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에 Organisation politique에서 내부(?)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12구에 위치한 어느 병원의 한 공간에서 개최되었고, 대부분 OP에 소속(?)된 것으로 생각되는
5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라자뤼스가 국민 투표 결과에 대해 30분 넘게 설명을 했고,
루이즈-쥬디스 발조가 지난 달에 OP가 조직했던 시위, 그리고 이번 달에 또 조직할 시위와
관련된 쟁점들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바디우는 OP의 전술과 관련하여, OP에서 매달 한 번씩
간행하는 정치 저널,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Rouge-Gorge 콘퍼런스, 내부 토론회, 시위라는 네 가지의 진행 사항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2시간에 걸쳐 이어진 토론이 있었습니다.
일단, 저는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고, OP의 활동이 불법 체류자 및 이주 노동자 문제, 그리고 학교 문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정치 저널 4호(5월)와 5호(6월)을 구입했고, 장담은 못하지만, 시간이 되는대로, 하나씩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번 유럽 헌법 문제와 관련된 라자뤼스의 글을 옮겨봅니다.
특히, 박영기님에게 선물이 되기를.



실뱅 라자뤼스, « 국민 투표와 국민국가 문제 »

원문 : Le Journal politique, n° 5, juin 2005, p. 2-4, 편집자의 글



선거 운동과 국민 투표 결과, 총리의 교체 그리고 새로운 정세 : 이것들을 살펴보자.

1. 당들의 분열

[유럽 헌법안에 대한] 찬성의 편에는, UMP[대중 운동 연합]외에도, PS[사회당]의 일부, UDF[프랑스 민주 동맹], 생태론자들 중 여러 분파들이 있었다. 반대의 편에는, FN[국민 전선], 빌리에의 당[프랑스 운동], PS의 다른 분파, PCF[프랑스 공산단], LCR[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Attac[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추진협회]이 있었다. 2002년, 제 2차 대통령 선거의 슬로건이었던, « 모두 르 펜에 반대하라 (tous contre Le Pen)»는 시라크를 찍을 것을 호소한 당들의 목록이 지닌 완전히 잡탕같은 특성을 은폐했었다. 그것은 르 펜에 반대하여 연합된 일종의 전선이자, 국민적 폭발이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공산당과 사회당이 그네들의 라이벌인 시라크를 권좌에 올리는 것을 목도했다.
이미 당이라는 장치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파산했었다. 이 현상이 2005년 국민 투표라는 틀 속에서 배가된 것이다.
국민 투표가 당이라는 체제와는 이질적이며, 그것에로 환원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 국민 투표의 어떤 점이, 당이라는 것에 근본적으로 부적합하고 그것을 여럿으로 분할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 주요한 정치적 쟁점을 두고 당들이 분할되고, 분열되는 현상은 드문 것이다. 예를 들어, 2002년, 2차 선거에 시라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관련해서 당들 내부에서의 분할 현상은 없었다.
가설 하나를 제출해보자. 국민 투표를 통해 사람들은 국민-국가의 현재적 내용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자 했다.

2. 의회에 반하는 국민 투표

비준의 권한이 의회에 있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유럽 헌법에 대한 논쟁과 대결이 국민 투표로 인해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명백히, 의회 – 당의 논리와 그것의 규율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 는 유럽 헌법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회는 정치적 논쟁을 차단하는 완전히 반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적어도 유럽 헌법과 관련해서, 국민 투표가 우리에게 알려준 정치적 의견들이나 신념들로부터는 정말로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누가 의원이나 의회의 ‘대표적’ 성격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 그네들은 시라크 자신만큼이나 그다지 대표적이지 않다. 교훈은 분명하다. 당의 논리와 그것의 권력 전략에 의해 지배되는 의회는 프랑스에서의 반동을 조직하는 상류층이라는 것. 쥐페, 죠스팽, 라파랭, 그 누구든 간에, 그들과 함께 한 시라크의 대통령 재임 시작부터 [의회에서] 통과된 법들을 보기만 하면 된다. 다수파는 바뀌었지만, 반동적인 법은 계속 이어졌고, 각각의 법은 경찰 정신과 사람들의 권리 축소를 더 멀리 밀어붙이고 있다. 게다가 법은 행정부의 고유한 공간이 되었다. 마치 통치하는 것이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라는 듯. 마치 법이 정부와 정치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듯. 대부분의 경우, 시라크의 법은 아무 것도 혁신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혁이나, 현대화와 관련된 어떤 발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이전의 자유나 권리들, 사회 보장들을 축소시킬 뿐이다. 각각의 새로운 법은 이러한 정신에서 이전의 것에 대해 ‘조금’을 덧붙인다. 권리는 조금 더 덜, 경찰은 조금 더 많이, 억압은 조금 더 많이, 사회 정의는 조금 더 작게.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에 반하는 슈베느망, 그리고 그것을 잇는 사르코지의 법들을 그 예로 제시할 수 있다. 학교에서의 두건 착용 금지 법, 젊은이들 뿐 아니라 그들의 변호사들에 반하는 페르벤 법, 고등학생들에 반하는 피용 법, 등등.
반동의 상류층으로서의 의회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공간[의회]에서, 파비우스, 엠마누엘리, 멜렁숑, 뷔페는 결코 독립적이거나 진보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

3. 사회당

[유럽 헌법안에] 찬성하는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음을 발표할 때, 홀랑드는 지독한 반동분자일 뿐 아니라, 무능한 전략가의 모양새를 띠었다. 시라크는, 2002년 대통령 선거 제 2차 투표의 논리 – « 모두 르 펜에 반대하라 »로 요약될 수 있는 논리 – 를 반복하기라는 덫을 사회당에 쳤다. 달리 말하자면, 시라크의 가설은 이랬다. 국민 전선(FN)은 확실히 유럽 헌법에 반대할 것이고, 사회당(PS)은 대통령 선거 2차 투표 때와 마찬가지로 [FN에 반대되게] 찬성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할 것이니, 그것은 [결국, 찬성을 주장하던] 시라크에게 대량으로 표를 찍을 것을 호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시라크는 유럽 헌법에 대한 사회당측의 찬성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홀란드의 찬성과 시라크 자신의 찬성을 정렬시킴으로써,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후보자를 극히 어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파비우스와 여타의 사람들은, 반대를 주장하면서, 2002년의 도식과 단절했으며, 좌파가 유럽 헌법에도 반대하고, 시라크의 찬성에도 반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것이 핵심이며, [유럽 헌법안에] 반대하는 편에 르 펜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네들의 결정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2002년에도 시라크가 다시 써먹었던, 미테랑의 유효하고 거대했던 정치 조립 방식 – 국민 전선을 정치 공간을 분할하는 주요 원리로 만드는 것 – 은, 이번 국민 투표와 더불어 그 종말을 고했다.

4. 국민 문제에 대해

국민 문제는 국가 관념과 맞물린다. 국민-국가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적 관념은 국가 관념에 내적이다. 국민 문제는 비단 전쟁과 평화에 대한 관계, 국경이나 영토의 완전성, 나라의 독립을 방어하고자하는 의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 문제란, 프랑스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 그래서는 안 되는 바, 그래서는 안 될 바에 대한 어떤 관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 국가, 국민적 단일성의 생성(변화)에 대한 다양한 다른 가능성들을 누가 제안하는 가에 대해 성찰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국민 문제는 내부 정치와 외부 정치 사이의 차이보다도 먼저 개입되는 관념인데, 왜냐하면, 명백히 국민 문제가 위 두 가지 모두를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국민 문제가 국민 국가와 관련하여, 힘의 논리, 부의 논리, 인민, 사람들 – 우리가 이곳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표현은 정치 조직(Organisation politique)의 불법 체류자 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이론적 모토, 즉 « 이곳에 있는 사람은 이곳 출신이다 (Qui est ici, est d’ici)»에서 나온 것이다] – 이라는 관념을 기초하는 실질적인 토대가 되는 몇몇 가치들에 대해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극심한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 국가들이 유지될까 ? 유럽의 실패는 유고슬라비아의 처참하고, 극적인 결말 그리고 그 사태를 관리하고 조절해달라고 미국을 호출[미국에 호소]한 것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자본과 시장의 국제화에 직면한, 미국의 통제 하에 있는 유럽에 직면한, 국민-국가의 새로운 형상이란 무엇일까 ?

« 행복이란 유럽에서의 새로운 관념이다 »라고 1792년 생-쥐스트는 말한 바 있다. 유럽에서의 국민 국가에 대한 새로운 관념, 새로운 관념들이란 무엇일까 ?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구할 것이다.

국민 문제, 프랑스에서의 오늘날 민족 국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할당할 수 있다.
- 외국인, 특히 외국인 노동자 문제. 슈베느망 사르코지 법의 폐지, 그리고 노동의 토대에 대한 합법화.
- 학교 및 교육 문제
학교에서의 두건 착용 금지 법 폐지. 피용 법 폐지. ‘식민지화의 긍정적 측면들’을 학교 교육에서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법 폐지.
-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들, 외세의 개입 없이 그네들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그 인민들을 존중하기. 이라크, 체첸, 코트 디부아르.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원칙 있는, 명확한 입장이 필요하다.

(양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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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5월 18일 강의,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유럽 헌법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논평을 해보겠다.

네 가지 사항을 언급하는 형태로...

1)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 그리고 내가 자본-의회주의(즉, 자본의 경제적 지배와 대표 형태의 정치 체제의 결합)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는 체제 속에서, 정치 정당들의 기능은 어떤 선택이라는 형상 속에서 강제들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거시-결정들은 이미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백에는 좁은 공간 – 그것을 이용하여, 선택이라는 외양을 한 채, 전반적인 필연성들이 주체화된다 – 이 남아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필연과 선택을 병렬하는 이 체계 안에서, 선택은 확실히 환영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본-의회주의에서는 선택이라는 환영도 그것이 순전히 부재하는 것보다는 낫다. 외양상의 선택이 강제 하에서 와해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며, 이러한 실망의 순간은 당들이 책임을 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유럽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의 경우에, 이 장치가 기능장애를 겪고 있음을 확인한다. 더욱이 식별하기 어려운 뭔가가 당의 통제 바깥에 있다. 명백한 징후 : ‘좌파의 반대’의 대대적인 현존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주요 정당은 찬성을 표명했다. 그로부터 점점 더 분명하게 제기되는 질문 : 왜 국민 투표를 해야하는가 ? 다른 나라들처럼, 의원들이 대대적으로 찬성했던 헌법 텍스트를 의회에서 가결시키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을. 하지만 현 상황에서, 명백한 불일치가 사람들과 그네들의 의회 대표간에 나타났다. 국민 투표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회당을 분열시키려고 했던(이것은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시라크 때문이었다. 시라크의 눈에는, 사회당의 기능장애가 체제의 기능장애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미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켰던 불을 꺼야만 하는 것일까 ? 장래가 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사회에서의 토론들, 때로는 격하기까지 한 토론들이 있으며, 까페나 가족들은 토론으로 시끌벅쩍하고, 투표 때에, 즉 국가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틀 바깥의 주체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들은 무엇일까 ? 아마도 무가치한 것이거나, 아마도 결과가 없을 것이다. 누구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의상 그 결과들은 틀 바깥이기 때문에…).

2) '찬성'표와 '반대'표 사이의 분할 속에서, 권위의 논증 - '찬성'은 깨인 자들(저널리스트를 포함하여, 전 쟝르의 전문가들)의 선택이고, '반대'는 무지한 자들의 선택이다 - 이 출현했는 바, 이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즉, 푸코가 감지했던 지식과 권력 사이의 상관관계인 것이다. 국민 투표의 선택에 대해 시라크가 행한 비판도 이 논증과 일치한다. 유럽같은 중요한 사안을 무지한 대중의 결정에 내맡기는 것은 좋지 못하다. 우리는 주민의 무지한 분파를 자본-의회주의 체제의 바깥에 둘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은 대략 주민의 오로지 반만이 투표에 참여하는 미국에서도 이미 명백하게 유포된 테마다). 진정한 시민이기 위해서는 특수한 자격이 필요하다(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은 물론 주체성을 동등히 통제하는 것이 실패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납세액에 따른 제한 선거 교리로의 음험한 회귀... 진리는 바로, 만일 자본-의회주의 장치와 단절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는 항상 과거에 지배 장치들과 단절할 때에도 참이었다), 우리가 어김없이 이런 저런 야만의 계기를 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파의 편에서나, 좌파의 편에서나 이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공화국 전통' - 그것과 단절하는 입장은 야만으로 간주된다 - 이라는 일련의 술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반대'는 '야만적' 선택으로 나타난다.

3) 유럽 헌법 텍스트 자체에, 반-야만적 조항들이 들어있다. 나는 '이주민들의 흐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유럽의 상태는 보호되어야 한다 (미셸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참조). 그 텍스트에서는, 야만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확정하는 문제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유럽의 관념은 여기에서 배제로서만 가치가 있다.

4) 그러나 '위대한 새로운 관념'으로서의 유럽 ? 혹은 '비판적' 유럽의 언표들 속에서 유럽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나, 나는 유럽에 찬성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럽, 관념으로서의 유럽은 이미 죽었다. 유럽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시체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과 같다. 내 경우, 나는 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을 독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방식 뿐이다. a) 유럽을 제국주의 간의 경쟁 (유럽 대 미국)의 틀에서 파악하는 것. b) 유럽을 이질적인 하나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유럽을 미국에 대해서도 이질적이며,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량에 대한 이 질문, 특히 군사적 역량에 대한 질문은 독특성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시험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엔 어떠한가? 나는 당대의 유고슬라비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유럽 열강들[역량들](영국, 프랑스, 독일)이 보여준 무능력에 대해 말해야 겠다. 이러한 무능력의 결과들(우리[유럽]의 문에 위치한 나라에 미국의 비행기들이 폭격을 해댄 것)은 나에겐 일종의 판결, 즉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들에 대한 이 동일한 열강들의 태도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만일 '반대'가 승리한다면, 유럽과 비교해 한 발자국 후퇴할 가능성의 위협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일보 후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당면 문제는 사실상 국민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넘어서기'가 국민 국가의 범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주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우리는 [이번 학기 강의의 주제인] 적의 형상을 식별해야할 필요성이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새로운 유형의 역량, 미국 헤게모니에 반대될 뿐 아니라, 미국의 역량에 대해 대칭적이지도 않은 그러한 역량에 대한 질문, 이 결정적인 질문은 오늘날 널리 열려진 질문이다. 이 질문은 적어도 '사회적 유럽' (게다가, 물론, 나는 이에 대해 호의적이다) 만큼이나 중요하다. 유럽의 문제를 토대에서부터 다시 취해야 한다. 내가 공개적으로 발표했으므로,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이것이 프랑스-독일의 새로운 동맹(이는 영국인들을 그 동맹의 바깥에 둔 이후에 이뤄져야 하며,영국인들이 성찰할 수 있도록 시간이 필요하다)을 거쳐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 이것이 [유럽 헌법안에 대한] 선거 논쟁과 관련된 나의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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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 인터뷰,
« 찬성, 이 지긋지긋한 국민-국가를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 »
대담자 : 비또리오 필리피스와 크리스티앙 로손
2005년 5월 13일 <리베라시옹>지에 실림.

원문 : http://multitudes.samizdat.net/article.php3?id_article=2004


어떻게 당신같은 급진적인 반체제 인사가 [유럽 헌법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질 것을 호소할 수 있나요 ?

네그리 : 왜냐하면, 유럽 헌법은 세계화된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인 제국에 맞서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경제적 (자본주의적, 보수적, 반동적) 일방주의라는 단일한 사유에 맞서는 방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럽은 또한 미국의 일방주의, 그것의 제국적 지배, 석유를 지배하기 위해 행해진 이라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에 맞서는 대항-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그것을 잘 이해했고, 50년대 이후, 유럽의 구성에 맞서 미친듯이 싸워왔죠. 그네들은 유럽의 구성이 그네들의 권력을 확장하는 데 있어 일종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중국의 출현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지역적 동맹에도 반대하고 있죠.

[유럽 헌법안에 대해] 반대를 표시하는 친유럽주의자들도 정확히 유럽 헌법이 미국 모델에 대한 대안적 모델의 책임을 맡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데요.

네그리 :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네들은 약속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이행일 뿐인 유럽 헌법을 신비화하고 있습니다. 유럽 헌법은 선으로부터 만들어지고, 곧 선으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진짜 문제는 누가 세계 시장을 조절할 것인가 ?입니다. 국민국가적 저항은 더 이상 어떤 성벽이 될 수 없죠. 유럽의 구성을 좇음으로써만이, 제가 다중들(les multitudes), 제국에 저항하는 운동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위한 전지구적 대안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공간을 규정하려는 변화들이며, 그 안에서 이 지긋지긋한 국민-국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유럽 헌법은 비록 그것이 그리 연방주의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여하튼] 보다 많은 연방주의(fédéralisme)로 향하는 새로운 한 걸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장을 격렬히 비판하는 사람이 자유주의를 성역화하는 텍스트[이번 유럽 헌법안]를 지지할 수 있습니까 ?

네그리 :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 유럽 헌법의 정신은 자유주의적 원천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쩌자구요 ? 그렇습니다. 유럽 헌법은 단점과 결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권리 헌장을 통한 새로운 권리들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실용주의적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좌파가 된다는 것이 뭡니까 ? [유럽 헌법안에]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안을 갖고 있습니까 ? 노조나 시민 사회가 떠맡았던 것 중에, 지난 한 세대 이후 실질적인 전진에 다다른 단 한 개의 사회적 재조직화 기획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뭘 원하는 것입니까 ? 유럽 헌법 아니면 공산주의적 모델의 헌법 ?

여타의 前-혁명가들처럼, 당신도 ‘현실주의적-자유주의자’가 된 건가요 ?

네그리 : 느닷없이 제가 이런 식으로 늙어빠진 자유주의 머저리가 되는 것은 아니죠. 저는 현실주의적 혁명가입니다. 왜 프랑스는 이리도 고집불통이 되었을까요 ?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심지어 대안세계화론자 집단에서도, 제 메세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그네들은 제 메세지를 듣습니다]. 그들은 [유럽 헌법안에 대한] 찬성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논쟁은 뒤집혀있습니다. 저는 모호함[어리석음]을 지나쳐 가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모호함 속에 있습니다. 저는 분명합니다. 유럽 헌법에서 출발해서 평등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어리석어야 합니다. 만일 프랑스가 반대라고 말하고, 그래서 프랑스가 독일과 함께 유럽의 모터가 된다면, 프랑스는 역사적인 [위험한] 고비를 지날 것입니다.

당신은 ‘찬성이냐 혼란이냐’라는 도박을 거는 것입니까 ?

네그리 : 찬성이냐 최악의 정치냐입니다. 찬성이냐 제국의 헤게모니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투쟁 공간의 소멸이냐입니다. 찬성이냐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 앞에서 포기하느냐 입니다. [유럽 헌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국에 맞서는 자, 대안세계화론자일 수 없습니다. [어디 한 번] 이 세력 관계를 의식하지 말아보세요 ! 반대는 이러한 균형을 파괴하고, 전부를 파괴할 것이며, 그것의 위험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든, 위기가 올 것입니다. 만일 유럽 헌법이 거부된다면, 위기는 유럽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가족적 상처들의 회귀를 경험할 것입니다. 만일 찬성이 이긴다면, 역시 불가피하게 위기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위기는 국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럽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라는 두 모델이 대립하게 되는 위기일 것입니다. (양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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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좌파의 반대라는 환상"
<누벨 옵세르바퇴르>지, 5월 5일자

불어 : http://www.nouvelobs.com/articles/p2113/a267899.html

영어 : http://print.signandsight.com/features/163.html



유럽의 통일은 오랫동안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 시민들이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본 만큼, 그들은 그에 대해 더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유럽의 기획에 그것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의석, 직위, 발언권...) 할당과 관련된 갈등에 직면한, 25개국으로 이뤄진 유럽에서, 그러한 수익을 통한 정당화는 더 이상 각자가 거기에서 그 자신의 몫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시민들은 관료적인 방식으로 지도되는 것에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며, 최고의 유럽 옹호국에서조차, 주민들이 유럽을 무턱대고 전부 받아들이는 경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독일 쌍두마차는 잠시 발이 안 맞고 있으며, 이제는 그 걸음의 방향을 결정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용기있게도 헌법안에 대한 비준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독일인 – 독일인들은 그네들의 정치인들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모든 환상을 잃었다[실망했다] - 으로서, 나는 프랑스가 부럽다. 프랑스 공화국은 적어도 여전히 민주주의적인 기준에 대한 의식 - 공화국의 전통을 이뤄왔고, 그 기준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 - 을 가지고 있다. 헌법을 선택하는 행위는 양극화된 의견들과 불일치하는 목소리들의 대결 속에서, 그리고 시민들이 표현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들이 축적됨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문제만 안 된다면, 우리는 라인강을 너머 우리에게 전달되는 프랑스 언론의 각계 각층의 담론들에 만족할 수 있었다.국경 너머 프랑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헌법 역시 프랑스인들의 투표에 의해 실패할 위험에 처해있음을 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이나, 폴란드인들, 체코인들 그리고 여타의 다른 나라 사람들의 투표에 의존한다. 보통 한 인민은 그의 고유한 헌법을 공표하지만, 유럽 헌법은 유럽 시민 전체의 공통 의지가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는 25개국의 인민들의 투표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 사실, 유럽의 공적 공간이나, 국경을 횡단하는 테마들, 그리고 공통된 토론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투표는 각 나라의 공적 공간[공공 영역]의 경계 내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대칭성은 위험한데, 왜냐하면 국내의 문제에 우선권을 부과하는 것, 예를 들어 시라크 대통령과 라파랭 정부에 대한 비판은 유럽 헌법의 비준 혹은 거부가 제기하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하는 시선을 변질시킨다. 적어도 다른 나라의 찬성과 반대들이 각 나라의 공공 영역 속에서도 한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내가 프랑스의 투표 논쟁 속에서 입장을 취하도록 초대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교화시키기를 원하면서도, 유럽 헌법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좌파는 나쁜 시기에 나쁜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유럽 통일이 취해온 길을 비판할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자끄 드로(Jacques Delors)와 그의 정치 비전은 실패했다. 반면 공통의 시장을 만들고, 부분적으로나마 화폐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수평적인 통합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이해 관계의 역학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정치적 연합의 전망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동학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시장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향을 강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국경의 폐지가 사회적으로 원치 않는 결과들을 초래할 것이며, 그것은 국민-국가의 보호주의적 힘으로 회귀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는 우파의, 외국인 혐오증적인 생각은 규범적인 이유에서 볼 때 의심스러운 관념일 뿐 아니라 더욱이 완전히 비현실주의적인 것이다. 이름값하는 좌파라면, 이런 종류의 퇴보적인 반응에 오염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국가의 조절 능력은 경제적인 세계화의 양가적인 결과들을 완충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오늘날 '사회적 유럽 모델'이라고 우리가 추앙하는 것은, 유럽의 틀에서조차 그것의 정치가 시장의 높이에까지 이를 수 있는 한에서만 방어될 수 있다. 유럽의 수준에서만, 국가의 수준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정치적 조절 능력의 전부 혹은 부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U의 구성국들은 오늘날 안보 정책(사법, 형법, 이주)에 속하는 분야들에서 그네들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 정치에 적극적이고 통찰력있는 좌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경제, 조세 정책 영역에서도 더 큰 조정을 해야함을 주장해왔다.

이와 관련해서, 유럽 헌법은 적어도 그러한 조건을 창출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동쪽으로 더 확장된 이후에도 유럽 연합의 행동 능력은 유지될 것이다. 헌법안은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5개국의 유럽 안에서, 니스에서 결정된 절차들에 따라 분산된 이해 관계들을 조정하는 일이 남아있다.왜냐하면, 15개국으로 이뤄진 유럽은 적당한 때에 정치적 구성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헌법안을 거부한 이후 그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면, 유럽 연합은 분명 통치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부동성과 우유부단함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그네들의 꿀로 만들 것인데, 그네들의 의도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영역 : 신자유주의들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그네들의 목적을 이미 이뤘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좌파라면 유럽 너머를 내다보아야 한다. 워싱턴의 지배적인 콘센서스에 맞서, 좌파는 유럽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한에서만,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 선거와 자유 시장을 결합하며, 그 시각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부과하려하는 - 홀로 그 일을 해야한다면, 무기를 가지고 할 것이다 - 헤게모니적인 자유주의에 맞서, 유럽은 한 목소리로 대외 정책을 낼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지 부시는 유럽 구성(헌법)의 실패를 두고 기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헌법은 유럽이,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신보수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대립 그리고 미국에 대한 대립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히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이용하는 공통의 대외, 안보 정책을 전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 정부 없이 정치적으로 구성된 세계 사회(공동체)를 위해, UN 및 국제법을 발전시키는 데 우리의 공통된 이해가 있다. 여타의 세계 열강들이 국제법을 위반하는 부시 행정부의 힘의 정치를 모방하기 전에, 우리는 국제 관계를 진정으로 법적인 틀 안에 집어넣는데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이해가능한 주민의 불안들을 포퓰리즘적인 방식으로 이용하지 않고, 유럽을 강화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단절 중인 세계의 도전과 위험들에 대해 공격적인 방식으로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일부 우파의 반동적인 반대와 좌파의 반대가 연립하게 된 것은 좌파의 환상에 기초한 비극적인 노트일 뿐이다. 그러한 비극적 노트는 사실상 프랑스에서의 반대가 필연적으로 다른 EU 성원국들이 유럽 헌법에 대한 협상을 다시 하도록 만드리라는 환상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이것을 기다리는 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여타의 국가들의 관점에서, 프랑스의 반대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 특정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국민은 독일과의 화해에서 폭넓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동시에, 유럽 통합을 추진했던 것도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통합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어왔다. 교차로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프랑스가 지금까지 쫓아온 길로부터 이탈하게 된다면, 어떤 침체 현상이 전 유럽을 덮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이것이 내가 거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결말이다. 프랑스는 사실 영국이 아니다. 만일 헌법에 대한 영국의 국민 투표가 반대로 이르렀다면 – 물론, 나는 그러지 않길 바라는데 – , 적어도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다른 성원국들이 그냥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다. 계속해서 망설이다가, 헌법에 반대를 표시하는 나라에, 우리가 « 지금이 다시 없는 기회다 ! »라고 답하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반대는 유럽을 지속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결정은 유럽의 모든 다른 나라들에게 어떤 신호의 가치를 갖는 것이며, 빈약한 상태에 있는 공적 의견이 각양각색의 국민국가적이고 주권론적인 유럽 혐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방식으로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자들 – 그들에게 유럽의 헌법은 현재의 헌법의 경제주의 속에서 그것의 충만하고 전체적인 표현을 발견한다[영역 : 그들에게 유럽 헌법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경제적 헌법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 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역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좌파의 반대 옹호자들이 하는 것처럼, 프랑스의 반대의 도착적인 연립이 몇몇 유럽찬성론자들 – 그들에게 정치적 통합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 에게서도 발견된다는 핑계로 헌법이 재협상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기괴한 과대평가이다. 거기에 두 번째 환상이 있다. 만일 프랑스가 헌법안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헌법안에 대한 재협상을 야기시킬 것이며, 이는 반대로 헌법안 타협이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승리가 된다라는 환상. 그 결과는 전혀 유럽의 제도들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정부주의를 강화하는 것에로 이를 뿐이다.

여하튼 나는 프랑스의 좌파가 스스로에게 충실한 채로 남으리라는 희망, 좌파는 감정에 굴하기 보다는 논쟁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Christian Bouchindhomme 이 독일어에서 불어로 옮김.

(양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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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럽 연합 헌법 투표를 전후해서 프랑스 및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입장을 표명하고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결국 투표는 부결됐지만, 정말 중요한 정치적, 지적 토론과

활동은 이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 문제를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는데, 마침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한 분이 주요한

지식인들의 대담과 성명서, 신문 기사 등을 번역해주셨네요. 발리바르, 네그리, 바디우, 하버마스, 월러스틴,

라자뤼스 등 정말 쟁쟁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볼 수 있는 좋은 글들입니다. 번역하느라 수고해주신 그 분에게

감사드리면서, 주요 기사와 대담을 퍼왔습니다.

출처는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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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굉장히 잘 쓰여진 글이고, 또 중요한 글이다. 논증이 굉장히 미묘한고로, 이해를 위해 [ ]를 많이 사용했다. 독해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기를...
** 지난번에 올렸던 네그리나 벤사이드의 글들과 같이, 토론회에서 있었던 발언을 정리한 것이 아닌가싶다. 그래서, 제목 역시 이처럼 구어적으로 붙여진 것 같은데, 제목 붙이는 데 늘 취약한 본인으로서는, 마땅히 다른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에띠엔 발리바르, "그래,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Oui mais...non car)"
<리베라시옹>, 2005년 5월25일

원문 : http://www.liberation.fr/imprimer.php?Article=298808


그 점에서 복음서의 가르침("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마태복음 5장 37절])을 따르자면, 국민 투표는 오로지 두 가지 대답만을 허락한다. [국민 투표를 둘러싼] 사전 논쟁들 역시 결국에는 찬성이냐 반대냐로 이르는 데 쓰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소통 수단에 대한 시민들의 불평등한 접근으로 인해 지나치게 [논쟁이] '완곡해지지'만 않는다면, 그 논쟁은 그 자체로 이점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박빙의 승부가 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리라는 것.

이번 선거 운동의 첫 번째 획득물은 처음에 예상했던 한계를 넘어서는 논쟁의 발전이다. 이것은 '정치를 한다(faire de la politique)'는 것에 필수적이다. 우리가 '헌법'이라 세례명을 부여한 텍스트와 관련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는 했어야 한다. [유럽 헌법 같은] 그런 텍스트는 단순히 '등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제헌 권력의 무대에 오르는 한에서만 그것은 정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텍스트의 준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배타적으로 테크노크라트적인 특성을 띠었으며, 정부간의 최종적인 흥정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의 논쟁 - 토대의 문제, 특히 구성중인 유럽이 '자유주의적'으로 가야하느냐 '사회(주의)적'으로 가야하느냐와 관련된 문제를 표면에 드러내고 있는 - 은 그 텍스트에 민주주의적인 시정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잠시 자제해야 한다. 교환되고 있는 많은 논증들(그리고 그 밑에 깔려獵?동기들은 더욱더)은 순전히 '프랑스적(franco-français)'이다. 유럽 시민권과 현 세계에서 유럽의 자리라는 주요한 문제는 그 문제가 방향을 틀었을 때(예를 들어 터키에 대한 가능한 [EU 가입] 승인을 '헌법'에 반대하는 반박-논증으로서 사용할 때) 기껏해야 살짝 건드려질 뿐이었다.

내 관점에서, [EU 헌법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유는 엄격한 제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조건들은 그 [긍정적] 이유를 거의 취소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EU 헌법이, 20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럽의 내전'이라고 불릴 수 있던 것에 의해 둘로 나뉘었던 유럽의 재통일을 비준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 재통일은 그것을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엄청난 잔해들을 남긴다. 재통일은 자연적으로 공통된 이해 관계라는 환상 하에서 지금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적대들을 은폐한다. 그 환상은 과거에 다른 초국가적 집합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새로운 증오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몰이해의 씨앗을 낳는다. 두 번째 이유는 오늘(미국)과 내일(중국)의 거대한 제국주의들에 대해 '공통의 역량'을 대립시켜야 할 필요성에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유럽의 기획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역량'이라는 관념 속에 암암리에 기록된 수단들은 구 제국주의에 의해서는 너무 많이 지배를 받으면서도, 더 평등적이고, 덜 갈등적인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한 탐구에 의해서는 불충분하게 지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이전에 [유럽]연합을 지배했던 기능상의 절차들과 관련해서, [현재의] 헌법안은 상대적으로 더 민주화될 뿐 아니라, '기본권(droits fondamentaux)' 헌장이라는 형태로 [그에 대한] 명시적인 보장을 도입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획득물들이 [찬성에 표를 던져야할 정도로] 결정적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재의 상황이 요청하는 것에 비해 제한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정 절차의 민주화는, 그것의 무력함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도 않은 채, 유럽 위원회와 유럽 회의에 권력이 극도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아주 약간 수정할 뿐이다. 기본권 헌장에 기록된 일반 원칙은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강제력이 없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20세기 해방 운동의 어떤 전진을 등록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사회적 권리의 후퇴를 승인하며, 소통 수단의 집중 및 정보화, 혹은 안보 정책들의 발전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유의 장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프랑스에서부터 말을 하자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찬성에 표를 던져야 하는] 본질적으로 소극적인 이유가 남아있다. 혹시라도 있을 반대의 승리는, 어떤 대안적 기획도 갖고 있지 못한,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잡다한 연립, 그리고 그것이 '국가 우선(préférence nationale)' 옹호로 귀착될 강력한 주된 위험, 혹은 유럽 헌법(구성) 자체에 대한 거부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신파시스트 후보자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2위에 올랐던 나라에 있으며, 좌파든 우파든 정부가 끊임없이 (예를 들어 이민 규제를 통해) 포퓰리즘을 부추겼던 나라에 있음을 잊지 말자. 하지만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반대의 승리가 대륙의 수준에서 유럽 건설을 보다 진보적이고 보다 민주주인 토대 위에서 재개시키는 '도약'을 야기할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적어도 반대가 국가주의적인 반동의 증식을 조장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제 나는 반대에 투표하도록 만드는 이유들로 되돌아오겠다. [반대편에서] 가장 자주 내세우는 주장은 '자유주의적 유럽'이라는 슬로건에 요약되며, [헌법안의] 3부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규칙들을 '헌법화'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런 형태 하에서라면, [반대편의] 논증은, 비록 그것이 어떤 논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 텍스트는 또한 그와는 반대 방향의 지시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 결과가 실제로는 [텍스트에] 정식화된 것보다는 세력 관계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관계에 의존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 그러나 이것이 나를 가장 결정적인 측면으로 인도한다. 결정적인 것은 말해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전제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말해질 필요가 없[다고 간주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유럽 중앙 은행의 지위 및 목적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사실상 금융 권력을 주권이나 예외의 상황에, 즉 법률이나 대다수 시민들의 결정 위에 위치시키며, 동시에 견고한 통화주의적 도그마에 그것을 굴복시킨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경제, 정치, 문화 영역이 서로 밀접하게 침투되고 있는 시대에, 이것은 모든 사회적 발전, 모든 집단적 혁신, 모든 공격적인 정치 경제를 비좁게 속박하는 데로 이른다.

[내가 헌법안의] 기획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주권'의 문제를 넘어선다. '헌법'이 유럽 전체에 진정으로 부여하고 있지 않은 것, 즉 헌법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민권을 창조해내지 않고 있다는 문제. 우리는 헌법의 기안자들이 이 문제를 가장 조심스레 피하고자 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유럽 연합 시민권(citoyenneté de l’Union)'의 정의는 이런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정의는 기존 국가의 시민권을 유럽 수준으로 연장하는 것, 즉 2차 시민권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며 (그리고 그것은 부대적으로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 즉 '[유럽을] 설립하는 [나라의]' 국적을 갖지 않은 거주자들로부터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영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거기에는 거대한 초국적(supranationale) 관료제의 출현을 상쇄하는 데 적합한 탈집중화된 참여 메커니즘이 부재하다. 이 모든 것은 이전의 소속들을 횡단하고 그것을 상대화시키는 초국적(transnationale) '시민 공동체' - 분명 전혀 다른 수준에서이긴 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가 당대에 행정구역(영토적 경계) 등록을 위해 제네(부족) 소속을 상대화했던 것과 같은[역자 :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행정구역을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네 부족 대신 지리적 단위인 열 개의 데모스로 바꾸었다] - 의 출현을 방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물론 [헌법안 거부에 따른] 유럽 시민권의 좌절이 국가 시민권의 보존에 상응하리라는 것도 전혀 확실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세계화 시대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각 영토의 거주자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는 거대한 불평등의 시대에, 국가를 위한 연대, 정치 토론, 문화의 기능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분명히 '제국들'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집합들에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민 없는 시민 공동체, 마찬가지로 국가 없는 국가 건설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책임 있는 정치적 태도는 법적으로 헌법을 신임하기보다는, 헌법안 거부가 가져올 수 있는 비판적 혹은 심지어 극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 헌법의 환상을 거부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쏠려있는 방향에서, 이것은 위엄과 일관성에 대한 고민의 발로라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시민으로서 협박(만일 우리의 지배 계급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우리가 흐트러뜨린다면 일대 혼란이 우리를 엄습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거부해야 한다는 위엄. 그리고 특히 '사회 계약'을 재정초함에 있어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원칙이 신중하게 취해져야 하며, 제도적인 결과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최소한의 일관성. 내가 그러한 선택에 포함된 위험들(위기의 위험뿐 아니라 도착 및 방향 전환의 위험) 및 그것이 부과하는 책임에 대한 예리한 의식 없이 그것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또한 이해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런 위험들을 참고하는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수용해야하며, 그러한 참조는 그것의 도달점보다는 갈등의 정치 과정의 출발점을 형성하는 행운을 가져올 것이다.

(양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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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6-2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만쉐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는 저를 위한 '선물'이라고 믿슴다. ㅋㅋㅋ
낼롬 가져가겟슴다....(__)

balmas 2005-06-2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마냐님 생각해서 퍼왔답니다. (ㅋㅋㅋ 믿거나말거나 ... )
이렇게 좋아해주시니 보람이 있군요. ^_________^

청년도반 2005-06-26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잠깐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유럽헌법 논쟁과 관련한 중요한 글들이 다수 번역되었네요.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그리고 글 퍼가겠습니다. ^^;

balmas 2005-06-2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재미있게 잘 보라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