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9일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럽 연합 헌법 투표를 전후해서 프랑스 및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입장을 표명하고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결국 투표는 부결됐지만, 정말 중요한 정치적, 지적 토론과

활동은 이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 문제를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는데, 마침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한 분이 주요한

지식인들의 대담과 성명서, 신문 기사 등을 번역해주셨네요. 발리바르, 네그리, 바디우, 하버마스, 월러스틴,

라자뤼스 등 정말 쟁쟁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볼 수 있는 좋은 글들입니다. 번역하느라 수고해주신 그 분에게

감사드리면서, 주요 기사와 대담을 퍼왔습니다.

출처는 사회진보연대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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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굉장히 잘 쓰여진 글이고, 또 중요한 글이다. 논증이 굉장히 미묘한고로, 이해를 위해 [ ]를 많이 사용했다. 독해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기를...
** 지난번에 올렸던 네그리나 벤사이드의 글들과 같이, 토론회에서 있었던 발언을 정리한 것이 아닌가싶다. 그래서, 제목 역시 이처럼 구어적으로 붙여진 것 같은데, 제목 붙이는 데 늘 취약한 본인으로서는, 마땅히 다른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에띠엔 발리바르, "그래,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Oui mais...non car)"
<리베라시옹>, 2005년 5월25일

원문 : http://www.liberation.fr/imprimer.php?Article=298808


그 점에서 복음서의 가르침("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마태복음 5장 37절])을 따르자면, 국민 투표는 오로지 두 가지 대답만을 허락한다. [국민 투표를 둘러싼] 사전 논쟁들 역시 결국에는 찬성이냐 반대냐로 이르는 데 쓰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소통 수단에 대한 시민들의 불평등한 접근으로 인해 지나치게 [논쟁이] '완곡해지지'만 않는다면, 그 논쟁은 그 자체로 이점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박빙의 승부가 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리라는 것.

이번 선거 운동의 첫 번째 획득물은 처음에 예상했던 한계를 넘어서는 논쟁의 발전이다. 이것은 '정치를 한다(faire de la politique)'는 것에 필수적이다. 우리가 '헌법'이라 세례명을 부여한 텍스트와 관련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는 했어야 한다. [유럽 헌법 같은] 그런 텍스트는 단순히 '등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제헌 권력의 무대에 오르는 한에서만 그것은 정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 텍스트의 준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배타적으로 테크노크라트적인 특성을 띠었으며, 정부간의 최종적인 흥정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의 논쟁 - 토대의 문제, 특히 구성중인 유럽이 '자유주의적'으로 가야하느냐 '사회(주의)적'으로 가야하느냐와 관련된 문제를 표면에 드러내고 있는 - 은 그 텍스트에 민주주의적인 시정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잠시 자제해야 한다. 교환되고 있는 많은 논증들(그리고 그 밑에 깔려獵?동기들은 더욱더)은 순전히 '프랑스적(franco-français)'이다. 유럽 시민권과 현 세계에서 유럽의 자리라는 주요한 문제는 그 문제가 방향을 틀었을 때(예를 들어 터키에 대한 가능한 [EU 가입] 승인을 '헌법'에 반대하는 반박-논증으로서 사용할 때) 기껏해야 살짝 건드려질 뿐이었다.

내 관점에서, [EU 헌법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이유는 엄격한 제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조건들은 그 [긍정적] 이유를 거의 취소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EU 헌법이, 20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럽의 내전'이라고 불릴 수 있던 것에 의해 둘로 나뉘었던 유럽의 재통일을 비준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 재통일은 그것을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엄청난 잔해들을 남긴다. 재통일은 자연적으로 공통된 이해 관계라는 환상 하에서 지금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적대들을 은폐한다. 그 환상은 과거에 다른 초국가적 집합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새로운 증오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몰이해의 씨앗을 낳는다. 두 번째 이유는 오늘(미국)과 내일(중국)의 거대한 제국주의들에 대해 '공통의 역량'을 대립시켜야 할 필요성에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유럽의 기획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역량'이라는 관념 속에 암암리에 기록된 수단들은 구 제국주의에 의해서는 너무 많이 지배를 받으면서도, 더 평등적이고, 덜 갈등적인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한 탐구에 의해서는 불충분하게 지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이전에 [유럽]연합을 지배했던 기능상의 절차들과 관련해서, [현재의] 헌법안은 상대적으로 더 민주화될 뿐 아니라, '기본권(droits fondamentaux)' 헌장이라는 형태로 [그에 대한] 명시적인 보장을 도입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획득물들이 [찬성에 표를 던져야할 정도로] 결정적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재의 상황이 요청하는 것에 비해 제한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정 절차의 민주화는, 그것의 무력함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도 않은 채, 유럽 위원회와 유럽 회의에 권력이 극도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아주 약간 수정할 뿐이다. 기본권 헌장에 기록된 일반 원칙은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강제력이 없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20세기 해방 운동의 어떤 전진을 등록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사회적 권리의 후퇴를 승인하며, 소통 수단의 집중 및 정보화, 혹은 안보 정책들의 발전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유의 장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프랑스에서부터 말을 하자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찬성에 표를 던져야 하는] 본질적으로 소극적인 이유가 남아있다. 혹시라도 있을 반대의 승리는, 어떤 대안적 기획도 갖고 있지 못한,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잡다한 연립, 그리고 그것이 '국가 우선(préférence nationale)' 옹호로 귀착될 강력한 주된 위험, 혹은 유럽 헌법(구성) 자체에 대한 거부의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신파시스트 후보자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2위에 올랐던 나라에 있으며, 좌파든 우파든 정부가 끊임없이 (예를 들어 이민 규제를 통해) 포퓰리즘을 부추겼던 나라에 있음을 잊지 말자. 하지만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반대의 승리가 대륙의 수준에서 유럽 건설을 보다 진보적이고 보다 민주주인 토대 위에서 재개시키는 '도약'을 야기할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적어도 반대가 국가주의적인 반동의 증식을 조장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제 나는 반대에 투표하도록 만드는 이유들로 되돌아오겠다. [반대편에서] 가장 자주 내세우는 주장은 '자유주의적 유럽'이라는 슬로건에 요약되며, [헌법안의] 3부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규칙들을 '헌법화'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런 형태 하에서라면, [반대편의] 논증은, 비록 그것이 어떤 논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 텍스트는 또한 그와는 반대 방향의 지시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 결과가 실제로는 [텍스트에] 정식화된 것보다는 세력 관계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관계에 의존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 그러나 이것이 나를 가장 결정적인 측면으로 인도한다. 결정적인 것은 말해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전제에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말해질 필요가 없[다고 간주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유럽 중앙 은행의 지위 및 목적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들은 사실상 금융 권력을 주권이나 예외의 상황에, 즉 법률이나 대다수 시민들의 결정 위에 위치시키며, 동시에 견고한 통화주의적 도그마에 그것을 굴복시킨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경제, 정치, 문화 영역이 서로 밀접하게 침투되고 있는 시대에, 이것은 모든 사회적 발전, 모든 집단적 혁신, 모든 공격적인 정치 경제를 비좁게 속박하는 데로 이른다.

[내가 헌법안의] 기획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주권'의 문제를 넘어선다. '헌법'이 유럽 전체에 진정으로 부여하고 있지 않은 것, 즉 헌법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민권을 창조해내지 않고 있다는 문제. 우리는 헌법의 기안자들이 이 문제를 가장 조심스레 피하고자 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유럽 연합 시민권(citoyenneté de l’Union)'의 정의는 이런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정의는 기존 국가의 시민권을 유럽 수준으로 연장하는 것, 즉 2차 시민권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며 (그리고 그것은 부대적으로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 즉 '[유럽을] 설립하는 [나라의]' 국적을 갖지 않은 거주자들로부터 시민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영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거기에는 거대한 초국적(supranationale) 관료제의 출현을 상쇄하는 데 적합한 탈집중화된 참여 메커니즘이 부재하다. 이 모든 것은 이전의 소속들을 횡단하고 그것을 상대화시키는 초국적(transnationale) '시민 공동체' - 분명 전혀 다른 수준에서이긴 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가 당대에 행정구역(영토적 경계) 등록을 위해 제네(부족) 소속을 상대화했던 것과 같은[역자 :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행정구역을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네 부족 대신 지리적 단위인 열 개의 데모스로 바꾸었다] - 의 출현을 방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물론 [헌법안 거부에 따른] 유럽 시민권의 좌절이 국가 시민권의 보존에 상응하리라는 것도 전혀 확실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세계화 시대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각 영토의 거주자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는 거대한 불평등의 시대에, 국가를 위한 연대, 정치 토론, 문화의 기능을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분명히 '제국들'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집합들에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민 없는 시민 공동체, 마찬가지로 국가 없는 국가 건설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책임 있는 정치적 태도는 법적으로 헌법을 신임하기보다는, 헌법안 거부가 가져올 수 있는 비판적 혹은 심지어 극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 헌법의 환상을 거부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쏠려있는 방향에서, 이것은 위엄과 일관성에 대한 고민의 발로라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시민으로서 협박(만일 우리의 지배 계급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우리가 흐트러뜨린다면 일대 혼란이 우리를 엄습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거부해야 한다는 위엄. 그리고 특히 '사회 계약'을 재정초함에 있어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원칙이 신중하게 취해져야 하며, 제도적인 결과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최소한의 일관성. 내가 그러한 선택에 포함된 위험들(위기의 위험뿐 아니라 도착 및 방향 전환의 위험) 및 그것이 부과하는 책임에 대한 예리한 의식 없이 그것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또한 이해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이런 위험들을 참고하는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수용해야하며, 그러한 참조는 그것의 도달점보다는 갈등의 정치 과정의 출발점을 형성하는 행운을 가져올 것이다.

(양창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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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6-2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만쉐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는 저를 위한 '선물'이라고 믿슴다. ㅋㅋㅋ
낼롬 가져가겟슴다....(__)

balmas 2005-06-2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마냐님 생각해서 퍼왔답니다. (ㅋㅋㅋ 믿거나말거나 ... )
이렇게 좋아해주시니 보람이 있군요. ^_________^

청년도반 2005-06-26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잠깐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유럽헌법 논쟁과 관련한 중요한 글들이 다수 번역되었네요.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그리고 글 퍼가겠습니다. ^^;

balmas 2005-06-2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재미있게 잘 보라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