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대전 대덕구 중리동 유적지 기행

     [대전 대덕구 중리동 유적지 기행]


- 출발일짜 : 2007년 2월 3일

- 출발시간 : 08 : 00 ~ 13 : 20

- 답사지 : 송애당(법천석천암각) → 쌍청당(원일당) → 정려공원(고흥유씨 정려각 및 정려비)

- 준비물 : 중리동 세부 지도, 디지털 카메라, 볼펜, 자전거, 메모할 수첩, 장갑 

- 동료 : 김웅진(대덕구 구청에 근무)씨, 한남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해서 직책만 표기한다).


■ 동기


한남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로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와, 대덕구청 문화담당에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가 대전 대덕구에 있는 역사와 유적지, 유물 등을 알리려는 계획을 작년 10월부터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미 대전에 올라온 것을 알고 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에 따라 하게 되었다. 물론 맨 처음 대답은 못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왜냐하면 경주 박물관에서 부여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가장 큰 이유는 박물관에 있는 나로서 나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해오던 일이라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왠지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부담감이 작용을 했던지 중리동 유적지 답사를 끝낸 지금도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대덕구 역사기행은 나로서 무척 부담스러운 작업임과 동시에 몰랐던 대전 대덕구 역사를 안다는 것 자체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으므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대전시 대덕구를 알린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면 두려움이 앞서지만, 대덕구 한 시민으로서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앞으로 역사기행을 하면서 유적, 유물사진과 보고를 약식으로 작성해 알라딘 사이트에 올려놓으려고 한다(역사기행전문은 대덕구에 속한 재산이므로 책으로 발간이 될 때까지는 못 올려놓는다는 말에 개인적으로 작성을 해서 올려놓습니다).


■ 대전시 대덕구 문화유적답사 대장정이 시작되다

 

 

금요일 저녁 박물관에서 퇴근을 해서 토요일에 있을 유적지 답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금요일 저녁이 지나고 토요일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허락한 이상 이제는 꼼짝없이 해야 한다는 친구의 협박성 말이 떠올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답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유적조사를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나려고 만날 장소로 이동을 했다. 어제 저녁 차로 이동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자전거로 답사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자전거로 대덕구 전 지역을 답사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든다는 단점은 있지만, 오히려 장점이 많다는 사실에 전부 동의를 하고 결정을 한 것이다. 앞으로 나, 그리고 친구들의 발이 되어줄 자전거에게 감사함을 표함과 동시에 한남대학교 정문에서 2007년 2월 3일 토요일 아침 8시 정각 맨 처음 답사할 코스로 장소를 이동했다.

 

■ 답사를 한 장소(松崖堂 - 雙淸堂 - 정려공원)


평소보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이동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미 시작된 여정인 것을...... 답사자 모두 바람이라는 방해물로 가면서 ‘왜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부는 거야’라는 불평을 해보지만 그와는 반대로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있다. 그만큼 답사가 기다려진 모양이다. 松崖堂(송애당)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출발 장소 지역에서 만난 시간은 아침 8시였지만,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다보니 30분 넘게 그곳에 있게 되었으므로 출발시간이 그만큼 지체가 되었던 곳이다.

 

   

       법천석총암각 - 정면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옆면에서 찍은 사진


송애당에 도착을 해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것은 송애당 정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법천석총암각바위’이다. 우리가 맨 처음 답사 장소를 정한 것도 이 암각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대전에 이렇게 큰 암각바위가 있었을까 할 정도로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과연 이번 유적지 답사기행을 잘 했구나하는 생각이 언뜻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송애당을 지키고 있는 대장군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대하니 또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감격은 수없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느껴본 것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느낀 것은 차원이 달랐다. 뭐라고 할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듯 깊은 내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파손된 것이 없나 살펴본 후 걸음을 송애당에 정문으로 옮기었다.

 


       

          송애당을 설명하는 알림판                                 송애당 왼쪽 옆에 세워진 비석

 


           담 넘어 정면을 찍은 사진                                  松崖堂(송애당) 정문


松崖堂은 대덕구 중리동 115번지 위치하며,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조선 효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경여(金慶餘, 1597-1653)선생이 丙子胡亂(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640년(인조18)에 지은 별당이다. ‘松崖(송애)’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굳은 절개와 우뚝 선 언덕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선생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마음에 담고자 건물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크기는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각지붕을 올렸으며, 이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김경여 선생님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되돌려 한번이라도 만나봤으면 한 위대한 조선의 학자이자, 유학자였던 사실을 이번 유적 탐방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너무나 큰 성과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유적지를 담사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나 우리민족의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반성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심산 김태원 선생님을 기념해서 만든 비석이 위치한 곳이다. 심산 김태원 선생님 또한 모르고 있던 인물로 처음 들어본 생소한 인물이었다. 내 자신 스스로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얼굴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낯이 뜨거웠다. 소위 역사를 전공했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내 자신에 대한 무지함에 각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이번 기행이었다.

 


           심산 김태원 선생의 추모비                   심산 김태원 선생의 생애를 알리는 비석



 

송애당과 심산 김태원 선생의 비석이 있는 곳을 답사하고 두 번째로 이동한 장소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雙淸堂을 답사했다.


雙淸堂(쌍청당)은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71번지에 위치하며,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부사정을 지낸 쌍청당 송유(1389~1446)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달촌에 내려와 살다가 1432(세종4년)에 지은 별당이다. ‘雙淸’은 “천지사이에 가장 맑은 바람(淸風)과 밝은 달(明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자신의 호와 건물 이름을 삼은 것이다.

 

 
             쌍청당 오른쪽 면을 찍은 사진                          쌍청당 왼쪽 면을 찍은 사진    

 

      

                   은진송씨대종가집 옆면                                    쌍청당송유선생유적비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각기와 지붕을 올렸으며, 조선시대에는 민가에 단청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는데도 건물에 단청을 한 것이 특징이다. 쌍청당과 은진송씨 대종가 댁에 방문을 해서 은진 송씨 집안에 대한 내력을 듣고 나오게 되었다. 문을 나서면 돌에는 ‘은진송찌대종가’와 ‘쌍청당’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찾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은진송씨댁 사람들은 그들의 넉넉함을 베풀어 준다. 이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오면서 그들의 푸근함과 인정스럽게 대해주는 이들의 고운 마음씨를 한 아름 받고 나온 기분 좋은 답사였다.  

 



       


 

답사 마지막 코스인 고흥유씨 정려각 및 정려비가 있는 곳을 도착해 시간을 보니 12시 30분. 점심을 먹고 나서 답사를 계속 하자는 제안을 해왔으나 유적답사에 대한 흥을 깨기 싫어서 끝내고 먹자는 말을 건네고 유적지를 돌아보던 중 정려각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파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덕구청에 근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파손된 경유를 물어보니 술을 먹고 지나던 행인들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려 옴을 느낀다. 아직도 국민들의 문화재 의식수준은 밑바닥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여에서도 2006년 12월 4째 주 유적지를 돌면서 주위에 흩어져 있던 쓰레기를 치우며 느꼈던 것인데 이번 답사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갈는지......

 

            
                           고흥유씨 정려비 앞면                        고흥유씨 정려비 뒷면

 


         

          왼쪽에서 찍은 사진(정려각)                                 오른쪽에서 찍은 사진(정려각)


고흥유씨 정려각 및 정려비는 대전서 대덕구 중리동 산2-1에 위치하며,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등록이 되어 있다. 유씨부인(1371~1452)은 류준의 딸로서 진사 송극기의 부인이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었으며, 네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친정부모가 재가시키려 하자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네 살 난 어린애를 업은 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수백리를 걸어서 회덕의 시가에 내려왔다. 류씨부인은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 쌍청당 송유를 잘 보살펴 키웠으므로 효종 4년(1653)에 열녀로서 정려되었고, 현종 4년(1665)에는 정려비가 세워졌다.


13시 20분 중리동 답사를 마치면서 앞으로 한 달에 두 번씩 격주 토요일에 계속될 답사가 기다려짐을 알게 되었다. 맨 처음 유적답사에 대한 부담감은 어느 정도 없어진 듯하지만, 아직 나에게 남은 부담감은 여적 나의 마음구석 한 구석에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대덕구에 유치한 유적들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 나로 하여금 잘못 알려지게 되면 어떡하나 다시 한 번 때 아닌 걱정을 해본다. 유적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서 마지막까지 그리고 책이 발간될 때까지 같이 답사를 계속하기로 약속을 했다. 친구와 함께 한 유적 조사였기에 더욱 기뻤다.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유적을 알리기 위한 이 두 친구에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 이토록 아름다운 고장임을 느낀 하루였다.


2007년 2월 4일 오후 20시 07분에 답사여정을 기록하다.


꽁지 

오늘 나의 발이 되어준 자전거에게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은진송씨 댁을 방문했을 때 적극 촬영을 도와주시고 설명을 해주신 은씨 송진대가를 이끌고 계신 송○○분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답사하는 내내 바람이 우리를 못살게 군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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