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5월 18일 강의,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유럽 헌법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논평을 해보겠다.

네 가지 사항을 언급하는 형태로...

1)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 그리고 내가 자본-의회주의(즉, 자본의 경제적 지배와 대표 형태의 정치 체제의 결합)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는 체제 속에서, 정치 정당들의 기능은 어떤 선택이라는 형상 속에서 강제들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거시-결정들은 이미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백에는 좁은 공간 – 그것을 이용하여, 선택이라는 외양을 한 채, 전반적인 필연성들이 주체화된다 – 이 남아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필연과 선택을 병렬하는 이 체계 안에서, 선택은 확실히 환영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본-의회주의에서는 선택이라는 환영도 그것이 순전히 부재하는 것보다는 낫다. 외양상의 선택이 강제 하에서 와해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며, 이러한 실망의 순간은 당들이 책임을 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유럽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의 경우에, 이 장치가 기능장애를 겪고 있음을 확인한다. 더욱이 식별하기 어려운 뭔가가 당의 통제 바깥에 있다. 명백한 징후 : ‘좌파의 반대’의 대대적인 현존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주요 정당은 찬성을 표명했다. 그로부터 점점 더 분명하게 제기되는 질문 : 왜 국민 투표를 해야하는가 ? 다른 나라들처럼, 의원들이 대대적으로 찬성했던 헌법 텍스트를 의회에서 가결시키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을. 하지만 현 상황에서, 명백한 불일치가 사람들과 그네들의 의회 대표간에 나타났다. 국민 투표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회당을 분열시키려고 했던(이것은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시라크 때문이었다. 시라크의 눈에는, 사회당의 기능장애가 체제의 기능장애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미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켰던 불을 꺼야만 하는 것일까 ? 장래가 그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사회에서의 토론들, 때로는 격하기까지 한 토론들이 있으며, 까페나 가족들은 토론으로 시끌벅쩍하고, 투표 때에, 즉 국가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틀 바깥의 주체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들은 무엇일까 ? 아마도 무가치한 것이거나, 아마도 결과가 없을 것이다. 누구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의상 그 결과들은 틀 바깥이기 때문에…).

2) '찬성'표와 '반대'표 사이의 분할 속에서, 권위의 논증 - '찬성'은 깨인 자들(저널리스트를 포함하여, 전 쟝르의 전문가들)의 선택이고, '반대'는 무지한 자들의 선택이다 - 이 출현했는 바, 이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즉, 푸코가 감지했던 지식과 권력 사이의 상관관계인 것이다. 국민 투표의 선택에 대해 시라크가 행한 비판도 이 논증과 일치한다. 유럽같은 중요한 사안을 무지한 대중의 결정에 내맡기는 것은 좋지 못하다. 우리는 주민의 무지한 분파를 자본-의회주의 체제의 바깥에 둘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것은 대략 주민의 오로지 반만이 투표에 참여하는 미국에서도 이미 명백하게 유포된 테마다). 진정한 시민이기 위해서는 특수한 자격이 필요하다(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은 물론 주체성을 동등히 통제하는 것이 실패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납세액에 따른 제한 선거 교리로의 음험한 회귀... 진리는 바로, 만일 자본-의회주의 장치와 단절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는 항상 과거에 지배 장치들과 단절할 때에도 참이었다), 우리가 어김없이 이런 저런 야만의 계기를 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파의 편에서나, 좌파의 편에서나 이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공화국 전통' - 그것과 단절하는 입장은 야만으로 간주된다 - 이라는 일련의 술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반대'는 '야만적' 선택으로 나타난다.

3) 유럽 헌법 텍스트 자체에, 반-야만적 조항들이 들어있다. 나는 '이주민들의 흐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유럽의 상태는 보호되어야 한다 (미셸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참조). 그 텍스트에서는, 야만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확정하는 문제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유럽의 관념은 여기에서 배제로서만 가치가 있다.

4) 그러나 '위대한 새로운 관념'으로서의 유럽 ? 혹은 '비판적' 유럽의 언표들 속에서 유럽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나, 나는 유럽에 찬성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럽, 관념으로서의 유럽은 이미 죽었다. 유럽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시체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과 같다. 내 경우, 나는 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을 독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방식 뿐이다. a) 유럽을 제국주의 간의 경쟁 (유럽 대 미국)의 틀에서 파악하는 것. b) 유럽을 이질적인 하나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유럽을 미국에 대해서도 이질적이며,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량에 대한 이 질문, 특히 군사적 역량에 대한 질문은 독특성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시험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엔 어떠한가? 나는 당대의 유고슬라비아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유럽 열강들[역량들](영국, 프랑스, 독일)이 보여준 무능력에 대해 말해야 겠다. 이러한 무능력의 결과들(우리[유럽]의 문에 위치한 나라에 미국의 비행기들이 폭격을 해댄 것)은 나에겐 일종의 판결, 즉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들에 대한 이 동일한 열강들의 태도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만일 '반대'가 승리한다면, 유럽과 비교해 한 발자국 후퇴할 가능성의 위협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일보 후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당면 문제는 사실상 국민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넘어서기'가 국민 국가의 범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주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우리는 [이번 학기 강의의 주제인] 적의 형상을 식별해야할 필요성이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새로운 유형의 역량, 미국 헤게모니에 반대될 뿐 아니라, 미국의 역량에 대해 대칭적이지도 않은 그러한 역량에 대한 질문, 이 결정적인 질문은 오늘날 널리 열려진 질문이다. 이 질문은 적어도 '사회적 유럽' (게다가, 물론, 나는 이에 대해 호의적이다) 만큼이나 중요하다. 유럽의 문제를 토대에서부터 다시 취해야 한다. 내가 공개적으로 발표했으므로,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이것이 프랑스-독일의 새로운 동맹(이는 영국인들을 그 동맹의 바깥에 둔 이후에 이뤄져야 하며,영국인들이 성찰할 수 있도록 시간이 필요하다)을 거쳐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 이것이 [유럽 헌법안에 대한] 선거 논쟁과 관련된 나의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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