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동녘출판사에서 나올 [프랑스현대철학]에 수록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이 책은 작년 가을 철학아카데미에서 있었던 "현대프랑스철학 특강" 원고들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저는 데리다 편을 맡아서 강의를 했고, 강의 원고로 준비했던 글을 좀 다듬어서 책의 원고로

 

만들어봤습니다.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가급적 쉽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이 글이 수록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아카데미 편,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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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축, 차이, 유령론: 세 개의 키워드로 읽는 데리다

 

 

I. 들어가는 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저작을 남긴 철학자입니다. 생전에 80여권에 달하는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과 인터뷰를 남겼으며, 사후에도 수십 권에 달하는 강의록이 기획ㆍ편집되어 출간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사상을 짧은 글 한 편에서 요약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포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더욱이 데리다의 대부분의 저작은 플라톤, 데카르트, 루소, 헤겔, 후설,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아르토, 블랑쇼 같은 철학자나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아주 꼼꼼한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데리다 사상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 꼼꼼한 분석의 과정을 따라가 봐야 합니다. 그러니 데리다 사상을 짧은 글에 요약하는 일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는 데리다를 요약하거나 그의 분석을 하나하나 따라 가는 대신, 국내에 널리 소개돼 있는, 하지만 제대로 이해되거나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데리다 사상의 일면을 엿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데리다는 다작의 작가이면서 또한 수많은 개념을 만들어낸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들어낸 개념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I. 해체 또는 탈구축

 

우선 ‘해체’라는 개념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해체라는 개념은 포스트 담론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입니다. 그래서 근대의 해체나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민족의 해체, 국민국가의 해체, 국사의 해체 같은 말을 흔히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의 역사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듯이, 어떤 용어가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 용어가 정확히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광범위한 사용 자체가 원래의 용어가 지닌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왜곡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지닌 개념적 강점과 잠재력을 손상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해체는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잘 예시하는 개념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해체’라는 번역어 자체가 프랑스어 원어가 가진 의미를 상당히 왜곡하거나 적어도 축소하고 있습니다.

 

1. 해체라는 용어의 기원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해체라는 말은 자크 데리다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데리다가 자기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고안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널리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독일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의 데스트뤽치온(Destruktion)이나 압바우(Abbau)라는 개념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말입니다(“일본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à un ami japonais), in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Galilée, 1987 참조). 하이데거가 서양의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파괴하거나 철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체화되고 경직된, 따라서 존재의 사건을 은폐하게 된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를 회복하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데리다가 데콩스트뤽시옹(déconstruction)이라는 프랑스어를 Destruktion이나 Abbau라는 개념의 번역어로 제안하고 그것을 자기 나름의 철학적 목적을 위해 실천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단순히 서양의 형이상학을 파괴한다거나 철폐한다는 것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해체의 일반 전략

 

그렇다면 데리다가 ‘데콩스트뤽시옹’ 또는 ‘해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시도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데리다가 “해체의 일반 전략”(󰡔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1991, 64쪽)이라고 부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 전략은 먼저 전복의 단계를 거칩니다. 이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대립 구도가 폭력적 위계 질서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원적인 대립쌍(예컨대 음성 대 문자기록, 현존 대 부재, 이성 대 감성 등)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질서는 평화로운 공존의 질서가 아니라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질서죠. 따라서 형이상학의 해체는 우선 이러한 위계적 질서를 전복시키고 다른 항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되어왔던 항의 권리를 복권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 데리다 작업의 주요 주제였던 문자기록(écriture)(이 개념은 보통 ‘글쓰기’라고 번역되지만,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죠.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 중에는 신뢰할 만한 판본이 없습니다)나 󰡔문자기록과 차이󰡕(Écriture et la différence, Seuil, 1967. 국역본에서는 󰡔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돼 있습니다) 같은 책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플라톤에서부터 루소를 거쳐 후설,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는 문자기록을 폄하하고 음성이나 말을 중시하는 태도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곧 이 사상가들은 모두 진리 내지 로고스(logos)는 말 속에서, 생생한 대화 속에서만 표현될 수 있으며, 문자기록은 진리와 거의 관계가 없는 단순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아주 위험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문자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생생한 대화 및 기억 능력을 퇴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데리다가 초기 작업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처럼 진리 내지 로고스와의 관계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문자기록이 사실은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럼에도 왜 문자기록이 이러한 조건의 지위에서 배제되고 또 억압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구조적ㆍ역사적 필연성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해체 작업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음성에 대해, 로고스에 대해 문자기록이 우월하다는 점일까요? 데리다는 기존의 위계적 지배 질서를 전복시켜 그 중 열등한 위치에 있던 것을 새로운 지배항으로 구성하는 것은 여전히 기존 질서를 되풀이하고 재생산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해체의 일반 전략은 단순히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입장들󰡕, 66쪽), 지배 질서의 “긍정적 전위(轉位)”(󰡔입장들󰡕, 93쪽)를 시도하고, 위계 구조 자체의 해체를 시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의 해체란, 가령 문자기록을 음성에 대해 우월한 것으로 확립하거나 서양의 알파벳 같은 표음문자에 대해 표의문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 요컨대 “음성 중심주의”를 대체하는 “기록 중심주의”(graphocentrisme)(󰡔입장들󰡕, 35쪽)을 주창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ㆍ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ㆍ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드러내려고 시도합니다.

 

실제로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좁은 의미의 문자기록, 곧 알파벳 문자기록 대신 새로운 문자기록 개념을 제안합니다. 그가 원(原)기록(archi-écriture)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통적인 문자기록은 생생한 말을 ‘représenter’(이 말이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일단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하는 것을 목표로 하죠. 가령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였던 콩디약(Condillac)은 문자기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소리로 의사소통을 할 줄 알게 된 사람들이 부재하는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호의 필요성을 느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문자기록이다.”(J. Derrida, Marges 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p. 371) 이 경우 문자기록은 가능한 한 원래의 메시지, 곧 생생한 말을 있는 그대로 잘 ‘재현하고 표상하고 대신하는 것’(이것은 모두 représenter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들입니다)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죠. 좀더 철학적인 어법으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기록은 생생한 말, 로고스 같이 이미 현존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잘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언어를 사물 내지 세계를 재현하거나 표상하는 매체로 간주한 전통적인 언어관과 일맥상통합니다.

 

데리다가 볼 때 소쉬르 구조언어학의 중요성은 이런 언어관을 해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 개념 덕분에 이제 언어를, 이미 현존하는 것(신의 말씀이나 자연적 사물 또는 정신 안의 관념 등과 같은 것)을 ‘재현하고 표상하고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죠.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자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 이전에는 세계 그 자체, 자연 그 자체에도 역시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역설적이게도 소쉬르는 음성만이 자연적이거나 본래적인 기표이며 문자기록은 음성 기표에 대한 부차적이고 외재적인 도구라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음성 중심주의 및 로고스중심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De la grammatologie, 1부 2장, 「언어학과 그라마톨로지」 참조).

 

따라서 데리다가 ‘원기록’이라는 새로운 기록 개념을 제안하는 것은 소쉬르의 언어학 혁명에 담긴 함의(전통적인 언어관을 전복하는 ‘차이의 체계’로서 언어)를 급진화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놓기 위함입니다. 원기록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종래의 문자기록 개념이 전제하는 바와 같은 재현 관계, 곧 이미 현존하는 사물과, 언어나 기호 또는 기록 사이의 일치나 상응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호 내지 언어가 차이의 체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앞서 있는 그대로 현존한다고 간주된 세계 내지 자연 또는 ‘현실’ 역시 차이 작용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원초적인 기원 및 궁극적인 목적/종말 같은 것들과 더불어 주체 역시 차이의 작용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현존과 동일성은 차이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이의 작용에서 산출된 것이며, 그 내부에 차이와 타자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기원은 항상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타자의 흔적이며, 현존은 흔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기록은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差延, différance)(이 개념의 번역 문제는 2절에서 다뤄보겠습니다)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3. 스스로 일어나는 것으로서의 해체

 

데리다는 해체가 분석도 비판도 방법도 아니라고 합니다. 해체가 분석이 아닌 이유는, 분석은 항상 더 이상 분해 불가능한 최소의 궁극적인 단위, 따라서 해체 불가능한 기원으로의 소급을 전제하는 데 반해, 해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들은 모두 해체되어야 할 철학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해체는 일종의 비판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해체가 비판과 다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비판은 어떤 이론이나 담론 또는 체계의 문제점이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이해된 비판은 비판의 대상에 대해 외재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다르죠. 데리다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지 않으며, ‘해체의 주체’가 해체할 대상에 대해 외부에서 수행하는 ‘조작’(opétation)이 아닙니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는 “Ça se déconstruit”(Psyché: Inventions de l'autre, p. 390)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그것이 자신을 해체한다” 내지 “그것은 해체된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죠).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또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듯)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발전시키고 전위시키는 일은 해체의 대상 바깥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여하고 있고 그 일부를 이루는 이들의 일입니다.

 

따라서 해체가 해체의 대상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임의적인 조작이나 비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우 꼼꼼하고 정교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독서는 “텍스트에 내재적이어야 하고 텍스트 안에 머물러야”(De la grammatologie, p. 228) 하며,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작가가 ... 역사와의 교환 속에서 수립하는 의식적, 자발적, 지향적 관계”(같은 책, p. 227)를 재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해체가 단순히 저자의 의도,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충실한 해석에 머문다면, 당연히 그것은 주석일 수는 있어도 해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텍스트의 논리, 텍스트의 작용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텍스트 내부에서 텍스트의 바깥을 발견할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제 독해에서 저는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 독서를 시도합니다 ... 외부에서 텍스트를 지휘하려고 했던 것을 텍스트 속에 폭력적으로 기입함으로써, 자신이 은폐하는 것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말소 작용이 표시돼 있는 몇몇 결정적인 장소들에서, 저는 이러한 이중적 작용을 통해, 이러한 철학소들(philosophèmes) 내지 인식소들(épistémèmes)의 내적이고 규칙적인 작용을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존중함으로써 그것들이―그것들을 부당하게 취급하지 않으면서도―자신들의 관여성을 상실하고 소진되고 [일정한 한계 내로] 갇히는 지점까지 점차 넘어가게 하려고 시도합니다.”(Positions, Minuit, 1972, p. 14~15; 󰡔입장들󰡕, 28~29쪽. 번역은 다소 수정) 곧 데리다가 수행하는 이중독법은 전통적인 텍스트 주해나 비평의 규칙과 절차들을 가능한 한 가장 엄밀하게 준수함으로써 텍스트의 논리, 텍스트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텍스트가 감추면서도 드러내는 텍스트의 한계 지점, 텍스트의 은밀한 균열이나 모순 또는 “맹목점”(De la grammatologie, p. 234)을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독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텍스트에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4. 해체 또는 탈구축

 

이렇게 본다면 déconstruction이라는 개념은 ‘해체’로 옮기기보다는 ‘탈구축’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해체라는 말이 무너뜨리고 철거하고 더 나아가 제거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데리다가 말하는 déconstruction은 ‘해체의 일반 전략’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상당히 적극적인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déconstruction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지배 질서를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서,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 곧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지 않으려는 운동으로서의 탈-구축의 운동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해체’라는 말이 이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정착되어온 만큼 이 번역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탈구축의 운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III. 차연 또는 차이

 

1. 차연은 디페랑스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을 “개념들을 창조하는” 학문으로 규정했죠. “철학자는 개념의 친구이며 개념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개념들을 형성하거나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술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개념들은 반드시 형태들, 고안물들 또는 생산물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은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념들을 창조하는(créer) 분과학문이다. ... 항상 새로운 개념들을 창출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대상이다.”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p. 8~10. 강조는 들뢰즈ㆍ가타리)

 

사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개념들을 통해 사고하고 작업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죠.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기존에 널리 쓰이던 개념을 가져와서 그것을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새롭게 개조하거나 변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나 칸트의 경우가 그렇죠. 특히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철학자들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유독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낸 철학자입니다. 가령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e), 갈등 구조(stricture), 탈전유(exappropriation), 유령론(hantologie) 등이 그렇습니다.

 

이 중에서 디페랑스(différance)는 데리다의 개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입니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디페랑스의 어근이 되는 différer라는 불어 동사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의 ‘차’라는 음절과 지연의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입니다. 이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주는 장점을 갖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합니다(한편 데리다 저작의 영역본에서는 différance라는 불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꽤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과연 이것이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어의 문제는 디페랑스 개념에 대한 이해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데리다 철학에 대한 좀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이러한 문제제기는 필요합니다.

 

2. 차연이라는 번역어의 세 가지 문제점

 

1) e와 a의 차이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것은 영어의 difference와 마찬가지로 ‘차이’를 의미합니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으며(두 단어는 불어에서 모두 ‘디페랑스’라고 발음됩니다), 따라서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는 서양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기초를 둔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페랑스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의는 ‘차이’를 뜻하는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음성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지닌 모순의 근원에는 문자기록에 대한 불신과 폄하의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발견함으로써 언어학을 자율적인 학문으로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기호와 사물 사이의 관계 또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며, 기호 체계가 사물들의 세계, 또는 사물들에 대한 재현으로서 의미의 세계와 직접적인 (곧 대응적ㆍ모사적인) 관계없는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문자기록의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을 밝혀냄으로써 음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도구로 간주하고 음성을 유일하게 자연적인 기표라고 주장함으로써(소쉬르에게 기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기록된 글자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전히 음성중심주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이 음성적으로는 식별 불가능하고 문자기록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는 점은 특히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2) 기원의 탈구축

 

또한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마치 디페랑스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디페랑스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발표한 「디페랑스」(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디페랑스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입니다)에서 디페랑스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다(󰡔철학의 여백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에 수록).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데리다는 소쉬르를 좇아 기호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이나 가치를 갖지 않고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는다는 점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데리다는 음성상의 차이가 문자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근거 짓는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줍니다.

 

둘째,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디페랑스’에 관해 말함으로써 디페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 개념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러 있다면, 디페랑스는 모든 차이는 ‘지연’의 작용인 ‘시간 내기’(temporiser)와, ‘차이’의 작용인 ‘공간 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시간 내기’의 쉬운 사례는 가령 전기밥솥 타이머의 작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이머는 밤 12시에 이루어질 작용을 아침 6시까지 지연하는 작용을 하죠. 또한 ‘공간 내기’의 한 사례는 컴퓨터의 스페이스바의 작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스페이스바는 간격을 띄우는 기능을 하는데, 데리다가 볼 때 로고스, 곧 의미의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들 사이의 결합,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배치 및 기술적 간격 두기가 필수적입니다.)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최초가 최초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기록 안에 기입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디페랑스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조합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데리다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원의 탈구축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항상 기원의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디페랑스의 의미 효과를 너무 좁게 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낯설게 하기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디페랑스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과 학문,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곧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철자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냅니다.

 

“이[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J. Derrida, Marges-de la philosophie, 앞의 책, p. 1)

 

데리다의 말은 「디페랑스」라는 강연이 이루어지기 한 해 전인 1967년 출간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나 󰡔목소리와 현상󰡕 같은 저작에서 아무런 설명이나 주의 없이 디페랑스라는 단어가 마치 그것이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단어인 것처럼 태연하게 사용되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데리다의 글에 교정 표시를 하던 편집부 직원들을 상상해볼 수 있겠죠). 이는 디페랑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리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면서 의도했던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3. 차연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대안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죠.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교수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디페랑스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필자 자신은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가 공동으로 지은 󰡔에코그라피󰡕를 번역하면서 ‘차’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대하여󰡕,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이러한 번역은 데리다의 디페랑스라는 개념이 지닌 기록학적인 측면을 존중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 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이러한 대안적인 번역어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은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차이(差移)’라는 용어인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이것은 디페랑스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라는 역어와 달리 디페랑스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디페랑스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차이(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디페랑스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차이(差移)’라는 역어 역시 디페랑스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차이(差移)’는 기존에 제시된 번역어들 중에서 디페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충실한 번역어로 볼 수 있습니다.

 

 

IV. 유령론

 

우리는 흔히 어떤 사상가에 대해 초기와 후기라는 시기 구분법을 사용합니다. 예컨대 청년 마르크스가 있다면 또한 노년 마르크스가 있고, 초기 프로이트와 후기 프로이트는 다르다는 식이죠. 데리다 사상에 관해서도 자주 이런 식의 구분법이 적용됩니다. 여기에 따르면 1960~70년대의 초기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에 주력했으며, 언어, 기호, 문자기록, 텍스트, 은유 같은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정치와 윤리, 법, 이주, 폭력, 마르크스주의 같은 실천적인 문제들에 집중하여, 󰡔법의 힘󰡕(1994),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우정의 정치󰡕(1994), 󰡔불량배들󰡕(2003) 같은 정치철학 저서들을 출간했습니다.

 

이런 식의 구분법이 지닌 문제점은, 마치 초기 데리다 저작에는 정치나 윤리, 법이나 폭력에 관한 논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다가 후기 저작들에서 갑자기 전면에 등장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데리다 자신을 비롯하여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초기 데리다 저작에서도 정치와 윤리, 폭력에 관한 논의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초기 저작에서 제시된 문자기록이나 기입, 차이(差移) 같은 개념은 데리다 정치철학의 주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1. 유령론의 스캔들

 

그렇다고 해도 ‘유령론’(hantologie)을 필두로 한 데리다 정치철학은 초기 작업에 비하면 상당히 색다른 것이 사실이죠. 데리다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출간하면서 우리는 모두 마르크스의 후예들이고,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의 유산을 상속해야 할 의무가 존재한다고 선언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1992)이라는 책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몰락했으며 자유 자본주의 사회가 궁극적으로 승리했다고 선언한지 1년 만에 출간된 데리다의 이 책은 데리다 정치철학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범상치 않습니다. 우선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책에 ‘유령’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을뿐더러, 시종일관 유령, 망령, 환영, 허깨비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자못 충격적입니다. 데리다 이전에 과연 누가 유령을 주제로 마르크스에 관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한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유령이나 망령, 환영 따위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하찮고 부차적인 주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정말 대담하게도 자신의 저서에 유령들이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산당 선언󰡕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같은 저작, 특히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본󰡕 같은 핵심적인 이론적 저작에서 유령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우 사소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주제나 개념 또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이런저런 사상 체계를 분석하는 것은 데리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분석하면서 기의나 기표 같은 중심 개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기록’이라는 매우 하찮은 단어에 착목하여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중심주의가 소쉬르에게서 나타난다는 점을 입증합니다. 또한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 나오는, 역시 하찮기 짝이 없는 ‘쉬플레망’(supplément)(대개 ‘보충’을 의미하지만 데리다 용어법에서는 ‘대체 보충’을 뜻합니다)이라는 단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루소에게도 음성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원초적인 기원이란 사실은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을 밝혀냅니다.

 

따라서 데리다가 유령이라는 하찮은 단어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독해하는 것은 오히려 매우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중심에서, 아니 첫머리에서부터 ‘유령들’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것이라면, 이는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단수인 ‘유령’이 아니라 복수인 ‘유령들’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필요했을까요? 또 이런 복수형의 제목이 어떤 의미에서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2. 마르크스라는 유령

 

단순히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된 제목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유령이나 환영, 망령, 허깨비라는 주제가 양가적인 주제였음을 시사합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기회로 삼아 사람들이 무력화시키고 또 몰아내고자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가리킵니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전개되어 왔고, 특히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래 현실적인 정체(政體)로 존재해왔던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몰락을 통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체제로, 역사의 유물로 사라졌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만이, 자본주의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체제로 살아남아 영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그 환영마저 모두 몰아내자. 이 허깨비를 사라지게 하자.”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유령이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인 한에서, 유령은 결코 소멸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일견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사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새로운 세계 질서’(요즘 표현대로 하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겠죠)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10가지 재앙”(실업, 빈곤, 망명 및 이주, 경제전쟁, 자유 시장의 모순, 민족 간 전쟁, 외채 등)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대한 상속이 필수적입니다.(󰡔마르크스의 유령들󰡕 3장 참조)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이론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해방의 운동이라는 이유에서도 유령처럼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법적인 공정함의 질서 바깥에서, 자본주의적인 시장 질서의 모순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타자들의 고통의 호소가 울려 퍼지는 한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와 해방의 운동은 사라지지 않으며, 지난 100여 년 간 해방 운동의 대명사로 존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역시 끊임없이 자유주의의 공모자들에게 악몽처럼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유들이 결국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을 시사해준다고 봅니다. 당ㆍ국가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사라졌고 또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이러저러한 측면들 역시 한계에 봉착했음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주의의 유령의 명령들이 우리의 상속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는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해방의 운동과 이론으로 고취시킨 메시아적인 것의 차원이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살아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노동의 존재론, 생생한 현재의 존재론을 넘어서는 유령론의 문제설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령론은 존재론을 대체하는 좀더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이론이기 이전에 타자들의 부름 및 호소에 대한 책임의 윤리ㆍ정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제목이 갖는 한 가지 의미는 마르크스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서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우리들에게 부르짖는 호소에 귀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을 상속하고 따라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인상적이고 야심적이며 필수적인 또는 모험적인 [...] 이 콜로퀴엄의 기조 강연을 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가 지닌 능력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른트 매그너스가 영광스럽게도 제안한 초대를 수락한 것은,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책임의 본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여러분의 토론에 부치기 위해서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책임이 역사적인가?”(󰡔마르크스의 유령들󰡕, 116~17쪽)

 

3. 마르크스의 유령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은 마르크스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유령들, 또 마르크스 자신이 계속 몰아내려고 했던, 하지만 결국 완전히 몰아내는 데,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었던 유령들을 가리킵니다. 왜 그는 유령들을 몰아내려고 했을까요? 또 왜 그는 그것들을 쫒아내는 데, 푸닥거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데리다에 따르면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몰아내려고 했던 그의 적수들(󰡔공산당 선언󰡕이 말하는 ‘낡은 유럽의 열강들’이자 오늘날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자신도 생생한 현실 대 가상ㆍ환영의 대립, 삶과 죽음의 대립을 신뢰했고 이러한 대립 위에 자신의 이론을 세우고 또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이제 공산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유령이 아니라 “당 자체의 선언”이자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는 과거의 정치혁명과 오늘날의 “사회혁명”을 대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야말로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 가상, 환영과 결별하는 참된 현실의 운동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

 

하지만 정말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는 모든 가상과 환영, 유령과 결별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모든 유령, 망령과 결말을 볼 수 있었을까요? 데리다는 󰡔독일 이데올로기󰡕 2부에서 전개되는 마르크스와 슈티르너의 논쟁 및 󰡔자본󰡕 1권 서두에 나오는 사용가치와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검토하면서, 마르크스가 결코 유령의 논리, 신들림의 논리(이는 또한 차이(差移)différance의 논리입니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과의 단절을 (부당하게)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마르크스의 유령들󰡕 5장)

 

마르크스와 슈티르너가 공유하는 것은 환영적인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망령과 결말을 짓고 싶어 합니다. 양자는 모두 고유한 신체 속에서 생명을 재전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슈티르너가, 대상화된 환영들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자아(Ich) 속으로 다시 들여오고, 이로써 환영들을 현실적인 것으로 재전유하려고 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아 중심적 신체를 고발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 실천적 관계와 분리된 자아는, 슈티르너가 생각하듯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환영, 모든 가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자아를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상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슈티르너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네가 이러한 환영들을 쫓아 버리고 싶다면, 내 말을 믿어 보게나. 자아론적인 전회나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는, 또는 괄호를 치는 것이나 현상학적 환원으로는 충분치 않네. 우리는 실천적으로, 현실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네. 우리는 노동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네. 노동은 꼭 필요하며, 현실을 실천적인 현실성으로서 고려해야 한다네.”(󰡔마르크스의 유령들󰡕, 254~55쪽)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에게, 유령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구체적인 것으로서 자아, 유일자의 신체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노동 및 사회적인 실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묻습니다. 자아 또는 구체적인 개인이 그 내면에서부터 이미 유령에 신들려 있다면, 유령에서 벗어나 있는 실천이나 노동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유령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질서 또는 상상적 관계와 분리된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이나 실천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자본󰡕 1권의 서두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문제제기는 계속 됩니다. 마르크스는 놀라운 통찰력과 수사법으로, 평범한 나무탁자가 어떻게 교환의 과정 속에 진입함으로써 “감각적 초감각적 사물”, 곧 상품이 되는지, 따라서 마치 유령처럼 변모하는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목재로 탁자를 만들면 목재의 형태는 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자는 여전히 목재이고 보통의 감각적인 물건이다. 그러나 탁자가 상품으로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그것은 초감각적인 사물로 전환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발로 땅을 딛고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을 마주보고 머리로 거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탁자의 이 나무 머리는, 탁자가 자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이한 망상들을 빚어낸다. 그러므로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자본론 제 1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 90쪽. 번역은 수정)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치 교환가치를 갖기 이전의 사용가치, 상품이 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평범한 나무탁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또한 마치 상품들의 관계를 둘러싼 몽롱한 물신숭배의 세계는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곧 공산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것처럼, 이데올로기 없는, 물신숭배 없는, 따라서 환영이나 유령이 없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따라서 상품세계의 신비 전체, 곧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획득된 노동생산물을 환영 같은 몽롱함으로 둘러싸고 있는 마술은 우리가 다른 생산형태들로 피신하자마자 사라져버린다.”(󰡔자본론 제 1권󰡕(상), 96쪽. 번역은 수정)

 

그러나 데리다는 평범한 나무탁자에는 항상 이미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기입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이미 상품들의 사회적 관계, 따라서 유령들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상품 이전의, 교환 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 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4. 메시아적인 것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모든 유령과 결별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체의 망령이나 유령, 환영과 단절하는 것은 해방의 운동과 이론을 위해 필수적인 것인가? 어쨌든 유령이나 환영, 망령은 우리가 어떻게든 몰아내야만 하는 일종의 악을 가리키는 것일까? 데리다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데리다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말과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검토하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데리다는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해석에서 주장하듯이, 햄릿의 말을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른 복수의 다짐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존재론 또는 정의의 유령론의 심오한 울림으로 파악합니다.

 

데리다에게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음은, 어떤 불순한 시대 상황을 의미하거나 시간의 질서의 일시적인 일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 안에는, 따라서 현존으로서 존재의 질서 안에는 근원적인 탈구와 이접, 간극이 존재함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탈구와 이접, 간극은 존재자들 및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숙명ㆍ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를 나타냅니다. 현재들의 시간적인 연속, 곧 과거 현재에서 지금 현재로, 또 지금 현재에서 미래 현재로 나아가는 연대기적인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은 계산 가능성의 질서이이면서 또한 인과적인 응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법, 분배의 계산, 복수 또는 징벌의 경제”입니다. 따라서 근원적인 어긋남이나 간극은 이러한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이 나타내는 계산 가능성과 응보의 질서에 균열을 냄으로써, 법적인 처벌과 보상의 논리를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은,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의 질서를 사회적 순응주의의 뿌리이자 파시즘적인 지배의 근거로 파악하는 발터 벤야민의 통찰과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 그 자신 사이에는 유사성 못지않게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와 아들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진태원ㆍ한형식 옮김, 길, 2009 참조)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否認, dénégation)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쟁점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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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탈구축으로 말을 바꿔 타셨군요. 일본에서는 이미 예전에 그 번역어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고 제목을 정하셨나요.

최근 들어 바뀌신 겁니까?

balmas 2013-03-30 01:25   좋아요 0 | URL
예 최근 들어서 탈구축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후하후하 2017-01-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가님 글이 이해하기 좋아서 그러는데 대학교 수업시간에 해체론을 발표하는데 발제문에 내용을 넣어도 될까요?

balmas 2017-01-16 00:50   좋아요 0 | URL
예 그럼요, 인용하셔도 됩니다.^^ 이 글이 수록된 책의 출전은 다음과 같으니, 인용하실 때 참고하세요.

철학아카데미 편,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동녘출판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