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좌파의 반대라는 환상"
<누벨 옵세르바퇴르>지, 5월 5일자
불어 : http://www.nouvelobs.com/articles/p2113/a267899.html
영어 : http://print.signandsight.com/features/163.html
유럽의 통일은 오랫동안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 시민들이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본 만큼, 그들은 그에 대해 더 말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유럽의 기획에 그것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의석, 직위, 발언권...) 할당과 관련된 갈등에 직면한, 25개국으로 이뤄진 유럽에서, 그러한 수익을 통한 정당화는 더 이상 각자가 거기에서 그 자신의 몫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시민들은 관료적인 방식으로 지도되는 것에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며, 최고의 유럽 옹호국에서조차, 주민들이 유럽을 무턱대고 전부 받아들이는 경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독일 쌍두마차는 잠시 발이 안 맞고 있으며, 이제는 그 걸음의 방향을 결정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용기있게도 헌법안에 대한 비준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독일인 – 독일인들은 그네들의 정치인들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모든 환상을 잃었다[실망했다] - 으로서, 나는 프랑스가 부럽다. 프랑스 공화국은 적어도 여전히 민주주의적인 기준에 대한 의식 - 공화국의 전통을 이뤄왔고, 그 기준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 - 을 가지고 있다. 헌법을 선택하는 행위는 양극화된 의견들과 불일치하는 목소리들의 대결 속에서, 그리고 시민들이 표현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들이 축적됨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문제만 안 된다면, 우리는 라인강을 너머 우리에게 전달되는 프랑스 언론의 각계 각층의 담론들에 만족할 수 있었다.국경 너머 프랑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우리의 헌법 역시 프랑스인들의 투표에 의해 실패할 위험에 처해있음을 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이나, 폴란드인들, 체코인들 그리고 여타의 다른 나라 사람들의 투표에 의존한다. 보통 한 인민은 그의 고유한 헌법을 공표하지만, 유럽 헌법은 유럽 시민 전체의 공통 의지가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는 25개국의 인민들의 투표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 사실, 유럽의 공적 공간이나, 국경을 횡단하는 테마들, 그리고 공통된 토론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투표는 각 나라의 공적 공간[공공 영역]의 경계 내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대칭성은 위험한데, 왜냐하면 국내의 문제에 우선권을 부과하는 것, 예를 들어 시라크 대통령과 라파랭 정부에 대한 비판은 유럽 헌법의 비준 혹은 거부가 제기하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하는 시선을 변질시킨다. 적어도 다른 나라의 찬성과 반대들이 각 나라의 공공 영역 속에서도 한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내가 프랑스의 투표 논쟁 속에서 입장을 취하도록 초대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교화시키기를 원하면서도, 유럽 헌법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좌파는 나쁜 시기에 나쁜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유럽 통일이 취해온 길을 비판할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자끄 드로(Jacques Delors)와 그의 정치 비전은 실패했다. 반면 공통의 시장을 만들고, 부분적으로나마 화폐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수평적인 통합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이해 관계의 역학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정치적 연합의 전망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동학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시장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향을 강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국경의 폐지가 사회적으로 원치 않는 결과들을 초래할 것이며, 그것은 국민-국가의 보호주의적 힘으로 회귀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는 우파의, 외국인 혐오증적인 생각은 규범적인 이유에서 볼 때 의심스러운 관념일 뿐 아니라 더욱이 완전히 비현실주의적인 것이다. 이름값하는 좌파라면, 이런 종류의 퇴보적인 반응에 오염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국가의 조절 능력은 경제적인 세계화의 양가적인 결과들을 완충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오늘날 '사회적 유럽 모델'이라고 우리가 추앙하는 것은, 유럽의 틀에서조차 그것의 정치가 시장의 높이에까지 이를 수 있는 한에서만 방어될 수 있다. 유럽의 수준에서만, 국가의 수준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정치적 조절 능력의 전부 혹은 부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U의 구성국들은 오늘날 안보 정책(사법, 형법, 이주)에 속하는 분야들에서 그네들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 정치에 적극적이고 통찰력있는 좌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경제, 조세 정책 영역에서도 더 큰 조정을 해야함을 주장해왔다.
이와 관련해서, 유럽 헌법은 적어도 그러한 조건을 창출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동쪽으로 더 확장된 이후에도 유럽 연합의 행동 능력은 유지될 것이다. 헌법안은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5개국의 유럽 안에서, 니스에서 결정된 절차들에 따라 분산된 이해 관계들을 조정하는 일이 남아있다.왜냐하면, 15개국으로 이뤄진 유럽은 적당한 때에 정치적 구성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헌법안을 거부한 이후 그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면, 유럽 연합은 분명 통치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부동성과 우유부단함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그네들의 꿀로 만들 것인데, 그네들의 의도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영역 : 신자유주의들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그네들의 목적을 이미 이뤘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좌파라면 유럽 너머를 내다보아야 한다. 워싱턴의 지배적인 콘센서스에 맞서, 좌파는 유럽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한에서만,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민주주의적인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 선거와 자유 시장을 결합하며, 그 시각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부과하려하는 - 홀로 그 일을 해야한다면, 무기를 가지고 할 것이다 - 헤게모니적인 자유주의에 맞서, 유럽은 한 목소리로 대외 정책을 낼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지 부시는 유럽 구성(헌법)의 실패를 두고 기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헌법은 유럽이,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신보수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대립 그리고 미국에 대한 대립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히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이용하는 공통의 대외, 안보 정책을 전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 정부 없이 정치적으로 구성된 세계 사회(공동체)를 위해, UN 및 국제법을 발전시키는 데 우리의 공통된 이해가 있다. 여타의 세계 열강들이 국제법을 위반하는 부시 행정부의 힘의 정치를 모방하기 전에, 우리는 국제 관계를 진정으로 법적인 틀 안에 집어넣는데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이해가능한 주민의 불안들을 포퓰리즘적인 방식으로 이용하지 않고, 유럽을 강화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단절 중인 세계의 도전과 위험들에 대해 공격적인 방식으로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일부 우파의 반동적인 반대와 좌파의 반대가 연립하게 된 것은 좌파의 환상에 기초한 비극적인 노트일 뿐이다. 그러한 비극적 노트는 사실상 프랑스에서의 반대가 필연적으로 다른 EU 성원국들이 유럽 헌법에 대한 협상을 다시 하도록 만드리라는 환상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이것을 기다리는 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여타의 국가들의 관점에서, 프랑스의 반대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 특정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국민은 독일과의 화해에서 폭넓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동시에, 유럽 통합을 추진했던 것도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통합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어왔다. 교차로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프랑스가 지금까지 쫓아온 길로부터 이탈하게 된다면, 어떤 침체 현상이 전 유럽을 덮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이것이 내가 거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결말이다. 프랑스는 사실 영국이 아니다. 만일 헌법에 대한 영국의 국민 투표가 반대로 이르렀다면 – 물론, 나는 그러지 않길 바라는데 – , 적어도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다른 성원국들이 그냥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다. 계속해서 망설이다가, 헌법에 반대를 표시하는 나라에, 우리가 « 지금이 다시 없는 기회다 ! »라고 답하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반대는 유럽을 지속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결정은 유럽의 모든 다른 나라들에게 어떤 신호의 가치를 갖는 것이며, 빈약한 상태에 있는 공적 의견이 각양각색의 국민국가적이고 주권론적인 유럽 혐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방식으로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자들 – 그들에게 유럽의 헌법은 현재의 헌법의 경제주의 속에서 그것의 충만하고 전체적인 표현을 발견한다[영역 : 그들에게 유럽 헌법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경제적 헌법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 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역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좌파의 반대 옹호자들이 하는 것처럼, 프랑스의 반대의 도착적인 연립이 몇몇 유럽찬성론자들 – 그들에게 정치적 통합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 에게서도 발견된다는 핑계로 헌법이 재협상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기괴한 과대평가이다. 거기에 두 번째 환상이 있다. 만일 프랑스가 헌법안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헌법안에 대한 재협상을 야기시킬 것이며, 이는 반대로 헌법안 타협이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승리가 된다라는 환상. 그 결과는 전혀 유럽의 제도들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정부주의를 강화하는 것에로 이를 뿐이다.
여하튼 나는 프랑스의 좌파가 스스로에게 충실한 채로 남으리라는 희망, 좌파는 감정에 굴하기 보다는 논쟁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Christian Bouchindhomme 이 독일어에서 불어로 옮김.
(양창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