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기다렸던 책.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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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미도는 누구인가

이미도

영화 번역에 관한 한 국내 1인자.
공군장교 출신에 주민등록번호 1자로 시작하는 엄연한 남자인데 이름 가운데 아름다울 ‘美’자가 있다는 이유로 여자로 오인되곤 한다.
좌우명은 영화인답게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의 명언.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라)”.
영화와 골프, 등산으로 현재를 즐기느라 아직 미혼

외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막 끝난 극장에 앉아 마지막 여운을 감상하고 있을 즈음, ‘번역 이미도’라는 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가운데 부각된 이 마지막 자막은 대개 화면에 떠오른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지만 번역가 이미도란 이름은 우리에게 퍽 친숙하다. 그건 이름만 대면 알만한 블록버스터를 포함해서 통상 1년에 40여편 이상을 번역하는 그의 왕성한 작업량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한두 편씩 수입된 애니메이션은 전부 그가 번역했다. 가장 최근의 「글래디에이터」를 비롯하여 「아마겟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인생은 아름다워」, 「러브 오브 시베리아」, 「와호장룡」, 「아메리칸 뷰티」등등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한석규가 한국영화의 보증수표라면 이미도는 외화흥행의 보증수표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셈이다.

미국 미, 건널 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 매니아였다. 「벤허」를 개봉하던 날은 마치 시네마천국의 토토라도 된 듯 극장에서 살았다. 토요일에는 주말의 명화를, 일요일 밤에는 명화극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번역가로서의 끼가 있었는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영화를 보면서 누가 번역했는지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당시 국내에 소개된 외화는 번역 1세대인 김승호 선생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군에서 통역일을 하셨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한 아버지는 유난히 미국을 좋아하셨다. 오죽하면 아들 이름을 미국 美, 건널 道를 합쳐 ‘美道’라고 지으셨을까. 무엇이든 풍요로운 미국에서 살라고 그렇게 지어주셨다. 당시만 해도 그 세대에게 미국은 ‘꿈의 땅’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찍 영어를 생활화했다. 그러고 보면 90년대에 들어 일기 시작한 ‘영어만이 살길’이란 표어의 선구자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영어 시간이 시시하기만 했다. 철이 들면서 막연히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술을 천하게 여기셨던 아버지에게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말은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결국 대학에서는 스웨덴어를 전공했고 공군 교육장교를 제대하고 광고를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났다.
본격적으로 영화일을 시작한 건 서른이 조금 넘어서였다. 94년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후 그는 영화 수입 중개업을 하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2년간의 미국생활은 그가 영화일을 하기에도 좋은 경험이 됐다.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우수한 작품을 사들이거나, 제작중인 영화 가운데 될성부른 작품들을 골라 배급권을 따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들여온 영화를 직접 번역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마침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발음과 재기 넘친 언어감각을 알아본 주변에서도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때가 정확히 9년 전. 줄리엣 비노쉬가 주인공인 「블루」를 시작으로 그는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첫작품 「블루」는 아트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많은 관객을 얻었다. 곧이어 블루의 연작시리즈 「레드」, 「화이트」를 번역해 연달아 히트시키자 헐리우드 직배사들은 앞다퉈 그를 찾기 시작했다.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

그는 자신을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올 여름 펴낼 책 제목으로 물망에 올려놓았다. 이 책에서는 외화번역가라는 직업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번역과정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을 생각이다. 영화 한 편 번역하는 데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1주일 정도가 고작. 우리나라는 개봉일이 임박돼 수입되는 경우가 많아 번역가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최소한이다. 그 짧은 시간에 법조계나 스포츠, 동성애 등 전문분야를 다룬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기란 역부족이다. 이럴 때를 위해 영화계 ‘인맥’보다는 전문분야 종사자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쓰는 편이다. 그 시대의 정보에 어두우면 좋은 번역은 불가능하다. 골프영화 틴컵(Tin Cup)은 가까운 선배중에 골프 전문가가 없었다면 마감에 맞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깔끔한 번역은 이미 할리우드 직배사들로부터 정평이 나 있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게, 언어의 미묘한 맛을 살린 번역을 그것도 ‘단시간내’에 가장 훌륭하게 번역하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허락없이 그의 번역에 함부로 손을 댔다간 그와 거래를 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완벽을 기한다. 그는 한 달 평균 세 편을 번역한다. 여름이나 명절 ‘성수기’에는 한 달에 네다섯 편씩 처리할 때도 있다. 그 동안 그가 번역한 영화들은, 매년 외화 흥행순위 10위까지를 석권한다.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원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번역한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기에 번역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는 건 스스로 견딜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가장 좋은 번역은 영화를 보면서도 뭔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푹 빠지게 하는 것. 그렇게 되려면 대사가 길어선 안 된다. 자막은 2줄 이상을 넘지 않을 것, 길어도 원고지 1줄 분량을 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전후사정으로 이해될만한 대사는 과감히 건너뛴다. 배우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다 옮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는 또 한국식 정서에 맞는 대사를 창출하는 것을 최상의 번역이라 생각한다. 감독이 웃기려는 의도가 열 번 있을 때 번역된 작품을 보고 우리 관객들도 열 번 웃게 해주는 게 가장 힘들다. 나라마다 유머의 코드가 다르고 문화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막을 얻기까지 그는 시사회를 포함해서 일곱 번 정도 영화를 본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번역 때문에 흥행했다는 칭찬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외화번역가의 ‘업’이다. 영화에 감동받고 나온 사람들 중에 만 명에 한 명도 “정말, 훌륭한 번역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판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어 추가 개런티로 환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외화를 번역하는 건 공중에 뜬 무수한 말 중에 하나를 잡는 일이다. 관객이 화면 속 배우의 움직임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자막을 보는 세 가지 행위가 동시에 무리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문장을 압축하고 다듬는 일.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선진국들에 비해 아직 ‘번역가’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이 터무니없이 낮은데다가,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제 살 깍아먹기식 경쟁을 하고 있다. 그나마 그의 등장 이후 번역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엔딩 장면에 번역가의 이름을 넣자고 주장해 관철시킨 것도 그이고 비디오에 번역가 이름을 넣게 된 것도 그가 발벗고 나선 일이다.
그는 개봉 첫날 첫회 상영분을 관객과 함께 본다. 자신이 숨겨둔 웃음과 진실의 여정을 찾아가는 관객들 속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 재치있는 번역에 관객들이 박장대소할 때 그는 또 해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스텝들의 장구한 행렬 뒤로 낙관처럼 떠오르는 ‘번역 이미도’를 확인하며 극장을 나선다.


(http://www.applebook.co.kr/old_applebook/month/april01/03-4.htm)

일단 다 퍼왔구요..
저도 영상물 번역을 해봤었는데, 거기 설정에 맞게 다 조사를 해야한답니다. 가끔 맞지 않는 번역이라도 올라갈때가 있는데, 이유는 한 스크린에 40자 이상이 한꺼번에 떠서는 안돼기 때문이죠. (다 일고 지나갈수가 없는 양이기때문에) 그리고 각 언어의 비어나 은어등은 그냥 상황에 맞게 저희가 바꾸기도 하지요. 물론 나중에 검수하시는 분이 바꾸는경우도 허다하고요.

 

가장 대표적인 멋대로날림번역의 일례로는 위에도 언급된 '반지의 제왕' 이 있죠. 마지막 장면, "샘, 난 이대로 멈출 수 없어"라는 대사로, 졸지에 프로도를 모험왕으로 만들어 버렸다죠... 보다 자세한 반지의제왕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http://morgoth.egloos.com/201770

  이미도씨의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계의 악의 축으로 불릴 만도 하군요.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65/mo1065sp_901.htm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73/mo1073sp_9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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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영상번역계의 비리 - 이미도의 책임?

이미도-미리내
 
이미도씨 자막 이야기야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니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사실 저도 그전에는 '이미도 번역공장' 이랄지 '하청준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좀 믿고 있었죠. 유명 영화를 도맡아 하다보니 당연 보이는 이름은 '이미도' 뿐이고, 실망스러운 자막들도 분명히 존재했으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미도씨가 '공적' 취급당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의 자막 과정에 참여하신 금숲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도씨는 혼자서 작업을 하고, 사실 작업하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더라-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덕에 일단 이미도씨 '개인'에 대한 오해는 풀렸고, 그전보다 좀더 너그럽게 볼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하청하는 주제에 자기 이름 다 걸고 자막도 그따위면 아마도 제가 먼저 나서서 안티를 걸지 않았을까요.) 일단 제가 금숲님 이야기를 믿는것은 실제 금숲님이 이미도씨와 같이 반지 3부작의 작업을 해 보셨고, 제가 간접적으로 그 과정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미도씨 개인을 믿고, "아 혼자서 하시는구나." 하고 나니- 자막의 문제가 이미도씨 개인을 넘어 영상번역계 자체의 문제로 보이더라구요.

일단 영상번역과는 좀 다르지만, 책의 번역 과정을 살짝 살펴보자면- 역자분이 번역을 하고, 출판사에서 그걸 맡아 편집자분들이 교정을 하고, 그 분야에 관련된 분들이 감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을겁니다. 교정 과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번역서의 품질이 확 달라진다는것은 제가 몇년간 체험해서 알고 있구요-같은 역자가 시간차를 두고 번역한, 전혀 다른 출판사의 도서가 번역의 질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번역에서는 번역 이외에 '사후처리' 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번역자도 인간이니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라는 매체를 출판하는 과정은 번역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겠지요. 그 출판사에서 책을 맡아 출간하기로 했다면, 번역의 품질에 있어서는 출판사도 공동의 책임이 있는겁니다. 그래서 책에 문제가 있으면 출판사와 역자가 함께 비난 및 비판을 받는거겠지요.

이건 영상번역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번역에서 어떤것이 어렵고 쉽냐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사실 책의 번역보다 영화의 번역이 더 까다롭다고 봅니다. 영화에서는 영상을 계속 보면서 맥락을 찾아야 하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사의 미묘한 어조도 파악을 할 수가 없으니- 영화 자막을 만드는데는 필연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가 필요할 겁니다. (실제 인터넷에 떠도는 '디빅' 자막들 중엔 영어에 짧은 제가 보기에도 한심한 지경인 자막들이 많죠) 그리고 책과 마찬가지로, 정말정말 시간이 없더라도 그 자막을 다른 이들이 검토하고 수정할 시간이 있어야 할겁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 실수가 존재할테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영화 자막들은 그런 꼼꼼한 절치는 거치지 않는것으로 보여요. 혹 거친다고 해도 영화사 마음대로 자막을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었구요.(제가 잘못 알고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물론 이미도씨에게 어떠한 면죄부를 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히 이미도씨의 자막을 보면서, 영어에 짧은 제가 비웃을 때도 있었고, 너무 오버한 번역을 보며 민망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영화의 의미를 오도하는 자막이 나와 원성이 자자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미도씨의 장점도 분명히 존재하고, 현재의 영상 번역계에서는 안타깝게도 프로로 활동하는 분들중에 이미도씨만한 분들이 없는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그족 종사자도 아니고- 제대로 아는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뭔가 기형적인 영상번역계의 문제 자체가 '이미도'라는 인물 하나로 대별되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대안없는 안티보다는 비판적 지지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미도씨에 대한 무조건적 '안티' 보다는, 이미도씨를 지지하지 않는 분들의 모임이 하나의 번역 모니터링과 개선을 위한 집단이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반적인 번역의 질도 개선이 되겠고, 아마추어 번역자들이 프로 무대로 진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미도 싫다!" 만 외칠게 아니라, "이미도가 싫으니까 이러이러하게 해서 이러이러한 점을 개선되게 하자." 가 더 바람직해보이는건 저만이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덧)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방송국의 외화 번역에 대해서는 뭔가 만들어주실 분 없는지? 제가 하나 만들까요^^; 추석날 두개의탑 번역이야말로 영화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는걸요.
# by 미리내
 
 
영상번역계의 비리 - 이미도의 책임?-금숲

트랙백 : 닉슨님 블로그의 포스트 - 이미도의 번역

이글루에 말 나온 김에, 반지의 제왕 자막작업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리오.

맨날 이름 걸린 번역자만 가지고 '우선 눈에 띈다고' 막 말 하는데
그게 다 엄청 크게 불려진 거품 안티 !

+ 소문에 소문에 점점 공룡화되는 거짓 정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건 다 '추측'일 뿐.

++ 혼자만 잘 알고 있다고 < 생각 >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 목격 >한 영화사와 DVD사의 번역에 대한 눈 깔아내림. 그 심각함은 상식 이하입니다.



영화계 번역에 대한 회사의 관심도가 제로인 것이 더 큰 문제.

요점은, 자막이야 어떻든,'그래도 팔리니까'가 정답.
번역자가 애써 해 보내면 괴악한 짓을 하지 않나,
기껏 제대로 하라고 2, 3 수정본 보내면 멋대로 초안 걸지 않나,

특히~~~~
시장 형성된 지 얼마 안 된 DVD가 날림은 가장 극심하지. ('시청한'것이 아닌 '당해본' 사람으로서, 이가 갈리오)


싸게 하청주어서 극장 자막에 번역자 이름도 안나오는 그런 영화가 수두룩한데
(반 헬싱도 이름 안나오더라;)

솔직히 자기 이름 걸 정도면 욕을 '듣겠다'는 건데, 사람들이 모른다.

왜 이미도 '만' 있는가?
답은 다른 자들이 대부분 이름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한 루머가 도는 거고
모든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미도의 문어발 공장의 책임이 되고

코카콜라 한 종류만 있어서 아프리카에 팔면 자본주의의 침략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 코카콜라의 맛 - 과연 좋은가? "
내지는
" 코카콜라 - 건강에 나쁘다? "
" 코카콜라 - 이빨이 썩는다? "
펩시콜라가 나오기 전에 저런 소리는 별 의미가 없다.

솔직하게 '이빨에 나쁘다' 정도는 사실이지만, 저 모든 것이 사실보다 거대하게 부풀려지고, 시장 바닥에서 파는 짝퉁 '고가골라'의 문제도 코카콜라에게 보내진다고 비유하면 될 것 같다.

(* 덤으로 이미도씨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

* 실제로 이미도씨가 한달에 하는 영화 편수는 얼마 안 되며 (한달에 한 편 꼴도 안 된다고 기억합니다.)
* 일정 배급사의 영화만 주로 맡는다.
* 그런데 하지도 않은 영화를 했다고들 말하는 판이다.
* 그리고 이미도씨는 DVD 안 한다. (자막이 같은 경우는 극장판 자막을 DVD회사에서 그대로 갖다 쓰는 경우)
* 그리고 히어링만으로 영화 번역 하지 않는다. 어디나 극장 영화는 대본이 꼭 온다. 그럼에도 잘려나가는 부분들은 < 두 줄에 빈칸 포함 열여섯 글자 >의 제한 때문이다. 하물며 가로자막이 아닌 세로자막인 경우 가독성이 떨어져 제한은 더욱 심해진다.
* 외국에 많이 나가는 분이다. 우물안 개구리로 그저그저 사전만 붙들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 종류에 따라 의외로 자료조사도 많이 하는 편이다. 배급사가 많이 맡기려 하는 것은 경험이 많으므로, < 매우 단순하게 > 안심하여 맡기는 것이지 뭔가 비리가 있는게 아니다.


영양가도 안 나오는 (대부분이 루머에 불과한) 안티만 찌르지 말고,
그런 거 할 시간에 펩시콜라부터 찾아서 내 놔 보슈.
훨씬 관심 많고 영화 열심히 보는 멋진 리뷰어들이 좀 해주길 지극하게 바랍니다.
기본적인 히어링 안 되는 리뷰어는 제발 손대지 말아달라. 당신의 '오역 지적'자체가 오역이다.

그리고 영상계 회사들 제발 좀 영상번역에 대해 관심 좀 가져라!!!!!!!! 무심하기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그따위로 찍어내니까 번역계의 건전한 자극과 발전이나 경쟁이 전혀 없잖아!!!!!!!!(이게 더 급해! 그래야 펩시콜라가 나오지! 펩시콜라가 나와야 코카콜라도 맛있어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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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영화산업의 콤플렉스(complex)
대기업들의 '불안한' 움직임

2004년 10월 04일   이은혜 기자 

대기업의 영화시장 진출, 영화사·제작사들의 합작법인 발족, 인수합병과 되팔기의 반복 등 요즘 영화계의 ‘보이지 않는 손’들은 잠자면서도 머리회전을 그치지 않는다. 수평계열화와 수직통합이란 두 축을 중심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한다.
먼저 국내 영화산업은 CJ엔터테인먼트(투자배급사), 케이블TV와 극장업계를 꽉 잡고 있는 오리온의 자회사인 쇼박스(투자배급사)의 양강구도다. 여기에 시네마서비스(제작사)와 강제규·명필름(제작배급사)이 가세하고 있으며, 기타 창투사들을 자금줄로 ‘기획영화’를 내놓는 소규모 영화사들의 시장이 펼쳐져 있다.


주목할 점은 자본금이 가장 많은 CJ엔터테인먼트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박을 향후 2~3년 동안 못터뜨리면 손을 털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다. 물론 CJ는 인터넷, 게임 등 미디어사업의 일환으로 영화로 진출한 것인데 이런 수평계열화가 제대로 될 지는 미지수다. 시네마서비스와 강제규·명필름도 마찬가지. 1~2편의 대형영화를 실패하면 또다시 자금줄이 막힐 만큼 위태로운 상태다. 강제규·명필름은 네티즌들에게 제작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반응이 좋았지만, 한국영화들의 연패행진이 계속된다면 이것도 믿지 못한다.이런 상황이니 투자-제작-배급-상영의 수직통합이 ‘안전책’으로 선택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업체들은 필승의 승부수를 띄우는 상황이다. 


그것은 ‘모 아니면 도’의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자본의 횡포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이에 따른 유통질서의 황폐화, 건전한 문화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치열한 물밑대결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대기업의 독과점을 비판하는 여론에 밀려 최근 CJ 측이 독립영화제 개최 등을 통한 ‘예술영화’ 지원에 연간 20억 이상을 쏟겠다고 발표했지만, 문제는 예술영화가 아니라 제대로 된 상업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 중앙일보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나리오 공모전이 총 6백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대상을 뽑지 못한 점, 우수작으로 뽑힌 작품들이 기존 장르적 문법을 답습한 뻔한 이야기들이라는 점은 지켜보는 이를 매우 허탈케 한다. 따라서 “대자본을 중심으로 영화시장이 확대된다고 질적 성장까지 담보되지 않는다”는 전범수 방송통신대 교수의 말은 설득력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도 “메이저사들의 멀티플렉스화는 한국영화를 잠들게 할 독약이다"라며 대자본의 흥행위주 투자가 경쟁력있는 웰-메이드 영화, 예술영화 시장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임성준 중앙대 교수(경영학)는 “할리우드 역시 극장들이 문을 닫자 최근 다시 수직통합체계를 이루고 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독과점 현상과 영화의 다양성 실종은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양영철 경성대 교수(영화연출)도 “참신한 프로듀서들이 이들로부터 자본을 받아 다양한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다”라고 본다. 임정수 서울여대 교수(미디어산업) 역시 “비상업적인 영화들은 또 다른 할당제로 보호해주면 된다”라고 말한다. 아무튼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장을 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양분돼 있고, 여기에 불안한 우리의 현실이 걸쳐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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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방환하는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 '살인의 추억'
정성일의 영화세상

 

정성일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잔치는 끝났다고 푸념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갑자기 80년대가 돌아오고 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시대가 우리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변방에서 80년대를 이야기할 때만 해도 우리들은 깡패새끼들만을 보았지, 그 풍경을 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서울 변두리의 80년대를 다룬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80년대 ‘고삐리’들의 연애활극 「품행 제로」와 80년대 ‘중삐리’들의 음담패설 「몽정기」가 등장했다. 1982년 11월 14일 맞아죽은 권투선수 김득구가 「챔피온」으로 부활하고, 거의 동시에 서울 가서 성공하겠다고 권투하러 떠난 80년대 섬 소년들 이야기 「남자, 태어나다」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러브스토리’라는 기괴한 ‘純正哀歡劇(?)’ 「나비」와 함께 80년대 미해결 사건인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지금 상영 중이다.


1980년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


그러니까 80년대가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 말하는 중이다. 때로는 낄낄대면서, 때로는 음란하게, 때로는 비장한 말투로, 때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지금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는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1987년 10월 26일. 경기도 화성 논밭 근처의 농수로에서 강간당한 다음 브래지어로 목을 졸리고 스타킹으로 손발이 묶인 채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쓴 이향숙의 시체가 발견된다(이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본 다음에 평을 읽으실 것). 동네 경찰서의 박두만 형사(송강호)와 조 형사는 대충 사건 조서를 꾸민 다음 이향숙을 쫓아다닌 동네 고기집 바보 막내 백광호를 ‘感으로’ 체포한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데려와 겁도 주고 달래기도 하면서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다. 서울에서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파견되어 내려오고, 그는 백광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에 의한 추리로’ 안다. 둘이 범인 여부를 놓고 다투는 사이에 새로운 희생자가 발견되고, 이미 벌어진 범행의 예전 희생자도 찾아낸다.
서장이 경질되고, 새로운 수사반장(송재호)이 내려온다. 박두만 형사는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도 받아오고, 나름대로 과학적 추리를 해서 동네 남자들 중에서 무모증(無毛症)인 놈이 범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범인은 매번 비오는 날 라디오 방송으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신청한 다음 빨간 우산을 쓰고 가는 여인을 골라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수건돌리기 놀이’ 같은 재미


함정수사도 벌이지만, 소득이 없는 가운데 범행 장소에서 ‘빨간 팬티를 입고 딸딸이를 치던’ 동네 공사장 인부 조병순을 잡아 다시 한 번 족치면서 범행 자백을 받던 중 또 범행이 일어난다. 범인에게 강간당하고 겨우 살아남은 ‘언덕녀’로부터 “범인의 손이 곱다”는 진술을 받아낸 다음 라디오 방송국에서 신청곡 엽서의 주소를 찾아내 “손이 고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검거한다. 박현규는 완강히 범죄를 부인하지만, 서태윤 형사와 박두만 형사가 보기에 그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범인”이다. 희생자에게서 발견된 정액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검사 의뢰를 보내고 박현규를 감시하다가 서태윤 형사는 잠시 깜빡 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한 여고생이 다시 살해당한다. 더 이상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박현규를 찾아가 서태윤 형사가 총을 들이대고 자백하라고 외치는데 미국에서 결과가 왔다고 박두만 형사가 달려온다. 결과는 두 사람의 정액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3년, 아직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는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봉준호가 화성에 내려가서 이 사건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실제 사건의 어느 부분이 극적으로 허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느 인물이 극중 인물인지 모르며, 미안하지만 연극 「날 보러와요」를 보지 못했다. 미해결 사건을 영화로 담은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대목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송강호는 거의 원맨쇼에 가까우며, 많은 대목들은 봉준호가 지나치게 텔레비전을 열심히 본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만큼 영화적으로 서투르다.(특히 추적장면들은 유치하게도 음악소리만 시끄럽다. 또한 도입부의 롱테이크는 겉멋이다) 시나리오는 산만하고, 인물들은 차례를 기다려 적당한 대목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물러난다. 「살인의 추억」은 ‘그냥’ 재미있다.

그러나 그 재미는 일종의 수건돌리기이다. 그래서 내 뒤에 수건이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놀이다. 수건돌리기가 불러일으키는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 뒤의 수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놀이 자체에 있다. 하지만 놀이는 즐겁고 수건만이 괴로워진다. 수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에 놓일 것이다. 수건이 놓이면 당신은 범인이다. 「살인의 추억」은 가까스로 술래에서 빠져 나온 당신을 다시 그 자리에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봉준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80년대를 끌어들이는 순간 그 시대의 지식이 만들어내는 위장술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소도구나 미장센으로 활용된 80년대 텔레비전 연속극 「수사반장」이나 ‘나이스’ 운동화, 모나미 볼펜, 등화관제, 전두환이 이 동네를 지나간다니까 동원된 한복차림의 여고생들,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온 부천 경찰서 성(性)고문 경찰 문귀동과 같은 대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내가 궁금한 것은 1987년에서 1991년에 걸친 미해결 사건의 이야기, 그러니까 어떻게 풀어내도 결국에는 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래서 결론이 없는 (정말 벌어진 현실 속의) 사건을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든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고 가야 하는 안간힘 때문에 가져야만 되는 거짓된 외양의 그럴 듯함이 무엇을 기만하고, 무엇을 희생시키면서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내는 과정을 밟아 나가느냐는 것이다. 자꾸만 이야기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주인공들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범행은 계속 되고 시체는 쌓여가는데, 이야기는 진척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같은 이야기의 끝없는 변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살인의 추억」을 가장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는 (또는 아닌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첫 번째 범행만을 저지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걸 왜 알 수 없냐면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을 낸다. 영화는 범인이라고 지목을 하는데, 이야기는 아니라고 버틴다. 봉준호는 그 모순의 인과관계를 끝내 설명하지 못한다.

박현규는 비만 오면 “애국가 듣고 조회하는 것처럼”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에 신청한 다음 강간 살인하러 밤에 범행장소로 ‘출근하는’ 미친놈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점이 이 영화에서 정말 무서운 대목이다. 또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동의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범인의 범행동기를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범인을 이해하는 대신 그냥 “미친 사이코”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왜? 그걸 이 영화는 슬쩍 생략한다. 범행 동기를 알 수 없으니 끝내 범인을 잡기는 틀린 일이다. 그런데도 박두만 형사는 일단 잡아다가 때리고 달래면서 범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또는 서태윤 형사는 자기가 선택한 증거를 통한 자기의 추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백광호는 자기가 범인을 보았다고 말한 다음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조병순은 ‘통닭구이’ 고문을 받은 다음 시키는 대로 범행을 자백한다. 박현규는 끝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여기에는 범인(이라고 자백을 강요받은 채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오직 추적하는 형사들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증거물만으로 추리를 하고 범인을 호명한다. 호명당하면 그때부터 범인이다. 그것이 80년대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추억의 수사학이다.

우리들은 80년대에 대해서 마치 형사와도 같은 자리에 가서 호명한다. 거기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죽은 자들의 묘지 앞에서의 죄의식 따위는 처음부터 없다. 무언가 잘못이 있지만, 그 잘못은 범인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할 생각은 없다. 그저 호명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외치면 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대상, 끝내 잡을 수 없는 대상과의 숨바꼭질 속에서 ‘아무나’(이 말이 중요하다) 거짓범인으로 몰아서 때리고 고문하던 가해자는 갑자기 희생자가 되고, 희생자들은 위증을 한 것으로 몰린다. 정작 범행을 저지른 그 대상이 완전히 탈락되어 있는 기만적인 속임수의 드라마는 텅 빈 구멍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 잡히지 않는 범인은 80년대라는 구멍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걸려들 것이다. 우리 시대의 관객들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보면서 낄낄대고 웃는 것은 동시에 80년대에 걸려 넘어진 채 누가 범인인지를 찾아내라는 요구에 대한 집단적인 비웃음이다. 2003년은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도 알 수 없게 뒤섞인 이 무시무시한 공범의 책임전가 시대에 갑자기 80년대의 범인을 찾자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에 대해 집단적으로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다.


완전범죄를 방관한 우리의 지리멸렬함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중으로 읽혀야 한다. 형사를 그만 두고 대리점을 하는 박두만은 2003년에 이 영화의 첫 장면, 이향숙이 시체로 발견된 농수로에 다시 찾아간다. 그곳을 보고 있는데 한 초등학생 소녀가 와서 이야기한다. “참, 이상하다. 어제는 다른 아저씨가 와서 들여다보더니 옛날에 한 일이 생각나서 온 것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아직도 활개치는 범인이 와서 들여다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서태윤이 들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를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남아 있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을 잡아야 하는 놀이는 아직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재수 없게도 비오는 날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흥얼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당신 앞에 빨간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범인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강간할 의지가 없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 하필이면 마침 도착한 당신이 잘못이다. 결과가 원인을 붙잡으러 달려갈 때, 당신은 저지르지 않은 죄의 범인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이 순환의 고리에 누군가를 대신 밀어넣어야 할 것이다. 어느 새 당신은 범인을 잡는다는 미명을 앞세워 가해자의 자리에 가 있다. 당신은 자꾸만 형사의 자리에 가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당신이 80년대의 공범자라는 그 책임의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이 따분하고 뻔한 영화가 어떤 대목에서 찬물을 끼얹듯 섬뜩해지는 이유는 그 역설적인 책임회피를 통해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을 쳐다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살인의 추억」을 보는 재미는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어둠 속에 모여 앉아 즐겁게 추억을 더듬는 그 공범의식의 음란한 은밀함이다. 참으로 지리멸렬하게도 우리들의 역사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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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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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아님이 방금 소개해주어서 퍼왔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방환하는"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방관하는"이군요.
재미있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비로그인 2004-10-0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구 잘라낸 듯한 살인의 추억을 추석 때 흘끗 본 저로서는,
정성일의 평으로 만족하는 게 낫겠군요.

aporia 2004-10-0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초면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곳에서 정성일씨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이고 약간 의견도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씁니다.
1. (정성일씨가 꼭 아니라) '평론가'가 영향력을 갖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넓고 영화도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성일씨의 평론에 의지해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건 제가 영화에 열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크게 즐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년간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15편도 채 안 되고, 때때로 집에서 비디오를 볼 때도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는 헐리우드 액션이 아닌 바에야) 상당한 피곤함을 느낍니다. 다른 할 일도 많은 데다가, 여가 시간에 제가 주로 하는 독서와 음악감상의 경우 제가 리듬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반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외한인 까닭에 그렇게 신경을 써서 영화를 봐도 잠시 독서하는 만큼의 효과도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 정말 괜찮은 영화다, 그러니까 힘은 좀 들겠지만(더구나 정성일씨 지론처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두 번 이상 봐야 한다면!)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추천이 없는 한 영화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이때 중요한 참조점 중 하나가 정성일씨의 평입니다. 확실히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수동성/능동성이 '태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그것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역량의 결과일 텐데, 제 발로 설 때까지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하거니와 지금 당장엔 역량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고자 하는 욕망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적 자극을 주는 영화평론이 없다면 저는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에 별로 열광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컨대 제가 얼마 전에 본 신형철씨의 영화평론이 아니었다면 저는 '올드보이'를 다시 봐야겠다는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저는 정성일씨가 과연 말씀하신 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정성일씨 영화평론 단 하나 때문에 특정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되는 '살인의 추억', 특히 그가 줄기차게 비판해 온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이 본 영화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런 열광이 반갑지 않습니다. 영화는 잘 모르지만 그 영화들이 크게 수작이라고 느끼지도 않았고, 이걸 통해 한국영화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외한인 저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평론계'에서 '쉬리' 이후 한국영화의 블럭버스터 경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 이는 정성일씨 외에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산업논리를 앞세우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감격에 젖어 한국영화 만세를 불러댔을 뿐이지요. 제가 정성일씨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키노'나 '정.영.음.' 세대가 아닌 제가 그를 지지하는 건, 지금 한국영화의 흐름에 대해 '영화적'이면서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그는 헤게모니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른바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권력의 효과로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게 무엇이지요? 그를 지지하는 몇몇 관객들이 특정 영화(특히 최근 한국의 블럭버스터들)를 보지 않는 것? 그/녀들이 '특이한' 영화를 찾아 보는 것? 전자는 아주 미미할 뿐더러, 후자를 산출할 수 있는 권력이라면 오히려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쨌든 '무엇을 보지 말라'는 부정적 발화가 아니라 '무엇을 보라'는 긍정적 발화고, 그건 오늘 같은 천편일률적인 영화판에서 반드시 필요한 몸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정성일이라는 평론가 개인의 공과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는 문제입니다. 흔히 그에게 '글을 어렵게 쓴다', '엘리트주의적이다', '임권택에 대해 지나치게 극진하다' 등등의 비난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외로 영화판 안에서 그가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문제기 때문에 언급할 수가 없군요.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모든 장르 안에서 '평론가'의 역할이 일정하게 있고(제가 생각할 때 평론가는 매개자, 심지어 '사라지는 매개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 한국영화 안에서 그와 같은 비판적 논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평 때문에 영화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라도, 그게 그를 '교조적'으로 따라서라기보다는 (저의 사례를 통해 말씀드리려 했던 것과 같은) 구체적 맥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과끝님도 그럴 테구요. 궁극적으로 평론가에 의지하지 말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영화를 보자는 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저처럼 영화 이외의 다른 분야에 역량을 쏟는 걸로도 힘이 부치는 사람 그렇지만 어쨌든 괜찮은 영화는 종종 보고 싶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한편 어느 정도 영화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제 짐작이긴 합니다만, 정성일씨 개인의 평에 완전히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역량과 주관은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그 정도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쓸데없이 너무 길어졌네요. 감사합니다.

philliee 2004-10-0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글써놓고 처음과 끝님에게 실례한거 같아서 지금 얼른 지우려고 보니 아포리아님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먼저 위의 제 글은 지우겠습니다. 그리고 아포리아 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짧게 몇마디로만 한 말이라 오해하신듯한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긴 답글을 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으로만 새기겠습니다.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기가 balmas님의 서재이고 둘째로는 아포리아 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는 제가 잘 모르는 문제라 오해가 더 쌓일 수도 있을것 같아서 입니다. 긴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10-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벌써 퍼갔는데요, 실례했다고 여기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다만 제가 펌한 후에 제가 갖다붙인 글을 여기다도 적고 갑니다.

무슨 반론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냥 쓴 것입니다요...

이거원. 여하튼 두 분의 대화를 덤으로 듣게 되었다.
음... 영화전체를 80년대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메타포와 지리멸렬함으로 해석한 것이 내가 영화보면서 느낀 바와 동일해서 잘라낸 살인의 추억까지는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적은 것을... 정성일에 대한 평가 혹은 평론가를 통한 영화보기 등에 대해 이야기가 번지다니.

흠. 나는 키노의 팬인 셈이고, 모니터기자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80년대는 작가주의, 엄숙주의, 근본주의의 시대라고 본다. 권위는 둘째치고 모두들 진지함에 경직되어 어떤 사람들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진지함이 부족한 것을 탓하게 만드는 시대였다, 분명.

하지만 서태지의 등장이후부터였을까, 진지함은 경멸받기 시작했다. 작가주의도 시들고, 근본주의나 엄숙주의는 철퇴를 맞았다. 그 자리를 쿨, 쿨이 채웠다. 쿨하면 선이요, 그렇지 않으면 악인 것이 과거 진지함만이 무게를 갖던 그 시절과 닮았다. 진지하다면 젊음의 치기도 용서가 되었던 것을 잘 보여주었던 게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 본다, 난.

하여튼 정성일은 고집있게 진지한 작가주의를 지켜가는 평론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지루함은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타인이 듣기 괴로운' 기나길고 진지한 수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악평을 할 수 있다. 그의 필력때문인지, 그에 동조하는 것 때문인지, 키노는 때로는 필요없는 영화지식의 과시나 수사어의 남발로 가득찬 현학적인 영화잡지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나도 동조한다. 그것까지 칭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난 키노의 존재가치와 내가 신세졌던, 씨네21이 자리잡은 그 자리 말고, 키노의 자리와 정성일의 비평을 인정하며 아낀다. 그의 비평은 점점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키노는 폐간되었고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아쉬워하였다.
있을 때는 불평투성이였으니, 좀 더 사랑해줄걸 하고 말이다.

씨네21로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이며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다.

이야기가 물감튀긴 모양새로 이리저리 번져나갔지만 하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