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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김영하 산문 삼부작. 이번 시리즈는, 아주 오랜만에 다음 책을 손꼽아 기다리게 했다. 그러니까 열 다섯 살 즈음일까. 만화책을 그만 봐야겠네, 결심한 무렵 이후 책이란 형태로 나오는 것을 기다려 본 적은 별로 없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서점에서 산 책에는 '다음'이 없었으니까. '다음'이란 순간을 '약속'해주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런 약속이 있더라도 기다리고 싶은 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 책은 모처럼 기다려졌다. 김영하니까. 다소 소름이 돋지만 김영하니까, 읽고 싶었다. 띠지의 얼굴은 10년 전 프로필 사진과 조금 달라져, 주름이 보이고 늙으셨군요, 생각하게 하지만. 상관없다. 세월이 흐르고 얼굴이 조금씩 변하더라도, 날 기다리게 하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건 분명하구나, 여전히. 그 '여전히'를 지켜주었다는 것이 일단 감사하다.
<보다>는 이북으로 읽고, <말하다>부터는 책을 샀다. 책장에 안 보는 책들이 쌓여 있어서 더 이상 아무 책도 사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보다>를 읽고, 마음 속 태그가 #이건 책으로 사야해,로 바뀌었다. 앞의 두 책은 대체로 잊어버렸지만, 결국 '소설'에 대한 말들이었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당연히 '소설'이겠지만, 소설가 이전에 생활인으로서-그런데 김영하에게 소설가와 분리된 생활인이 가능한가-도 소설은 상당히 중요하다. <읽다>는 그 정점.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나온건가 싶기도 하고. 마치 보르헤스의 <칠일밤>처럼 여섯 날로 나누어진 '읽음의 세계'. 쿤데라처럼 자신이 읽어온 계보, 소설 보편적 계보를 섞어 '길잡이' 역할을 하는 교과서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소설은 그렇지 않지만, 산문은 상당히 친절하다. 정말로 당신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느껴지면서, 내가 진짜 이런 거 잘 안 하는데 이렇게 알려줄게, 이건 이거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일단 발을 들여놓도록 해요, 나도 여기까지 밖에 해줄 수가 없지만,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읽다>를 읽다보면 작가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이야기의 혼돈 속에 있는 것 같다. 왜 소설을 읽는가. 여섯 날의 챕터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생각들, 그건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돈키호테, 보바리 부인, 죄와 벌, 소송, 이방인, 셜록 홈즈, 롤리타, 파리 대왕 등을 통해서 작가는 왜 이야기들 속으로 파고 드는지, 독자는 그것을 찾아 읽고 복잡한 마음을 끌어 안은 채 책의 우주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것에 대한 지난한 계보. '첫번째 강연에서 저는 해럴드 블룸의 말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어렵사리 지켜오던 자아의 일부가 분열됩니다. 그리고 재구축됩니다. 소설이라는 자연을 탐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마냥 재미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닐겁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138쪽.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을 읽으면 자아의 일부가 분열된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잠시 혼란 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죄와 벌>을 꾸역꾸역 읽어 치우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책장을 덮고, '이게 뭔가...' 전혀 개운하지 않았던 독서경험은 재구축의 시간이었을까. 그로 인해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바뀌고 있었을까.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고유한 헤멤,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104쪽. 나는 이 고유한 내면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읽었다. 어떤 날은 소설만이 치유인 것처럼 느껴져, 세상에 있을 법한 일들을 읽는 것이 가장 나약한 날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그것은 독서로 이루어진 내면의 '겹'들이, 힘든 날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빠르게 읽으려 하지 않았는데, 읽다보니 가속도가 붙어서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책을 모두 읽고 말았다. 차마 밑줄 긋지 못한 문장들도 있었다. 가령 176쪽.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리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가해자'의 입장에 둘 줄 모르는 인간이므로 나는,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면서 주저했다. 정말로 어떤 문장들은 무서워서 밑줄 긋지 못했다. 그동안 내 입을 떠나 떠돌던 말들을, '가해가 됐을지 모를 말들을' 주워담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뒷골을 때린 건 185쪽. '한때 누구나 고전이라고 생각했던 작품들, 예를 들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든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같은 작품이 최근에는 누락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 고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고전 목록이 변동되고 있다. 김영하가 지적한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열두 살에 동네 책방에서 고심하여 고른, 어린이 시절 나의 자부심이었던 <달과 6펜스>와 <좁은 문>이라니. 무슨 말인지 몰라도 눈으로 활자를 찍어가듯 읽었는데. 내가 그 뒤로 만화책으로 눈을 돌린 건, 다 예견되어 있던 거라고 위로하기로 했다. 그게 20세기 이후 시대상에는 맞지 않는 뭔가 있던 거라고.
'내가 읽은 것들이 작가로서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결정했다.'214쪽. 작가의 말. 문득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준. 그건 단순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거나, 미래에 내가 좋아할 책을 읽었거나.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이들을 나는 언제나 기다렸다/린다. 놓치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책을 읽는 까닭은, 그런 사람들을 자꾸 만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도 그런 심정으로 기다렸다. 이번 산문집 정말 즐거웠다. 2015년, 덕분에 한 발 나아갔다.
1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