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쇼의 책이 일본 문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면, 내 아버지와 전쟁포로들은 그 문화의 최저 밑바닥에 있던 셈이다.˝
-리처드 플래너건-
타이와 버마를 잇는 철로건설현장에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을 동원했던 일본은 스들 문화가 세계최고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바쇼와 잇사같은 시인들의 하이쿠를 얘기한다. 루마니아의 유대인 시인인 파울 첼로는 수용소의 독일인들이 시를 쓴다며 울고있다.
수용소의 대장이었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일본 천황과 일본 제국의 찬런한 미래를 꿈꾸었던 나카무라는 전후 전범재판을 피해 모기 한마리도 죽이지 못해 살짝 잡아 밖으로 보내는 선량한 사람으로 착하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라고 악착같이 믿으면서....
조선인으로 강제징집당해 일본군 말단군인으로 무자비한 폭력앞에 굴복해 또다른 폭력적 가해자가 되었던 최상민은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받지 못한 월급 50엔을 생각한다. 그건 내 권리인데 왜 주지 않지? 한번도 권리라는걸 가져보지 못한 가장 아래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불행한 식민지 조선의 영혼.
도리고 에번스는 장교라는 이유로 노역에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죽음의 노동에 동원될 이들을 가려뽑아야 하는 처지다. 군의관으로서 한명이라도 더 살려내려 노력하지만 그렇게 살려낸 이를 다시 죽음의 길로 보내야 하는.... 일본군의 폭행에 죽어가는 부하를 그냥 바라봐야만하는 매일의 순간들.
전쟁의 공포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의 순간이 아니라 일상적인 폭력에 둔감해지도록 강요당하는, 그래서 내 옆 사람의 죽음에 둔감해지도록 강요당하는 이런 곳에서 더 생생하게 실감나게 다가온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20년 30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양심적이고 착한 이들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옆에 있던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밟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서일까?
전쟁의 광기와 폭력은 원래부터 악한 누군가의 손에서 시작되는게 아니다. 시를 쓰는 평범한 이들을 악마로 만들고, 폭력과 살인을 내면에서 너무나 쉽게 정당화시켜버리는 무수히 많은 평범한 악마들을 만들어내버리는 그것이 전쟁의 무서움이다. 그 평범한 악마에 내가 나의 가족이 친구가 포함되어질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전쟁의 무서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