특별하고 개인적인 도로였고, 보기에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거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다. 대부분 성 안 정원에 조성했지만 성곽 밖으로 가로수 길이 난 경우는 보통 성문이나 사적인 예배당 등과 직접 연결되었다. 따라서 서민의 출입을 차단하여 선택받은 사람만 다닐 구 있는, 마치 레드 카펫과도 같은 길이었다. - P89

하지만 새롭게 탄생한 독립국 네덜란드는 특수한 나라였다. 당시주변국들은 어디든 절대주의 왕정 체제를 다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는왕족과 귀족도, 가톨릭교회도 몰아낸 나라였기 때문이다.(총독이 명목상최고 통치자였지만 의회가 존재하던 연방 공화정 체제였다.) 또한 이 시대는 자연을 힘으로 굴복시킨 인공의 나라였던 네덜란드가 해외 무역을 통해부의 축적까지 이루어 낸 황금기였다. 이제 가로수길은 더 이상 특권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시, 읍, 면이 공공사업으로 건설하여 국민 전체에게 개방되었다. 길게 늘어선 나무도 당연히 장중함을 연출할 필요가없었다.
- P90

이렇듯 호가스가 묘사한 인간의 모습에는 한결같이 가차 없는 시선이 나타나 있다. 그의 냉정한 태도는 상류 계급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귀족이는 거지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 아이든 부자든 빈민이든,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든, 그 누구도 호가스가 쥔 날카로운 풍자의 붓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의 신과도 같은 평등주의가 바로 호가스가 지닌 매력이었다.
윌리엄 호가스는 "내 그림은 나의 무대이고, 등장인물은 나의 배우다."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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