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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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의 천사-멘붕의 정치학, 유령들, 메시아주의
역사의 천사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유언이라 불리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또는 「역사철학테제」라 불리기도 한다) 중 9번째 테제는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인 「새로운 천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39쪽)
이제 클레의 그림은 벤야민의 테제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그 그림을 보면 벤야민을 떠올리게 되고, 벤야민을 생각하면 또 그 그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나는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이견을 지니고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정세를 겪으면서 그의 테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라고 불리는 폭풍 앞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파국을 막아보려고 하는 역사의 천사, 하지만 그럴수록 발 앞에 쉼 없이 잔해가 쌓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역사의 천사를 생각하게 된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반동 세력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8번째 테제. 앞의 책, 337쪽)이라고 말한다. 곧 파시즘의 적이 파시즘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싸움을 벌이는 한, 언제나 승리자는 파시즘, 반동 세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성격이 무엇인지, 거기에서 승리와 패배를 규정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숙고하려는 사람이라면 한번 곱씹어볼 만한 테제다.
어떤 멘붕
‘멘붕’이라는 용어는 이제 은어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공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이 말이 일간신문에까지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알다시피 ‘멘탈 붕괴’의 줄임말인 멘붕은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거나 심하게 좌절감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넘어 멘붕이 사회적 공용어가 되게 해준 계기는 아마도 지난 18대 대선이었을 것이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부터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대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내가 이런저런 사석에서 만나본 사람들도 대개 이번 선거에서는 야권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물론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늘 앞서 나갔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숨은 야권표가 10%는 될 것이며, 주로 집전화로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는 핸드폰 사용자인 젊은이들이 빠져서 신빙성이 없다고, 야당 후보는 늘 바람을 통해 막판에 뒤집기 마련이라고, SNS 상에서는 게임도 되지 않는 상태라고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더욱이 선거 당일날 투표율은 이미 오전부터 최근 선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게 나타났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선거의 공식인 만큼 이러한 예상은 점점 현실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이런 낙관적인 기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여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지상파 방송 3사의 합동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일차적인 실망감이 터져 나왔으나, 그래도 출구조사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우니 끝까지 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들이 SNS와 인터넷 댓글에 속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초조한 인내심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거일이 지나가기 전 여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이라는 자막이 지상파 방송에 떴고, 그것으로 결과는 끝이었다.
‘멘붕’의 고통을 호소하는 트위터와 댓글이 순식간에 온라인을 뒤덮었다. 그리고 놀라운 결속력으로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결국 당선시킨 50~60대 여당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저조했던 20대 젊은이들에 대한 비아냥과 불평의 글들이 넘쳐 났다. 야권 후보를 지지하고 그가 당선되기를 목놓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나긴,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필자가 1987년 겨울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탔던 지하철 풍경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놀랍게도 지하철은 적막 그 자체였다. 역의 이름을 알리는 안내방송 말고는 열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초췌하고 피곤한 눈길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선 채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웃음소리도 불평 소리도 사소한 다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집단적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그날의 적막한 고요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대선에서 사람들이 겪었다고 하는 ‘멘붕’은, 야박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이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거의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주변의 지인들이 선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낙관에 들떴을 때도 냉담한 기분이었고, 참담한 결과에 고통스러워할 때도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번 선거의 승리와 패배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승리했느냐 패배했느냐보다는 어떤 승리이고 어떤 패배인가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그렇다.
유령들의 싸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들의 싸움이었다. 여당 후보로 육화된 박정희의 유령과 야당 쪽에서 불러내려고 애쓴 노무현이라는 유령이 싸움을 벌인 선거였다. 노무현이라는 유령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박정희의 유령의 위력이 여전히 거대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망령의 위험을 경고하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대표하는 노무현의 유령은 경제발전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망령을 당해내지 못했다.
사실 노무현은 경제발전이라는 망령과 맞서 싸우기에는 상당히 허약한 유령이다. 그가 5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수행했던 통치는 그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유령으로 불러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대단히 민주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권력 분립을 위해, 지방 자치를 위해, 남북 관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노동자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재갈을 물렸고, 재벌의 권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고, 황우석을 위해 피디수첩을 공격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는가와 별개로, 그는 민주화의 유령,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박정희는, ‘진보’ 역사학자들 및 언론 매체의 지속적인 비판과 축귀(逐鬼)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유령이라는 점이, 그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왜 박정희의 유령이 그토록 강력한 것일까? 이미 사망한지 3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박정희 집권 당시에 이룩된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사람들의 삶이 팍팍할수록, 돈벌이가 잘 되고 취직 걱정이 없고 나날이 살림살이가 좋아져 간다고 느끼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5년 전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도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면서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던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과연 ‘그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들과 대립하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우리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 바람, 다른 향수를 갖고 있었을까? ‘그들’과 ‘우리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경제 발전 대 민주화가 아니라, 사실은 경제 발전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동일한 경제 발전에 대한 욕망을, 한 쪽은 좀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반면, 다른 한 편은 ‘민주화’라는 어색한 수사법으로 애써 둘러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메시아주의
사실 노무현이 박정희의 유령에 맞서기에는 불안하고 역부족인 유령이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노무현도, 문재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안철수라는 새로운 메시아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노무현이 생각지도 않게 2002년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또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던 여론조사를 뒤집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올랐던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극적으로 자신들의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링에 올라보기도 전에 밀려났고, 어쩌면 그것으로 18대 대선이라는 유령들의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안철수에게서, 또는 그 뒤에는 마지못해 문재인에게 기대했던 희망과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것,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발전의 기적을 순조롭게 지속해가되 거기에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들이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복지국가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잠식하며 시장(또는 자본)의 명령에 순종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란 사실은 사회의 약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복지국가일까? 그리고 그러한 복지국가는 박정희의 유령을 내세운 이들도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선거 결과에 멘붕을 했던 이들은 무엇 때문에 멘붕을 한 것일까? 그리고 멘붕을 한 이들은 어떤 계급의 사람들일까?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여러 노동자가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불과 며칠 사이에 연이어 자살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선거 결과를 기다렸을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기대했던 그 메시아는, 과연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가치가 있는 메시아였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진보가 있을까 질문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거 직전 한겨레 신문이 좌파 메시아주의의 아이콘 중 한 사람인 알랭 바디우를 동원해 야당 후보를 지원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통해 고통스럽게 말했듯이, 적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