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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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의 천사-멘붕의 정치학, 유령들, 메시아주의

 

 

역사의 천사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유언이라 불리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또는 「역사철학테제」라 불리기도 한다) 중 9번째 테제는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인 「새로운 천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39쪽)

 

이제 클레의 그림은 벤야민의 테제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그 그림을 보면 벤야민을 떠올리게 되고, 벤야민을 생각하면 또 그 그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나는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이견을 지니고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정세를 겪으면서 그의 테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라고 불리는 폭풍 앞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파국을 막아보려고 하는 역사의 천사, 하지만 그럴수록 발 앞에 쉼 없이 잔해가 쌓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역사의 천사를 생각하게 된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반동 세력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8번째 테제. 앞의 책, 337쪽)이라고 말한다. 곧 파시즘의 적이 파시즘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싸움을 벌이는 한, 언제나 승리자는 파시즘, 반동 세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성격이 무엇인지, 거기에서 승리와 패배를 규정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숙고하려는 사람이라면 한번 곱씹어볼 만한 테제다.

 

 

어떤 멘붕

 

‘멘붕’이라는 용어는 이제 은어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공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이 말이 일간신문에까지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알다시피 ‘멘탈 붕괴’의 줄임말인 멘붕은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거나 심하게 좌절감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넘어 멘붕이 사회적 공용어가 되게 해준 계기는 아마도 지난 18대 대선이었을 것이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부터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대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내가 이런저런 사석에서 만나본 사람들도 대개 이번 선거에서는 야권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물론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늘 앞서 나갔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숨은 야권표가 10%는 될 것이며, 주로 집전화로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는 핸드폰 사용자인 젊은이들이 빠져서 신빙성이 없다고, 야당 후보는 늘 바람을 통해 막판에 뒤집기 마련이라고, SNS 상에서는 게임도 되지 않는 상태라고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더욱이 선거 당일날 투표율은 이미 오전부터 최근 선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게 나타났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선거의 공식인 만큼 이러한 예상은 점점 현실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이런 낙관적인 기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여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지상파 방송 3사의 합동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일차적인 실망감이 터져 나왔으나, 그래도 출구조사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우니 끝까지 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들이 SNS와 인터넷 댓글에 속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초조한 인내심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거일이 지나가기 전 여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이라는 자막이 지상파 방송에 떴고, 그것으로 결과는 끝이었다.

 

‘멘붕’의 고통을 호소하는 트위터와 댓글이 순식간에 온라인을 뒤덮었다. 그리고 놀라운 결속력으로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결국 당선시킨 50~60대 여당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저조했던 20대 젊은이들에 대한 비아냥과 불평의 글들이 넘쳐 났다. 야권 후보를 지지하고 그가 당선되기를 목놓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나긴,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필자가 1987년 겨울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탔던 지하철 풍경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놀랍게도 지하철은 적막 그 자체였다. 역의 이름을 알리는 안내방송 말고는 열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초췌하고 피곤한 눈길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선 채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웃음소리도 불평 소리도 사소한 다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집단적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그날의 적막한 고요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대선에서 사람들이 겪었다고 하는 ‘멘붕’은, 야박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이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거의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주변의 지인들이 선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낙관에 들떴을 때도 냉담한 기분이었고, 참담한 결과에 고통스러워할 때도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번 선거의 승리와 패배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승리했느냐 패배했느냐보다는 어떤 승리이고 어떤 패배인가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그렇다.

 

유령들의 싸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들의 싸움이었다. 여당 후보로 육화된 박정희의 유령과 야당 쪽에서 불러내려고 애쓴 노무현이라는 유령이 싸움을 벌인 선거였다. 노무현이라는 유령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박정희의 유령의 위력이 여전히 거대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망령의 위험을 경고하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대표하는 노무현의 유령은 경제발전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망령을 당해내지 못했다.

 

사실 노무현은 경제발전이라는 망령과 맞서 싸우기에는 상당히 허약한 유령이다. 그가 5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수행했던 통치는 그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유령으로 불러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대단히 민주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권력 분립을 위해, 지방 자치를 위해, 남북 관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노동자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재갈을 물렸고, 재벌의 권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고, 황우석을 위해 피디수첩을 공격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는가와 별개로, 그는 민주화의 유령,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박정희는, ‘진보’ 역사학자들 및 언론 매체의 지속적인 비판과 축귀(逐鬼)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유령이라는 점이, 그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왜 박정희의 유령이 그토록 강력한 것일까? 이미 사망한지 3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박정희 집권 당시에 이룩된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사람들의 삶이 팍팍할수록, 돈벌이가 잘 되고 취직 걱정이 없고 나날이 살림살이가 좋아져 간다고 느끼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5년 전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도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면서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던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과연 ‘그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들과 대립하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우리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 바람, 다른 향수를 갖고 있었을까? ‘그들’과 ‘우리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경제 발전 대 민주화가 아니라, 사실은 경제 발전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동일한 경제 발전에 대한 욕망을, 한 쪽은 좀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반면, 다른 한 편은 ‘민주화’라는 어색한 수사법으로 애써 둘러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메시아주의

 

사실 노무현이 박정희의 유령에 맞서기에는 불안하고 역부족인 유령이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노무현도, 문재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안철수라는 새로운 메시아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노무현이 생각지도 않게 2002년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또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던 여론조사를 뒤집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올랐던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극적으로 자신들의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링에 올라보기도 전에 밀려났고, 어쩌면 그것으로 18대 대선이라는 유령들의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안철수에게서, 또는 그 뒤에는 마지못해 문재인에게 기대했던 희망과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것,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발전의 기적을 순조롭게 지속해가되 거기에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들이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복지국가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잠식하며 시장(또는 자본)의 명령에 순종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란 사실은 사회의 약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복지국가일까? 그리고 그러한 복지국가는 박정희의 유령을 내세운 이들도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선거 결과에 멘붕을 했던 이들은 무엇 때문에 멘붕을 한 것일까? 그리고 멘붕을 한 이들은 어떤 계급의 사람들일까?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여러 노동자가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불과 며칠 사이에 연이어 자살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선거 결과를 기다렸을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기대했던 그 메시아는, 과연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가치가 있는 메시아였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진보가 있을까 질문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거 직전 한겨레 신문이 좌파 메시아주의의 아이콘 중 한 사람인 알랭 바디우를 동원해 야당 후보를 지원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통해 고통스럽게 말했듯이, 적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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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마다 2013-03-10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볼때마다 마음에 걸렸는데 포스트 제목이 "멘붕의 정치학"이 아닌 "벤붕의 정치학"입니다. 수정 완료하시면 이 댓글은 지우겠습니다.

balmas 2013-03-10 21:42   좋아요 0 | URL
하하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여태 그런 줄 몰랐네요.^^

쾅! 2013-03-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민주주의가 상관 없다고 보는 제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글입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는 "광란(狂亂)의 댄스"로 보는 제 入場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일단 제 입장은 제쳐 두고 발마스 님께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셨던 걸로 여전히 기억하는데 이 글을 읽어 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투표를 독려하면서, 몇 살까지 젊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35나 33 아니면 29라 해도 다 이의 제기가 있을 겁니다. 제 기준으로는 18살까지가 젊은이고 그 이상은 늙은이입니다! 1980년대에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은 "화석" 같은 사람들이죠. 엄밀하게 따지면 박정희가 죽은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전 그 기간을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가 이상했던 기간을 늘려서 뭐 하겠습니까? 그것도 2년이나!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이명박은 6년이나 7년 동안 대통령이었던 거지요.)





쾅! 2013-03-29 20: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송달송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쾅! 2013-03-2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국민 100%가 참가해서 제비뽑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발마스 님이 말씀하신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누구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으니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으며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현실은 쉽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멘붕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치는 김에 장관이나 차관도 제비로 뽑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점은 발마스 님이 제비뽑기로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에 에티카 강의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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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비판과 정치적인 것

 

클로드 르포르-정치적인 것의 발명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1924~2010)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라는 급진 좌파 정치 집단을 이끌다가, 맑스주의에 본래적인 전체주의적 한계를 절감하고 반(反)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애쓴 정치철학자다. 따라서 그는 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 강령 정책에 맞서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피에르 노라(Pierre Nora),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등이 주도한 반전체주의적 자유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의 이론적 지향은 이들과 구별되는 독특성과 급진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민주주의 해석의 독창성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프랑스어에서 정치를 가리키는 단어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이며, 르 폴리티크(le politique)는 원래 ‘정치가’를 뜻하는 말이다. 반면 르포르는 경제나 사회 또는 문화와 구별되는 인간 활동의 한 영역을 지칭하는 정치와 구별되는 좀더 근원적인 차원, 곧 어떤 사회를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특히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근대성 및 그것을 창설한 프랑스혁명의 새로움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다.

 

르포르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따라서 그것이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장소를 지니고 있다. 근대 이전에 이러한 상징적 장소는 우주론적 질서나 관습적 의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면, 절대주의 시기에는 현실적인 왕의 신체와 구분되는 영구불멸한 상징적인 신체에 놓여 있었다. 실제의 왕이 죽거나 대체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징적인 왕의 신체, 주권(주권(sovereignty)은 원래 ‘지고한 힘’(suprema potestas)을 뜻한다)의 장소가 보존되는 한, 사회의 통일성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설립된 근대성의 특징은, 이처럼 사회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중심의 자리를 비워버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왕의 머리 베기’). 혁명을 통해 비워진 이 자리를 둘러싸고 근대의 두 가지 정치 체제인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가 각자 상이한 해법을 제시한다. 전체주의는 이 자리에 왕을 대신하는 새로운 통일체, 곧 주권적 인민을 위치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상의 인민은 다양하고 분할된 집단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통일성을 부과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을 수반하기 마련이며, 더 나아가 당이나 수령 같은 또 다른 유사 초월적인 통일체로 인민을 대체하게 된다.

 

반면 민주주의는 이 빈 자리를 채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비워둔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양한 행위자들 및 원칙들이 이러한 상징적 통일성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지만, 그 어떤 집단이나 원칙도 이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수는 없다. 특정한 행위자나 집단이 내세우는 원칙은 이러한 빈 자리를 메우는 상상적인 봉합물일 뿐이며, 비어 있는 상징적 중심과 현실적 분할 사이의 괴리를 메울 수 없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특징은, 권력의 중심을 비워둠으로써, 어떤 사회가 고안해내는 자기 재현의 통일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다양성 사이의 간극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정치적인 것에서 봉기적 시민권으로 

 

이렇게 보면 르포르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로 꽤나 자유주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상당히 비관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실제로 르포르의 후계자 중에는 마르셀 고셰 같은 자유주의 이론가나 피에르 마낭(Pierre Manent) 같은 보수주의 이론가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는 얼마간 사실이다. 하지만 르포르 이론의 독창성은 자유주의적인 전유로 소진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에티엔 발리바르다. 발리바르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발표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윤소영 엮음,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이라는 글에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의 독창성을 재해석하면서 르포르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봉기적 시민권 개념으로 정정하고 확장한다.

 

발리바르는 르포르와 마찬가지로 근대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환원하려는 맑스주의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맑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간과 시민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괴리에서 찾는다. 곧 민주주의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 인간들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소유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한 정치적 권리란, 현실적인 사회적ㆍ경제적 모순을 은폐하는 기만이거나 수사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르포르를 좇아 [인권선언]에서 제시된 권리 개념의 새로움을 강조한다. [인권선언]의 권리 개념은 고전적인 자연권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계보학적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가령 에른스트 블로흐). 하지만 고전적인 자연권 이론과 달리 [인권선언]의 권리는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적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성원인 시민에 근거를 둔다. 곧 인간이 지닌 본래적인 권리란 시민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고 서로 인정해주는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은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존재자가 아니며, 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현실과 가상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양자는 정확히 동일한 존재자를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이를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근대의 인민 주권은 절대주의 시기의 초월적 주권의 모방물에 불과하다는 마르셀 고셰의 테제를 반박한다. 인민 주권은, 주권자와 신민 사이의 위계적 불평등에 기초를 둔 고전적인 주권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용어모순적인 평등한 주권을 가리킨다. 이는 정치 공동체의 궁극적인 토대란, 자연적인 것도 초월적인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공동의 선언에 있으며, 이러한 권리를 지키고 확장하려는 시민들 자신의 행위에 있음을 뜻한다. 곧 인민주권이란 근대 정치의 최고 원칙으로서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발리바르는 이를 ‘평등자유’(equaliberty)라는 신조어를 통해 표현한다.

 

따라서 르포르가 상징적 통일성과 현실적인 분열 사이의 괴리를 강조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인권선언]에서 표방된 권리가 제도화된 법적 틀을 넘어선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법적ㆍ제도적인 틀을 기초 지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틀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권리의 창조를 촉발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원천을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르포르의 주장을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정정하고 보충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인권선언]이 혁명적인 선언이고, 봉기적 행위였음을 강조한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봉기(insurrection)는 단순한 반역이나 반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헌정과 단절하고 새로운 헌정을 창조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모든 헌정은 이러한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자신을 쇄신할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둘째, 발리바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봉기의 정치헌정(constitution)의 정치의 관계로 재규정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르포르와 달리 봉기를 통해 형성된 헌정의 정치, 제도적인 정치를 가리키게 된다. 이로써 봉기와 헌정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좀더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셋째, 발리바르는 르포르와 달리 ‘정치적인 것’을 위해 사회적인 것, 또는 계급투쟁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에 의한 노동 계급의 지배(및 인간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다른 지배)를 정치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간주한다. 정치는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조건들 속에서 정치를 이해할 때에만 정치의 쟁점과 그 주체 또는 주체화의 문제가 좀더 정확히 규정될 수 있다. 르포르는 정치의 자율성과 근대 민주주의의 새로움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지만, 정치를 지배의 문제와 연결하고, 주체화의 쟁점과 관련짓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발리바르의 이론적 독창성(중 일부)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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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이분법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르포르라는 인간은 홉스봄하고 비슷한 인간이 아니었나 싶다.
 
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철학의 정원 8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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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코기토]라는 학술지에 수록될 서평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이 글에 대해 논평하거나 토론할 분은

[코기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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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

 

 

문성원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는 사회철학 전공자나 프랑스철학 전공자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학위논문({철학의 시추}, 백의, 1999)에서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10)를 거쳐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줄곧 현대 프랑스 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고하고 글을 써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입각한 사회철학이 필자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지향이 좀더 뚜렷이,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관심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타자와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싣고 있으며, 로컬리티, 주변, 책임, 이웃, 윤리의 문제에서 타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2부는 “새로움과 윤리”라는 제목에 따라 4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문제와, “잘 있음”을 넘어서는 “있음과 달리”로서의 윤리의 문제, 시간과 새로움이 함축하는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철학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는 곳은 바로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표현과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이미지, 차이, 욕망과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요 주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진리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좀더 거시적인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4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의 이전 저작들의 문제의식과 좀더 맞닿아 있는 반면에, 1부와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좀더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떤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7쪽)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와 관련하여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냐 레비나스냐라는 대결 구도를 논의의 줄기로 삼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해체론적인 사상, 곧 “유동성과 끊임없이 ‘차이지는 차이’가 근본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이며, 짐짓 고정되어 보이는 영토와 체계를 부단한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흔들어 놓는 것이 이들의 추구하는 바”(103쪽)인 반면, 레비나스는 “변화를 수용하는 열림의 자세와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109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이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희구하는” 사상인 반면(필자에 따르면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어떤 정해진 해결책이나 정의의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이루어짐에 대한 기다림”(160쪽)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궁여지책”(16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나타내는 타자 개념과 더불어 그 새로움의 해악을 막는 윤리라는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이러한 대결 구도가 함축하고 있는 논점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질서”(109쪽)는 때로는 주변-중심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는 “호혜성의 문제”(59쪽)로 이해되기도 하고, 다위니즘에 기반을 둔 경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욕망(3부 3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윤리 개념은, 필자에 따르면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필자의 글을 접해온 평자에게 이 책은 필자의 지적인 미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는 필자의 지속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철학자가 한국의 현실에 입각하여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실제로 이렇게 한국이라는 레퍼런스에 뿌리를 두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철학, 한국의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보다는 그 철학적 고향들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 있으며, 그 고향들을 자신들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삶을 레퍼런스로 삶기에는 그들의 사유가 아직 허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일관된 철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고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명확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를 꼽을 수 있다. 이점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필자 자신의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 정확히 논의를 전개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글과 같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철학적인 글은 설렁설렁 되는 대로 쓰이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달된 문체의 힘과 더불어 일관되고 깊은 문제의식이 곁들여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젊은 철학도나 인문학도에게 교과서와 같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자가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나 불만, 또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자는 줄곧 불만이나 의문을 품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필자의 논의가 다소 개략적이라는 점이 불만스럽다. 필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알튀세르, 바디우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로티, 월저, 롤즈 같은 독일과 영미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에 관해서만 비교적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뿐,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는 개략적인 인용과 논의 이외에는 깊이 있는 분석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서두에서 지적하듯(8쪽),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고해보려는 필자의 지적 관심에서 비롯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곧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론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면밀하고 심도 있게 검토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썩 훌륭한 결과가 산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해체와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철학적 기반은 레비나스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필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적ㆍ윤리적 의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7쪽) 있으며, 로컬리티의 문제나 분단의 문제(1부 1장)에서도, 의약분업과 관련된 의사 파업의 문제에서도(1부 3장), 경쟁 이데올로기 극복의 과제에서도(1부 4장), 웰빙의 문제(2부 3장)에서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ㆍ윤리적 보고로 제시된다. 따라서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위력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는 잘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 사상의 이런저런 개념들(타자 내지 타인, 전체, 무한, 향유, 거주 등)에 관한,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내용만 제시되고 있을 뿐, 레비나스에 관한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언가 새롭거나 독창적인 분석이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평자로서는 레비나스를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필자의 태도가 다소 놀랍다.

 

아마도 필자에게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이나 아니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인 준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에 비견될 수 있는,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초월(론) 철학, 곧 타자에 입각한 초월(론)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을 초월론적 주관성에 입각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상호주관성의 철학도 넘어서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에 입각해 있고, 타자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매우 새로운 초월(론) 철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이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실제로 논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호혜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의 철학이나 현재의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뿐더러,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한하”(115쪽)다고 말하고, “레비나스의 독특성과 무한은 ... 초월과 직결”(120쪽)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레비나스 철학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그것은 “윤리적 초월”(120쪽)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 사이에 그처럼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가? 유일자인 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인 이웃들, 이웃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초월성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련하여 그 닿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상화하고 구체화할수록 그 초월성은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평자가 보기에 필자가 제시하는 레비나스는 신과의 초월적 관계를 새로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로 번역하고 싶어 하는 철학자,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특이한 점은 이웃을 사랑하되, 우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돌본 뒤에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 자신 및 내 가족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에 앞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자아에 앞서야 하는 사랑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질서, 호혜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책임의 모습을 띤 사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 같은 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또는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난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필자가 레비나스 철학이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의 논의와 주장이 때로는 상당히 막연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논의 자체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필자는 4장 1절에서 다위니즘을 “반목적론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형태”(77쪽)라고 말하면서, 의도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도 유기적 조직과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을 다위니즘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위니즘이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음에 대하여 “사태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원리의 자격”(79쪽)을 부여함에 따라, 오늘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다위니즘으로 지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윈 사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종류의 생물학 이론을 가리키는가? 또는 그 중에서 특정한 일부,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에 대한 통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가? 필자가 막연하게 다위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는 과연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필자의 주장은 다윈 사상 전체 및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생물학의 흐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주의 생물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또는 적어도 다윈주의 생물학 자체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윈주의 생물학은 모두 배격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다윈주의 생물학 전체와 대립하는 철학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과연 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들뢰즈ㆍ가타리의 철학이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면모들과 부합하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98쪽)거나 “들뢰즈ㆍ가타리의 사회철학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역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9쪽)라는 주장, 또는 데리다가 “이전에는 치열하게 비판했던 레비나스의 타자를 ‘환대’하게”(258쪽)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대담한 주장인데도, 필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주로 지젝이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지젝의 논의가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검토되지 않으며, 데리다에 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2차 문헌’이라고 하는 문헌들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레비나스나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등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되는 ‘2차 문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필자의 주장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까? 어떤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텍스트일수록, 그것이 남긴 흔적들, 또 그 텍스트 자체가 흔적을 이루는 그 이전의 흔적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흔적들의 연관망과 분리되면, 그 텍스트는 아주 빈곤한 것이 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흔히 ‘원전’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월적인 타자, 찬미와 경배의 대상인 타자가 될 뿐, 분석과 해체, 산종(散種)의 텍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2차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그러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노력의 다른 표현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은,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아직 충분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텍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의 이면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다음 번 책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텍스트들의 해체와 산종의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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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를 읽기 위해서는 레비나스를 읽을 필요가 있죠.

레비나스를 읽다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헛소리에 사로잡혀 있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려고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해도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또 다르죠.
 

 

 

 

 

 

도서출판 길에서 주최하는 벤야민 심포지엄 "2013 벤야민 커넥션"이 3월 9일-10일 이틀 동안 정독도서관에서 열립니다.

 

작년에는 그린비에서 주최하는 푸코 심포지엄이 열렸고, 올해는 벤야민 심포지엄이 열리게 됐는데,

 

앞으로 이런 종류의 행사가 좀더 많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저도 이번에 발표를 하나 맡게 됐는데, 제가 발표할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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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정의-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벤야민 심포지엄 초록)

 

 

좌파 정치,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진보 정치를 위해 메시아주의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그 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 글이 화두로 삼고 있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두 가지 실마리를 통해 이 질문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실마리는 최근 유럽 정치철학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또는 메시아주의적인 경향이다. 특히 조르조 아감벤과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의 저작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유사파시즘적인 정치체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변혁하거나 넘어설 수 있는, 일종의 메시아주의적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 및 서양의 정치신학적 전통에 대한 재고찰만이 아니라, 하이데거, 벤야민 또는 데리다 같은 20세기 철학자들에 대한 재전유를 통해 자신들의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정치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실마리는 {법의 힘}과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제안하는 하이데거와 벤야민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쟁점이다. 데리다는 {법의 힘} 「후기」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종말론적 해체(Destruktion)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사상이 최악의 것(곧 파시즘)과 공모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서 데리다는 두 사람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정치철학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두 사람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정당한 것인가? 아니면 이 두 사람은 ‘데리다의 유령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두 개의 실마리를 부여잡고, 우리는 이 글에서 하이데거와 벤야민, 그리고 데리다 철학에서 시간과 정의의 관계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이 세 명의 사상가의 연관성과 차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은, 이들 사상의 독창성과 깊이도 중요한 이유가 되거니와, 또한 이들의 사상이 우리 시대의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과 정의의 관계가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되는 것은, 이 세 사람 모두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따라서 새로운 정치 및 윤리의 근거를 시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시간성과 정치ㆍ사회적 지배 메커니즘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이러한 연관성에 대한 인식 및 그것에 대한 해체 없이는 진정한 정치적ㆍ윤리적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적어도 하이데거와 벤야민은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데리다는 시간과 정의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하이데거나 벤야민과 달리 통속적인 시간성과 진정한 시간성을 대비시키지도 않고, 법과 정의, 지배와 혁명, 또는 타락한 정치와 진정한 정치를 대립시키지도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이 글이 답변해보려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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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해체라는 건지 탈구축이라는 건지? 벤야민과 하이데거는 해체라고 번역하고 데리다는 탈구축이라는 건지 알 수 없군요.
 

조만간 동녘출판사에서 나올 [프랑스현대철학]에 수록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이 책은 작년 가을 철학아카데미에서 있었던 "현대프랑스철학 특강" 원고들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저는 데리다 편을 맡아서 강의를 했고, 강의 원고로 준비했던 글을 좀 다듬어서 책의 원고로

 

만들어봤습니다.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가급적 쉽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이 글이 수록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아카데미 편,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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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축, 차이, 유령론: 세 개의 키워드로 읽는 데리다

 

 

I. 들어가는 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저작을 남긴 철학자입니다. 생전에 80여권에 달하는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과 인터뷰를 남겼으며, 사후에도 수십 권에 달하는 강의록이 기획ㆍ편집되어 출간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사상을 짧은 글 한 편에서 요약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포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더욱이 데리다의 대부분의 저작은 플라톤, 데카르트, 루소, 헤겔, 후설,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아르토, 블랑쇼 같은 철학자나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아주 꼼꼼한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데리다 사상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 꼼꼼한 분석의 과정을 따라가 봐야 합니다. 그러니 데리다 사상을 짧은 글에 요약하는 일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데리다를 요약하거나 그의 분석을 하나하나 따라 가는 대신, 국내에 널리 소개돼 있는, 하지만 제대로 이해되거나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데리다 사상의 일면을 엿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데리다는 다작의 작가이면서 또한 수많은 개념을 만들어낸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들어낸 개념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I. 해체 또는 탈구축

 

우선 ‘해체’라는 개념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해체라는 개념은 포스트 담론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입니다. 그래서 근대의 해체나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민족의 해체, 국민국가의 해체, 국사의 해체 같은 말을 흔히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의 역사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듯이, 어떤 용어가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 용어가 정확히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광범위한 사용 자체가 원래의 용어가 지닌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왜곡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지닌 개념적 강점과 잠재력을 손상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해체는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잘 예시하는 개념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해체’라는 번역어 자체가 프랑스어 원어가 가진 의미를 상당히 왜곡하거나 적어도 축소하고 있습니다.

 

1. 해체라는 용어의 기원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체라는 말은 자크 데리다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데리다가 자기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고안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널리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독일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의 데스트뤽치온(Destruktion)이나 압바우(Abbau)라는 개념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말입니다(“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à un ami japonais), in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Galilée, 1987 참조). 하이데거가 서양의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파괴하거나 철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체화되고 경직된, 따라서 존재의 사건을 은폐하게 된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를 회복하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데리다가 데콩스트뤽시옹(déconstruction)이라는 프랑스어를 Destruktion이나 Abbau라는 개념의 번역어로 제안하고 그것을 자기 나름의 철학적 목적을 위해 실천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단순히 서양의 형이상학을 파괴한다거나 철폐한다는 것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해체의 일반 전략

 

그렇다면 데리다가 ‘데콩스트뤽시옹’ 또는 ‘해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시도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데리다가 “해체의 일반 전략”(󰡔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1991, 64쪽)이라고 부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 전략은 먼저 전복의 단계를 거칩니다. 이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대립 구도가 폭력적 위계 질서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원적인 대립쌍(예컨대 음성 대 문자기록, 현존 대 부재, 이성 대 감성 등)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질서는 평화로운 공존의 질서가 아니라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질서죠. 따라서 형이상학의 해체는 우선 이러한 위계적 질서를 전복시키고 다른 항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되어왔던 항의 권리를 복권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 데리다 작업의 주요 주제였던 문자기록(écriture)(이 개념은 보통 ‘글쓰기’라고 번역되지만,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죠.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 중에는 신뢰할 만한 판본이 없습니다)나 󰡔문자기록과 차이󰡕(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67. 국역본에서는 󰡔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돼 있습니다) 같은 책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플라톤에서부터 루소를 거쳐 후설,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는 문자기록을 폄하하고 음성이나 말을 중시하는 태도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곧 이 사상가들은 모두 진리 내지 로고스(logos)는 말 속에서, 생생한 대화 속에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문자기록은 진리와 거의 관계가 없는 단순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아주 위험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문자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생생한 대화 및 기억 능력을 퇴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데리다가 초기 작업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처럼 진리 내지 로고스와의 관계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문자기록이 사실은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왜 문자기록이 이러한 조건의 지위에서 배제되고 또 억압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구조적ㆍ역사적 필연성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해체 작업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음성에 대해, 로고스에 대해 문자기록이 우월하다는 점일까요? 데리다는 기존의 위계적 지배 질서를 전복시켜 그 중 열등한 위치에 있던 것을 새로운 지배항으로 구성하는 것은 여전히 기존 질서를 되풀이하고 재생산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해체의 일반 전략은 단순히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입장들󰡕, 66쪽), 지배 질서의 “긍정적 전위(轉位)”(󰡔입장들󰡕, 93쪽)를 시도하고, 위계 구조 자체의 해체를 시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의 해체란, 가령 문자기록을 음성에 대해 우월한 것으로 확립하거나 서양의 알파벳 같은 표음문자에 대해 표의문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 요컨대 “음성 중심주의”를 대체하는 “기록 중심주의”(graphocentrisme)(󰡔입장들󰡕, 35쪽)을 주창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ㆍ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ㆍ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드러내려고 시도합니다.

 

실제로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좁은 의미의 문자기록, 곧 알파벳 문자기록 대신 새로운 문자기록 개념을 제안합니다. 그가 원(原)기록(archi-écriture)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통적인 문자기록은 생생한 말을 ‘représenter’(이 말이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일단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하는 것을 목표로 하죠. 가령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였던 콩디약(Condillac)은 문자기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소리로 의사소통을 할 줄 알게 된 사람들이 부재하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호의 필요성을 느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문자기록이다.”(J. Derrida, Marges 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p. 371) 이 경우 문자기록은 가능한 한 원래의 메시지, 곧 생생한 말을 있는 그대로 잘 ‘재현하고 표상하고 대신하는 것’(이것은 모두 représenter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들입니다)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죠. 좀더 철학적인 어법으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기록은 생생한 말, 로고스 같이 이미 현존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잘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언어를 사물 내지 세계를 재현하거나 표상하는 매체로 간주한 전통적인 언어관과 일맥상통합니다.

 

데리다가 볼 때 소쉬르 구조언어학의 중요성은 이런 언어관을 해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 개념 덕분에 이제 언어를, 이미 현존하는 것(신의 말씀이나 자연적 사물 또는 정신 안의 관념 등과 같은 것)을 ‘재현하고 표상하고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죠.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자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 이전에는 세계 그 자체, 자연 그 자체에도 역시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역설적이게도 소쉬르는 음성만이 자연적이거나 본래적인 기표이며 문자기록은 음성 기표에 대한 부차적이고 외재적인 도구라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음성 중심주의 및 로고스중심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De la grammatologie, 1부 2장, 「언어학과 그라마톨로지」 참조).

 

따라서 데리다가 ‘원기록’이라는 새로운 기록 개념을 제안하는 것은 소쉬르의 언어학 혁명에 담긴 함의(전통적인 언어관을 전복하는 ‘차이의 체계’로서 언어)를 급진화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놓기 위함입니다. 원기록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종래의 문자기록 개념이 전제하는 바와 같은 재현 관계, 곧 이미 현존하는 사물과, 언어나 기호 또는 기록 사이의 일치나 상응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호 내지 언어가 차이의 체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앞서 있는 그대로 현존한다고 간주된 세계 내지 자연 또는 ‘현실’ 역시 차이 작용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원초적인 기원 및 궁극적인 목적/종말 같은 것들과 더불어 주체 역시 차이의 작용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현존과 동일성은 차이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이의 작용에서 산출된 것이며, 그 내부에 차이와 타자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기원은 항상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타자의 흔적이며, 현존은 흔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기록은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差延, différance)(이 개념의 번역 문제는 2절에서 다뤄보겠습니다)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3. 스스로 일어나는 것으로서의 해체

 

데리다는 해체가 분석도 비판도 방법도 아니라고 합니다. 해체가 분석이 아닌 이유는, 분석은 항상 더 이상 분해 불가능한 최소의 궁극적인 단위, 따라서 해체 불가능한 기원으로의 소급을 전제하는 데 반해, 해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들은 모두 해체되어야 할 철학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해체는 일종의 비판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해체가 비판과 다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비판은 어떤 이론이나 담론 또는 체계의 문제점이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해된 비판은 비판의 대상에 대해 외재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다르죠. 데리다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지 않으며, ‘해체의 주체’가 해체할 대상에 대해 외부에서 수행하는 ‘조작’(opétation)이 아닙니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는 “Ça se déconstruit”(Psyché: Inventions de l'autre, p. 390)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그것이 자신을 해체한다” 내지 “그것은 해체된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죠).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또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듯)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발전시키고 전위시키는 일은 해체의 대상 바깥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여하고 있고 그 일부를 이루는 이들의 일입니다.

 

따라서 해체가 해체의 대상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임의적인 조작이나 비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우 꼼꼼하고 정교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독서는 “텍스트에 내재적이어야 하고 텍스트 안에 머물러야”(De la grammatologie, p. 228) 하며,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작가가 ... 역사와의 교환 속에서 수립하는 의식적, 자발적, 지향적 관계”(같은 책, p. 227)를 재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해체가 단순히 저자의 의도,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충실한 해석에 머문다면, 당연히 그것은 주석일 수는 있어도 해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텍스트의 논리, 텍스트의 작용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텍스트 내부에서 텍스트의 바깥을 발견할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제 독해에서 저는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 독서를 시도합니다 ... 외부에서 텍스트를 지휘하려고 했던 것을 텍스트 속에 폭력적으로 기입함으로써, 자신이 은폐하는 것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말소 작용이 표시돼 있는 몇몇 결정적인 장소들에서, 저는 이러한 이중적 작용을 통해, 이러한 철학소들(philosophèmes) 내지 인식소들(épistémèmes)의 내적이고 규칙적인 작용을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존중함으로써 그것들이―그것들을 부당하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자신들의 관여성을 상실하고 소진되고 [일정한 한계 내로] 갇히는 지점까지 점차 넘어가게 하려고 시도합니다.”(Positions, Minuit, 1972, p. 14~15; 󰡔입장들󰡕, 28~29쪽. 번역은 다소 수정) 곧 데리다가 수행하는 이중독법은 전통적인 텍스트 주해나 비평의 규칙과 절차들을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준수함으로써 텍스트의 논리, 텍스트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텍스트가 감추면서도 드러내는 텍스트의 한계 지점, 텍스트의 은밀한 균열이나 모순 또는 “맹목점”(De la grammatologie, p. 234)을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독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텍스트에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4. 해체 또는 탈구축

 

이렇게 본다면 déconstruction이라는 개념은 ‘해체’로 옮기기보다는 ‘탈구축’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해체라는 말이 무너뜨리고 철거하고 더 나아가 제거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데리다가 말하는 déconstruction은 ‘해체의 일반 전략’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상당히 적극적인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déconstruction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지배 질서를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서,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 곧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지 않으려는 운동으로서의 탈-구축의 운동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해체’라는 말이 이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정착되어온 만큼 이 번역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탈구축의 운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III. 차연 또는 차이

 

1. 차연은 디페랑스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을 “개념들을 창조하는” 학문으로 규정했죠. “철학자는 개념의 친구이며 개념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개념들을 형성하거나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개념들은 반드시 형태들, 고안물들 또는 생산물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념들을 창조하는(créer) 분과학문이다. ... 항상 새로운 개념들을 창출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대상이다.”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 8~10. 강조는 들뢰즈ㆍ가타리)

 

사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개념들을 통해 사고하고 작업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죠.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기존에 널리 쓰이던 개념을 가져와서 그것을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새롭게 개조하거나 변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나 칸트의 경우가 그렇죠. 특히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철학자들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유독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낸 철학자입니다. 가령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e), 갈등 구조(stricture), 탈전유(exappropriation), 유령론(hantologie) 등이 그렇습니다.

 

이 중에서 디페랑스(différance)는 데리다의 개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입니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디페랑스의 어근이 되는 différer라는 불어 동사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의 ‘차’라는 음절과 지연의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입니다. 이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주는 장점을 갖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합니다(한편 데리다 저작의 영역본에서는 différance라는 불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꽤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과연 이것이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어의 문제는 디페랑스 개념에 대한 이해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데리다 철학에 대한 좀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이러한 문제제기는 필요합니다.

 

2. 차연이라는 번역어의 세 가지 문제점

 

1) e와 a의 차이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것은 영어의 difference와 마찬가지로 ‘차이’를 의미합니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으며(두 단어는 불어에서 모두 ‘디페랑스’라고 발음됩니다), 따라서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는 서양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페랑스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의는 ‘차이’를 뜻하는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음성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지닌 모순의 근원에는 문자기록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발견함으로써 언어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기호와 사물 사이의 관계 또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며, 기호 체계가 사물들의 세계, 또는 사물들에 대한 재현으로서 의미의 세계와 직접적인 (곧 대응적ㆍ모사적인) 관계없는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문자기록의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을 밝혀냄으로써 음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도구로 간주하고 음성을 유일하게 자연적인 기표라고 주장함으로써(소쉬르에게 기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기록된 글자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전히 음성중심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이 음성적으로는 식별 불가능하고 문자기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는 점은 특히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2) 기원의 탈구축

 

또한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마치 디페랑스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디페랑스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발표한 「디페랑스」(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디페랑스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입니다)에서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다(󰡔철학의 여백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에 수록).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데리다는 소쉬르를 좇아 기호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이나 가치를 갖지 않고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는다는 점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데리다는 음성상의 차이가 문자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근거 짓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줍니다.

 

둘째,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디페랑스’에 관해 말함으로써 디페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 개념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러 있다면, 디페랑스는 모든 차이는 ‘지연’의 작용인 ‘시간 내기’(temporiser)와, ‘차이’의 작용인 ‘공간 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 내기’의 쉬운 사례는 가령 전기밥솥 타이머의 작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이머는 밤 12시에 이루어질 작용을 아침 6시까지 지연하는 작용을 하죠. 또한 ‘공간 내기’의 한 사례는 컴퓨터의 스페이스바의 작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스페이스바는 간격을 띄우는 기능을 하는데, 데리다가 볼 때 로고스, 곧 의미의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들 사이의 결합,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배치 및 기술적 간격 두기가 필수적입니다.)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최초가 최초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기록 안에 기입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디페랑스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조합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리다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원의 탈구축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항상 기원의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디페랑스의 의미 효과를 너무 좁게 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낯설게 하기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과 학문,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곧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철자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냅니다.

 

“이[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J. Derrida, Marges-de la philosophie, 앞의 책, p. 1)

 

데리다의 말은 「디페랑스」라는 강연이 이루어지기 한 해 전인 1967년 출간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나 󰡔목소리와 현상󰡕 같은 저작에서 아무런 설명이나 주의 없이 디페랑스라는 단어가 마치 그것이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단어인 것처럼 태연하게 사용되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데리다의 글에 교정 표시를 하던 편집부 직원들을 상상해볼 수 있겠죠). 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리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면서 의도했던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3. 차연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대안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죠.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교수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디페랑스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필자 자신은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공동으로 지은 󰡔에코그라피󰡕를 번역하면서 ‘차’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대하여󰡕,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이러한 번역은 데리다의 디페랑스라는 개념이 지닌 기록학적인 측면을 존중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 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이러한 대안적인 번역어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은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차이(差移)’라는 용어인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이것은 디페랑스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라는 역어와 달리 디페랑스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디페랑스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차이(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디페랑스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차이(差移)’라는 역어 역시 디페랑스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차이(差移)’는 기존에 제시된 번역어들 중에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충실한 번역어로 볼 수 있습니다.

 

 

IV. 유령론

 

우리는 흔히 어떤 사상가에 대해 초기와 후기라는 시기 구분법을 사용합니다. 예컨대 청년 마르크스가 있다면 또한 노년 마르크스가 있고, 초기 프로이트와 후기 프로이트는 다르다는 식이죠. 데리다 사상에 관해서도 자주 이런 식의 구분법이 적용됩니다. 여기에 따르면 1960~70년대의 초기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에 주력했으며, 언어, 기호, 문자기록, 텍스트, 은유 같은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정치와 윤리, 법, 이주, 폭력, 마르크스주의 같은 실천적인 문제들에 집중하여, 󰡔법의 힘󰡕(1994),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우정의 정치󰡕(1994), 󰡔불량배들󰡕(2003) 같은 정치철학 저서들을 출간했습니다.

 

이런 식의 구분법이 지닌 문제점은, 마치 초기 데리다 저작에는 정치나 윤리, 법이나 폭력에 관한 논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후기 저작들에서 갑자기 전면에 등장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데리다 자신을 비롯하여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초기 데리다 저작에서도 정치와 윤리, 폭력에 관한 논의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초기 저작에서 제시된 문자기록이나 기입, 차이(差移) 같은 개념은 데리다 정치철학의 주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1. 유령론의 스캔들

 

그렇다고 해도 ‘유령론’(hantologie)을 필두로 한 데리다 정치철학은 초기 작업에 비하면 상당히 색다른 것이 사실이죠. 데리다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출간하면서 우리는 모두 마르크스의 후예들이고,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의 유산을 상속해야 할 의무가 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1992)이라는 책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몰락했으며 자유 자본주의 사회가 궁극적으로 승리했다고 선언한지 1년 만에 출간된 데리다의 이 책은 데리다 정치철학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범상치 않습니다. 우선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책에 ‘유령’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을뿐더러, 시종일관 유령, 망령, 환영, 허깨비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자못 충격적입니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마르크스에 관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한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유령이나 망령, 환영 따위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하찮고 부차적인 주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정말 대담하게도 자신의 저서에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산당 선언󰡕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같은 저작,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 같은 핵심적인 이론적 저작에서 유령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우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주제나 개념 또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이런저런 사상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데리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기의나 기표 같은 중심 개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기록’이라는 매우 하찮은 단어에 착목하여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중심주의가 소쉬르에게서 나타난다는 점을 입증합니다. 또한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 나오는, 역시 하찮기 짝이 없는 ‘쉬플레망’(supplément)(대개 ‘보충’을 의미하지만 데리다 용어법에서는 ‘대체 보충’을 뜻합니다)이라는 단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루소에게도 음성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원초적인 기원이란 사실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을 밝혀냅니다.

 

따라서 데리다가 유령이라는 하찮은 단어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독해하는 것은 오히려 매우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중심에서, 아니 첫머리에서부터 ‘유령들’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이는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단수인 ‘유령’이 아니라 복수인 ‘유령들’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필요했을까요? 또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어떤 의미에서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2. 마르크스라는 유령

 

단순히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된 제목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유령이나 환영, 망령, 허깨비라는 주제가 양가적인 주제였음을 시사합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기회로 삼아 사람들이 무력화시키고 또 몰아내고자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킵니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전개되어 왔고, 특히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래 현실적인 정체(政體)로 존재해왔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을 통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체제로,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체제로 살아남아 영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그 환영마저 모두 몰아내자. 이 허깨비를 사라지게 하자.”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유령이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 한에서, 유령은 결코 소멸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질서’(요즘 표현대로 하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겠죠)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10가지 재앙”(실업, 빈곤, 망명 및 이주, 경제전쟁, 자유 시장의 모순, 민족 간 전쟁, 외채 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대한 상속이 필수적입니다.(󰡔마르크스의 유령들󰡕 3장 참조)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이론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해방의 운동이라는 이유에서도 유령처럼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법적인 공정함의 질서 바깥에서, 자본주의적인 시장 질서의 모순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타자들의 고통의 호소가 울려 퍼지는 한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와 해방의 운동은 사라지지 않으며, 지난 100여 년 간 해방 운동의 대명사로 존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역시 끊임없이 자유주의의 공모자들에게 악몽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유들이 결국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을 시사해준다고 봅니다. 당ㆍ국가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졌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이러저러한 측면들 역시 한계에 봉착했음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주의의 유령의 명령들이 우리의 상속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해방의 운동과 이론으로 고취시킨 메시아적인 것의 차원이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노동의 존재론, 생생한 현재의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문제설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령론은 존재론을 대체하는 좀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이론이기 이전에 타자들의 부름 및 호소에 대한 책임의 윤리ㆍ정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제목이 갖는 한 가지 의미는 마르크스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서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우리들에게 부르짖는 호소에 귀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을 상속하고 따라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인상적이고 야심적이며 필수적인 또는 모험적인 [...] 이 콜로퀴엄의 기조 강연을 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가 지닌 능력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른트 매그너스가 영광스럽게도 제안한 초대를 수락한 것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책임의 본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여러분의 토론에 부치기 위해서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책임이 역사적인가?”(󰡔마르크스의 유령들󰡕, 116~17쪽)

 

3. 마르크스의 유령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마르크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유령들, 또 마르크스 자신이 계속 몰아내려고 했던, 하지만 결국 완전히 몰아내는 데,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었던 유령들을 가리킵니다. 왜 그는 유령들을 몰아내려고 했을까요? 또 왜 그는 그것들을 쫒아내는 데, 푸닥거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데리다에 따르면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몰아내려고 했던 그의 적수들(󰡔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낡은 유럽의 열강들’이자 오늘날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자신도 생생한 현실 대 가상ㆍ환영의 대립, 삶과 죽음의 대립을 신뢰했고 이러한 대립 위에 자신의 이론을 세우고 또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유령이 아니라 “당 자체의 선언”이자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는 과거의 정치혁명과 오늘날의 “사회혁명”을 대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야말로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 가상, 환영과 결별하는 참된 현실의 운동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

 

하지만 정말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는 모든 가상과 환영, 유령과 결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모든 유령, 망령과 결말을 볼 수 있었을까요? 데리다는 󰡔독일 이데올로기󰡕 2부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와 슈티르너의 논쟁 및 󰡔자본󰡕 1권 서두에 나오는 사용가치와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검토하면서, 마르크스가 결코 유령의 논리, 신들림의 논리(이는 또한 차이(差移)différance의 논리입니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과의 단절을 (부당하게)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마르크스의 유령들󰡕 5장)

 

마르크스와 슈티르너가 공유하는 것은 환영적인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망령과 결말을 짓고 싶어 합니다. 양자는 모두 고유한 신체 속에서 생명을 재전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슈티르너가, 대상화된 환영들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자아(Ich) 속으로 다시 들여오고, 이로써 환영들을 현실적인 것으로 재전유하려고 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아 중심적 신체를 고발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 실천적 관계와 분리된 자아는, 슈티르너가 생각하듯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환영, 모든 가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자아를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상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슈티르너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네가 이러한 환영들을 쫓아 버리고 싶다면, 내 말을 믿어 보게나. 자아론적인 전회나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는, 또는 괄호를 치는 것이나 현상학적 환원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실천적으로, 현실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네. 우리는 노동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네. 노동은 꼭 필요하며, 현실을 실천적인 현실성으로서 고려해야 한다네.”(󰡔마르크스의 유령들󰡕, 254~55쪽)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에게, 유령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것으로서 자아, 유일자의 신체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노동 및 사회적인 실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묻습니다. 자아 또는 구체적인 개인이 그 내면에서부터 이미 유령에 신들려 있다면, 유령에서 벗어나 있는 실천이나 노동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유령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질서 또는 상상적 관계와 분리된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이나 실천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자본󰡕 1권의 서두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문제제기는 계속 됩니다. 마르크스는 놀라운 통찰력과 수사법으로, 평범한 나무탁자가 어떻게 교환의 과정 속에 진입함으로써 “감각적 초감각적 사물”, 곧 상품이 되는지, 따라서 마치 유령처럼 변모하는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목재로 탁자를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자는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탁자가 상품으로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그것은 초감각적인 사물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을 마주보고 머리로 거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탁자의 이 나무 머리는, 탁자가 자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이한 망상들을 빚어낸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자본론 제 1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 90쪽. 번역은 수정)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치 교환가치를 갖기 이전의 사용가치, 상품이 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평범한 나무탁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또한 마치 상품들의 관계를 둘러싼 몽롱한 물신숭배의 세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곧 공산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없는, 물신숭배 없는, 따라서 환영이나 유령이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따라서 상품세계의 신비 전체, 곧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획득된 노동생산물을 환영 같은 몽롱함으로 둘러싸고 있는 마술은 우리가 다른 생산형태들로 피신하자마자 사라져버린다.”(󰡔자본론 제 1권󰡕(상), 96쪽. 번역은 수정)

 

그러나 데리다는 평범한 나무탁자에는 항상 이미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기입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이미 상품들의 사회적 관계, 따라서 유령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상품 이전의, 교환 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 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4. 메시아적인 것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모든 유령과 결별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체의 망령이나 유령, 환영과 단절하는 것은 해방의 운동과 이론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가? 어쨌든 유령이나 환영, 망령은 우리가 어떻게든 몰아내야만 하는 일종의 악을 가리키는 것일까? 데리다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데리다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말과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검토하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데리다는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해석에서 주장하듯이, 햄릿의 말을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른 복수의 다짐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존재론 또는 정의의 유령론의 심오한 울림으로 파악합니다.

 

데리다에게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음은, 어떤 불순한 시대 상황을 의미하거나 시간의 질서의 일시적인 일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 안에는, 따라서 현존으로서 존재의 질서 안에는 근원적인 탈구와 이접, 간극이 존재함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탈구와 이접, 간극은 존재자들 및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숙명ㆍ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를 나타냅니다. 현재들의 시간적인 연속, 곧 과거 현재에서 지금 현재로, 또 지금 현재에서 미래 현재로 나아가는 연대기적인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은 계산 가능성의 질서이이면서 또한 인과적인 응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법, 분배의 계산, 복수 또는 징벌의 경제”입니다. 따라서 근원적인 어긋남이나 간극은 이러한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이 나타내는 계산 가능성과 응보의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법적인 처벌과 보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은,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의 질서를 사회적 순응주의의 뿌리이자 파시즘적인 지배의 근거로 파악하는 발터 벤야민의 통찰과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 그 자신 사이에는 유사성 못지않게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와 아들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진태원ㆍ한형식 옮김, 길, 2009 참조)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否認, dénégation)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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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탈구축으로 말을 바꿔 타셨군요. 일본에서는 이미 예전에 그 번역어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고 제목을 정하셨나요.

최근 들어 바뀌신 겁니까?

balmas 2013-03-30 01:25   좋아요 0 | URL
예 최근 들어서 탈구축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후하후하 2017-01-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가님 글이 이해하기 좋아서 그러는데 대학교 수업시간에 해체론을 발표하는데 발제문에 내용을 넣어도 될까요?

balmas 2017-01-16 00:50   좋아요 0 | URL
예 그럼요, 인용하셔도 됩니다.^^ 이 글이 수록된 책의 출전은 다음과 같으니, 인용하실 때 참고하세요.

철학아카데미 편,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출판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