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방환하는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 '살인의 추억'
정성일의 영화세상

 

정성일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잔치는 끝났다고 푸념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갑자기 80년대가 돌아오고 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시대가 우리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변방에서 80년대를 이야기할 때만 해도 우리들은 깡패새끼들만을 보았지, 그 풍경을 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서울 변두리의 80년대를 다룬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80년대 ‘고삐리’들의 연애활극 「품행 제로」와 80년대 ‘중삐리’들의 음담패설 「몽정기」가 등장했다. 1982년 11월 14일 맞아죽은 권투선수 김득구가 「챔피온」으로 부활하고, 거의 동시에 서울 가서 성공하겠다고 권투하러 떠난 80년대 섬 소년들 이야기 「남자, 태어나다」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러브스토리’라는 기괴한 ‘純正哀歡劇(?)’ 「나비」와 함께 80년대 미해결 사건인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지금 상영 중이다.


1980년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


그러니까 80년대가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 말하는 중이다. 때로는 낄낄대면서, 때로는 음란하게, 때로는 비장한 말투로, 때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지금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는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1987년 10월 26일. 경기도 화성 논밭 근처의 농수로에서 강간당한 다음 브래지어로 목을 졸리고 스타킹으로 손발이 묶인 채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쓴 이향숙의 시체가 발견된다(이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본 다음에 평을 읽으실 것). 동네 경찰서의 박두만 형사(송강호)와 조 형사는 대충 사건 조서를 꾸민 다음 이향숙을 쫓아다닌 동네 고기집 바보 막내 백광호를 ‘感으로’ 체포한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데려와 겁도 주고 달래기도 하면서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다. 서울에서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파견되어 내려오고, 그는 백광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에 의한 추리로’ 안다. 둘이 범인 여부를 놓고 다투는 사이에 새로운 희생자가 발견되고, 이미 벌어진 범행의 예전 희생자도 찾아낸다.
서장이 경질되고, 새로운 수사반장(송재호)이 내려온다. 박두만 형사는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도 받아오고, 나름대로 과학적 추리를 해서 동네 남자들 중에서 무모증(無毛症)인 놈이 범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범인은 매번 비오는 날 라디오 방송으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신청한 다음 빨간 우산을 쓰고 가는 여인을 골라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수건돌리기 놀이’ 같은 재미


함정수사도 벌이지만, 소득이 없는 가운데 범행 장소에서 ‘빨간 팬티를 입고 딸딸이를 치던’ 동네 공사장 인부 조병순을 잡아 다시 한 번 족치면서 범행 자백을 받던 중 또 범행이 일어난다. 범인에게 강간당하고 겨우 살아남은 ‘언덕녀’로부터 “범인의 손이 곱다”는 진술을 받아낸 다음 라디오 방송국에서 신청곡 엽서의 주소를 찾아내 “손이 고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검거한다. 박현규는 완강히 범죄를 부인하지만, 서태윤 형사와 박두만 형사가 보기에 그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범인”이다. 희생자에게서 발견된 정액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검사 의뢰를 보내고 박현규를 감시하다가 서태윤 형사는 잠시 깜빡 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한 여고생이 다시 살해당한다. 더 이상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박현규를 찾아가 서태윤 형사가 총을 들이대고 자백하라고 외치는데 미국에서 결과가 왔다고 박두만 형사가 달려온다. 결과는 두 사람의 정액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3년, 아직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는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봉준호가 화성에 내려가서 이 사건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실제 사건의 어느 부분이 극적으로 허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느 인물이 극중 인물인지 모르며, 미안하지만 연극 「날 보러와요」를 보지 못했다. 미해결 사건을 영화로 담은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대목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송강호는 거의 원맨쇼에 가까우며, 많은 대목들은 봉준호가 지나치게 텔레비전을 열심히 본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만큼 영화적으로 서투르다.(특히 추적장면들은 유치하게도 음악소리만 시끄럽다. 또한 도입부의 롱테이크는 겉멋이다) 시나리오는 산만하고, 인물들은 차례를 기다려 적당한 대목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물러난다. 「살인의 추억」은 ‘그냥’ 재미있다.

그러나 그 재미는 일종의 수건돌리기이다. 그래서 내 뒤에 수건이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놀이다. 수건돌리기가 불러일으키는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 뒤의 수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놀이 자체에 있다. 하지만 놀이는 즐겁고 수건만이 괴로워진다. 수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에 놓일 것이다. 수건이 놓이면 당신은 범인이다. 「살인의 추억」은 가까스로 술래에서 빠져 나온 당신을 다시 그 자리에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봉준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80년대를 끌어들이는 순간 그 시대의 지식이 만들어내는 위장술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소도구나 미장센으로 활용된 80년대 텔레비전 연속극 「수사반장」이나 ‘나이스’ 운동화, 모나미 볼펜, 등화관제, 전두환이 이 동네를 지나간다니까 동원된 한복차림의 여고생들,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온 부천 경찰서 성(性)고문 경찰 문귀동과 같은 대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내가 궁금한 것은 1987년에서 1991년에 걸친 미해결 사건의 이야기, 그러니까 어떻게 풀어내도 결국에는 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래서 결론이 없는 (정말 벌어진 현실 속의) 사건을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든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고 가야 하는 안간힘 때문에 가져야만 되는 거짓된 외양의 그럴 듯함이 무엇을 기만하고, 무엇을 희생시키면서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내는 과정을 밟아 나가느냐는 것이다. 자꾸만 이야기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주인공들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범행은 계속 되고 시체는 쌓여가는데, 이야기는 진척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같은 이야기의 끝없는 변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살인의 추억」을 가장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는 (또는 아닌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첫 번째 범행만을 저지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걸 왜 알 수 없냐면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을 낸다. 영화는 범인이라고 지목을 하는데, 이야기는 아니라고 버틴다. 봉준호는 그 모순의 인과관계를 끝내 설명하지 못한다.

박현규는 비만 오면 “애국가 듣고 조회하는 것처럼”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에 신청한 다음 강간 살인하러 밤에 범행장소로 ‘출근하는’ 미친놈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점이 이 영화에서 정말 무서운 대목이다. 또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동의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범인의 범행동기를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범인을 이해하는 대신 그냥 “미친 사이코”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왜? 그걸 이 영화는 슬쩍 생략한다. 범행 동기를 알 수 없으니 끝내 범인을 잡기는 틀린 일이다. 그런데도 박두만 형사는 일단 잡아다가 때리고 달래면서 범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또는 서태윤 형사는 자기가 선택한 증거를 통한 자기의 추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백광호는 자기가 범인을 보았다고 말한 다음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조병순은 ‘통닭구이’ 고문을 받은 다음 시키는 대로 범행을 자백한다. 박현규는 끝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여기에는 범인(이라고 자백을 강요받은 채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오직 추적하는 형사들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증거물만으로 추리를 하고 범인을 호명한다. 호명당하면 그때부터 범인이다. 그것이 80년대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추억의 수사학이다.

우리들은 80년대에 대해서 마치 형사와도 같은 자리에 가서 호명한다. 거기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죽은 자들의 묘지 앞에서의 죄의식 따위는 처음부터 없다. 무언가 잘못이 있지만, 그 잘못은 범인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할 생각은 없다. 그저 호명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외치면 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대상, 끝내 잡을 수 없는 대상과의 숨바꼭질 속에서 ‘아무나’(이 말이 중요하다) 거짓범인으로 몰아서 때리고 고문하던 가해자는 갑자기 희생자가 되고, 희생자들은 위증을 한 것으로 몰린다. 정작 범행을 저지른 그 대상이 완전히 탈락되어 있는 기만적인 속임수의 드라마는 텅 빈 구멍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 잡히지 않는 범인은 80년대라는 구멍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걸려들 것이다. 우리 시대의 관객들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보면서 낄낄대고 웃는 것은 동시에 80년대에 걸려 넘어진 채 누가 범인인지를 찾아내라는 요구에 대한 집단적인 비웃음이다. 2003년은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도 알 수 없게 뒤섞인 이 무시무시한 공범의 책임전가 시대에 갑자기 80년대의 범인을 찾자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에 대해 집단적으로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다.


완전범죄를 방관한 우리의 지리멸렬함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중으로 읽혀야 한다. 형사를 그만 두고 대리점을 하는 박두만은 2003년에 이 영화의 첫 장면, 이향숙이 시체로 발견된 농수로에 다시 찾아간다. 그곳을 보고 있는데 한 초등학생 소녀가 와서 이야기한다. “참, 이상하다. 어제는 다른 아저씨가 와서 들여다보더니 옛날에 한 일이 생각나서 온 것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아직도 활개치는 범인이 와서 들여다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서태윤이 들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를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남아 있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을 잡아야 하는 놀이는 아직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재수 없게도 비오는 날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흥얼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당신 앞에 빨간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범인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강간할 의지가 없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 하필이면 마침 도착한 당신이 잘못이다. 결과가 원인을 붙잡으러 달려갈 때, 당신은 저지르지 않은 죄의 범인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이 순환의 고리에 누군가를 대신 밀어넣어야 할 것이다. 어느 새 당신은 범인을 잡는다는 미명을 앞세워 가해자의 자리에 가 있다. 당신은 자꾸만 형사의 자리에 가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당신이 80년대의 공범자라는 그 책임의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이 따분하고 뻔한 영화가 어떤 대목에서 찬물을 끼얹듯 섬뜩해지는 이유는 그 역설적인 책임회피를 통해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을 쳐다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살인의 추억」을 보는 재미는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어둠 속에 모여 앉아 즐겁게 추억을 더듬는 그 공범의식의 음란한 은밀함이다. 참으로 지리멸렬하게도 우리들의 역사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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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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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아님이 방금 소개해주어서 퍼왔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방환하는"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방관하는"이군요.
재미있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비로그인 2004-10-0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구 잘라낸 듯한 살인의 추억을 추석 때 흘끗 본 저로서는,
정성일의 평으로 만족하는 게 낫겠군요.

aporia 2004-10-0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초면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곳에서 정성일씨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이고 약간 의견도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씁니다.
1. (정성일씨가 꼭 아니라) '평론가'가 영향력을 갖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넓고 영화도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성일씨의 평론에 의지해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건 제가 영화에 열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크게 즐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년간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15편도 채 안 되고, 때때로 집에서 비디오를 볼 때도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는 헐리우드 액션이 아닌 바에야) 상당한 피곤함을 느낍니다. 다른 할 일도 많은 데다가, 여가 시간에 제가 주로 하는 독서와 음악감상의 경우 제가 리듬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반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외한인 까닭에 그렇게 신경을 써서 영화를 봐도 잠시 독서하는 만큼의 효과도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 정말 괜찮은 영화다, 그러니까 힘은 좀 들겠지만(더구나 정성일씨 지론처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두 번 이상 봐야 한다면!)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추천이 없는 한 영화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이때 중요한 참조점 중 하나가 정성일씨의 평입니다. 확실히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수동성/능동성이 '태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그것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역량의 결과일 텐데, 제 발로 설 때까지 선배들의 도움이 필요하거니와 지금 당장엔 역량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고자 하는 욕망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적 자극을 주는 영화평론이 없다면 저는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에 별로 열광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컨대 제가 얼마 전에 본 신형철씨의 영화평론이 아니었다면 저는 '올드보이'를 다시 봐야겠다는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저는 정성일씨가 과연 말씀하신 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정성일씨 영화평론 단 하나 때문에 특정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컨대 지금 문제가 되는 '살인의 추억', 특히 그가 줄기차게 비판해 온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이 본 영화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런 열광이 반갑지 않습니다. 영화는 잘 모르지만 그 영화들이 크게 수작이라고 느끼지도 않았고, 이걸 통해 한국영화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외한인 저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평론계'에서 '쉬리' 이후 한국영화의 블럭버스터 경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 이는 정성일씨 외에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산업논리를 앞세우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감격에 젖어 한국영화 만세를 불러댔을 뿐이지요. 제가 정성일씨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키노'나 '정.영.음.' 세대가 아닌 제가 그를 지지하는 건, 지금 한국영화의 흐름에 대해 '영화적'이면서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그는 헤게모니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른바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권력의 효과로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게 무엇이지요? 그를 지지하는 몇몇 관객들이 특정 영화(특히 최근 한국의 블럭버스터들)를 보지 않는 것? 그/녀들이 '특이한' 영화를 찾아 보는 것? 전자는 아주 미미할 뿐더러, 후자를 산출할 수 있는 권력이라면 오히려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쨌든 '무엇을 보지 말라'는 부정적 발화가 아니라 '무엇을 보라'는 긍정적 발화고, 그건 오늘 같은 천편일률적인 영화판에서 반드시 필요한 몸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정성일이라는 평론가 개인의 공과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는 문제입니다. 흔히 그에게 '글을 어렵게 쓴다', '엘리트주의적이다', '임권택에 대해 지나치게 극진하다' 등등의 비난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외로 영화판 안에서 그가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문제기 때문에 언급할 수가 없군요.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모든 장르 안에서 '평론가'의 역할이 일정하게 있고(제가 생각할 때 평론가는 매개자, 심지어 '사라지는 매개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 한국영화 안에서 그와 같은 비판적 논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평 때문에 영화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라도, 그게 그를 '교조적'으로 따라서라기보다는 (저의 사례를 통해 말씀드리려 했던 것과 같은) 구체적 맥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과끝님도 그럴 테구요. 궁극적으로 평론가에 의지하지 말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영화를 보자는 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저처럼 영화 이외의 다른 분야에 역량을 쏟는 걸로도 힘이 부치는 사람 그렇지만 어쨌든 괜찮은 영화는 종종 보고 싶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한편 어느 정도 영화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제 짐작이긴 합니다만, 정성일씨 개인의 평에 완전히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역량과 주관은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그 정도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쓸데없이 너무 길어졌네요. 감사합니다.

philliee 2004-10-0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글써놓고 처음과 끝님에게 실례한거 같아서 지금 얼른 지우려고 보니 아포리아님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먼저 위의 제 글은 지우겠습니다. 그리고 아포리아 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짧게 몇마디로만 한 말이라 오해하신듯한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긴 답글을 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으로만 새기겠습니다.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기가 balmas님의 서재이고 둘째로는 아포리아 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는 제가 잘 모르는 문제라 오해가 더 쌓일 수도 있을것 같아서 입니다. 긴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10-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벌써 퍼갔는데요, 실례했다고 여기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다만 제가 펌한 후에 제가 갖다붙인 글을 여기다도 적고 갑니다.

무슨 반론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냥 쓴 것입니다요...

이거원. 여하튼 두 분의 대화를 덤으로 듣게 되었다.
음... 영화전체를 80년대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메타포와 지리멸렬함으로 해석한 것이 내가 영화보면서 느낀 바와 동일해서 잘라낸 살인의 추억까지는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적은 것을... 정성일에 대한 평가 혹은 평론가를 통한 영화보기 등에 대해 이야기가 번지다니.

흠. 나는 키노의 팬인 셈이고, 모니터기자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80년대는 작가주의, 엄숙주의, 근본주의의 시대라고 본다. 권위는 둘째치고 모두들 진지함에 경직되어 어떤 사람들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진지함이 부족한 것을 탓하게 만드는 시대였다, 분명.

하지만 서태지의 등장이후부터였을까, 진지함은 경멸받기 시작했다. 작가주의도 시들고, 근본주의나 엄숙주의는 철퇴를 맞았다. 그 자리를 쿨, 쿨이 채웠다. 쿨하면 선이요, 그렇지 않으면 악인 것이 과거 진지함만이 무게를 갖던 그 시절과 닮았다. 진지하다면 젊음의 치기도 용서가 되었던 것을 잘 보여주었던 게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 본다, 난.

하여튼 정성일은 고집있게 진지한 작가주의를 지켜가는 평론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지루함은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타인이 듣기 괴로운' 기나길고 진지한 수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악평을 할 수 있다. 그의 필력때문인지, 그에 동조하는 것 때문인지, 키노는 때로는 필요없는 영화지식의 과시나 수사어의 남발로 가득찬 현학적인 영화잡지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나도 동조한다. 그것까지 칭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난 키노의 존재가치와 내가 신세졌던, 씨네21이 자리잡은 그 자리 말고, 키노의 자리와 정성일의 비평을 인정하며 아낀다. 그의 비평은 점점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키노는 폐간되었고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아쉬워하였다.
있을 때는 불평투성이였으니, 좀 더 사랑해줄걸 하고 말이다.

씨네21로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이며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였다.

이야기가 물감튀긴 모양새로 이리저리 번져나갔지만 하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