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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까지 21일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 키이라 나이틀리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3년 11월
평점 :
일시품절
세상의 끝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끝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억눌러 온 욕망이 '끝'이라는 상황에서 비상식적으로 용인된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 도지(스티브 카렐)의 주변인물들이 그렇다. 맛이 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점차 더 맛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지의 아내는 도망가고, 친구의 아내가 그에게 키스하고(어떤 감정선도 없이), 도시에는 폭동이 일어나 밤 중에 유리창이 깨진다. 그 와중에 도지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치 종말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의 상식적 삶을 이어가지만, 이 영화의 끝에 다다르면 도지라는 인물이야말로 종말을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란 결론에 이른다(그리고 그는 '세상의 끝'에 이르러 '진정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반면 도지 주변 인물들이 비상식적 행위에 빠져드는 까닭은 종말을 부정하거나 그러한 사실을 자신의 내면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주인공 도지(스티브 카렐)의 매력은 그 비교에서 기인한다. 그가 종말을 21일(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앞두고 만난 페니(키이라 나이틀리)는 도지와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보인다. 가볍고 자유롭고 감정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헤어진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여 같이 잠을 청하는 것조차 역겨워한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진 남자는 그녀의 집에서 버티고, 그녀는 집에서 나와 가족들 품으로 가지 못한 스스로를 한탄하며 울다가 도지를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도 그렇지만, 그녀의 횡설수설하는 매력 속에 초지일관 진정성을 외치는 기류가 있다는 것이 그나마 이 페니 캐릭터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준다(사실 더 탄탄한 플롯이었다면 폭발적이었을 캐릭터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느슨한 구조이기 때문에 페니의 매력은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는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잘 살렸다고 말할 수 밖에).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옛사랑을 찾기 위해, 한 사람은 가족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결국 이 영화는 재난영화이면서 로드무비가 되고, 멜로로 끝이 난다. 소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 멸망이라는 과격한 설정에 대한 반전을 기대하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건 다행이다. 애초에 영화는 이렇게 봐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혹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을 찾는가. 그리고 영화의 끝자락에서 발견하는 지점은 다소 진부하지만 새겨둘만하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페니의 질문에, 도지가 말한다.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그리고 끊임없이 페니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누군가를 한없이 수용하는 귀, 그것은 멋진 결말이라고 할 만 하다(영화의 지지부진한 흐름을 떠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