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팩스턴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에서 경고


△ 독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한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 나치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1939년에 이르러 독일의 10~18살 인구의 87%가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됐다. 〈교양인〉 제공

  관련기사

  • 한국의 파시즘연구는 ‘걸음마’



  •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파시스트 등의 말은 사회과학적 개념어가 아니다. 일종의 ‘정치적 욕설’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증오의 언어였고, 최근에는 저항운동 내부를 향한 비난의 언어다. 넒게는 정치적 반대자를 향한 낙인의 언어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교양인)은 파시즘을 둘러싼 이런 한국적 맥락에 경종을 울린다.

    “파시즘 나타날 가능성 1930년대 보다 높다”

    팩스턴은 600여 쪽에 걸친 이 저서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고”,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설파한다. 그래야 “(파시즘 등장의) 불길한 경고표지를 더 많이 읽어낼 수 있”고, “진짜 파시즘이 출현했을 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팩스턴은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훨씬 더 정교한 파시즘 모형”을 구축한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치밀한 천착이다. 독일·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에서 태동한 파시즘의 초기형태와 발전단계를 일일이 짚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역사서다. 이를 통해 그는 ‘귀납적 연구’의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이론서와 대중서의 특장을 한꺼번에 품었다. 출판사 쪽이 “파시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저작”이라고 상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 봐야”

    그의 파시즘 연구는 크게 세가지의 ‘통념’, 즉 △파시즘을 자본주의 위기의 필연적 결과물로 보는 스탈린주의적 시각 △파시즘을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등과 등치시키는 안이함 △파시즘의 지도자나 정당의 내부로 분석의 시선을 좁히는 편협함 등에 대한 비판이다.

    “제3세계 등 비유럽권에서 민주주의 실험 실패 늘어…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직간접으로 연관된 급진적 우익운동 퍼져…”

    그가 보기에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의 위기”다.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 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파시즘 성공의 결정적 요소는 “파시스트들과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된 보수 진영의 지도자들이 다른 가능성을 거부하고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파시스트) 당과 기업, 군, 고위 공직자들의 (파시즘) 연합은 경제적 이익·권력·특권, 특히 (좌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한데 뭉친”다.

    그래서 팩스턴은 “파시즘 정권은 파시즘 세력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가지의 완전히 다른 물질이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 등을 매개삼아 결합한 합성물”이라고 지적한다.

    〈파시즘…〉의 탁월한 성취는 팩스턴이 과거가 아닌 ‘오늘’과 ‘미래’에 대해 발언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가 보기에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파시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급진적 우익 운동이 광범위하게 퍼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의 1단계’가 정치제도에 뿌리를 내리는 2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팩스턴은 “제3세계 등 비유럽권에서 파시즘이 나타날 가능성은 1930년대의 유럽보다 더 높다”고 경고한다. 이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대의정치라는 실험이 실패한 사례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최근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을 ‘오버랩’시키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경고표지는 이런 것이다. “위협을 느낀 보수세력이 법의 지배를 포기할 태세를 갖추고 더 강한 동맹세력을 찾아 헤매며, 보수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테크닉과 결집된 열정에 손을 내밀며 그 추종세력을 흡수하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깝게 접근한 것이다.”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뭉쳐”

    번역판의 머리말을 쓴 조효제 교수(성공회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적 파시즘’이나 ‘대중독재’ 등의 논의가 왜 파시즘의 이해를 명료하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흐리게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 안의 파시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려면 팩스턴에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로버트 팩스턴은


    “로버트 팩스턴(72)은 평범한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평가다. 특히 한국에서 그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즐겨 인용되는 학자다. 1972년 〈비시 프랑스〉라는 저서를 통해 프랑스 비시 정권이 나치즘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저서로 팩스턴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잡았다. 서구 유럽을 풍미하고 있는 ‘파시즘의 미시구조 분석’의 지평도 그와 함께 열렸다.

    프랑스 비시정권 해부
    관념아닌 현실 파시즘 탐구

    이런 노력이 한국에서는 ‘과거사 청산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40여년에 걸친 파시즘 연구를 집대성한 〈파시즘〉에서 직접 말하고 있듯이, “살아 움직이는 파시즘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관념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서 극우적 운동의 싹부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옥스퍼드·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비시 정권의 열병식과 정치〉 〈20세기 유럽〉 등이 있다.

    안수찬 기자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5-01-0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2004년 초에 나온 책인데 벌써 번역이 되었군요 ...

    박정희도 파시스트, 전두환도 파시스트, "운동권"도 파시스트, 들뢰즈도 파시스트 ... 웬만하면 다 파시스트라는 명칭을 붙여서 헷갈리기 그지 없었는데, 눈을 밝게 해줄 만한 책인 듯하군요.

    가을산 2005-01-0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서 보고 찜한 책인데, 먼저 읽고 리뷰 올려주실거죠? ^^

    balmas 2005-01-0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가을산님 때문에라도 부지런히 읽어야겠군요.^^;;;

    바람구두 2005-01-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흐흐.

    balmas 2005-01-0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하게 생겼군요 ...^^

    릴케 현상 2005-01-0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기대한다고 하면 '나 안 읽어'하시는 거 아니죠?^^

    balmas 2005-01-0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한 거,

    점점 더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 ^^
     

     

    [해외칼럼] 지금은 애도할 시간

     

    데이비드 브룩스/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이번주 신문 1면은 죽은 채로 나란히 복도에 누운 아이들 옆에서 어머니가 울부짖는 사진, 해변에서 죽은 아들 시신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아버지 사진 등으로 채워졌다.

    인류는 항상 이런 종류의 일들을 ‘대홍수’ 설화로 설명해왔다. 대부분의 문화는 사람들 상당수가 죽고 일부만 살아남아 이를 정화(淨化)의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는 홍수 설화를 갖고 있다. 이들 설화에서 신은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응보의 벌을 준다. 그리하여 인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새로운 역사를 맞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든 벌을 받을 만하니까 그렇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홍수 설화에서는 인류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들의 도덕성이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신의 분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적어도 활동적인 신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이 인간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의 끝에는 구원이 있게 마련이다. 요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이번 쓰나미에 대한 얘기들을 주의깊게 보면 이번 사태가 갖는 의미는 ‘무의미’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우주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지표면 위에 붙어있는 ‘각다귀’(벼나 보리의 뿌리를 잘라 먹는 모기 비슷하게 생긴 해충)에 불과하다. 지구가 몸을 한 번 비트니까 14만여마리의 각다귀가 죽는 형국이다. 자신들보다 훨씬 크고 항구적인 힘에 의해 희생되는 모습이다.

    이번에 지겹도록 반복됐던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라졌는데 어떤 한 사람은 기이하게 생환했다는 식의 휴먼드라마다. 누구는 행운을 누리고 누구는 불운을 맞는 데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한 아기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다로 쓸려갔고 퉁퉁 부은 시체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고 단지 자연의 무서운 제비뽑기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 우리가 보았던 자연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유기농 채소전, 국립공원 등에서 보는 자연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 자연은 도덕과는 무관하고 잔혹하게만 보일 뿐이다. 제 마음대로이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나온 ‘야생(wilderness)’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라이언 킹’에서 보았던 온화하고 규칙적인 생명의 주기, 헨리 D 소로가 쓴 ‘월든’의 자연, 환경운동가 존 뮤어의 자연 등과도 정반대다. 소로는 “우리 생명이 좀더 자연에 적합했다면 우리는 자연의 더위나 추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필요없이 동물, 생물들처럼 자연을 보모나 친구로 여기며 살 것”이라고 썼다. 이번주 자연은 결코 보모나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언론에는 인류가 큰 위기 앞에서 끈끈한 인류애로 얼마나 잘 뭉치는지 성급하게 결론짓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인들의 후한 인심은 물론 놀라웠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스스로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이번 사태를 미담으로 가득 채워 훈훈한 연말연시를 맞을 수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죽은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벌이는 구호금 경쟁에서 보듯 이번 사태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겹기까지 하다. 지금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깊이 애도할 시간이다.

    〈정리|손제민기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5-01-0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balmas 2005-01-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대중예술의 거장들...성장, 애정편력 모두 담아
    예술계 신간_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1-4) 을유문화사 刊, 552쪽 내외

    2005년 01월 01일   이은혜 기자 이메일 보내기

    재즈의 초상 ‘빌 에반스’, 위대한 탱고의 거장 ‘피아졸라’, 세기의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 ‘헬무트 뉴튼’. 을유문화사에서 야심차게도 이 목록들을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1권~4권)로 내놨다. 순수 고전예술의 계보에서 벗어나 ‘예술의 대중화’와 ‘대중문화의 예술적 승화’를 이뤄낸 현대예술의 대가들, 그들의 삶과 예술을 담아낸 것.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밴드에서 처음 생겨난 재즈가 강렬하고 펑키한 취향의 즉흥연주라면, 에반스의 음색은 관조적이고 사색적이며, 서정적이면서도 극도의 정제미를 나타낸다. 피아니스트이자 이 평전의 저자인 피터 페팅거는 그의 연주를 ‘빌 에반스 사운드’라는 하나의 컨셉으로 지칭하면서, “애잔한 화음과 서정적인 음색 그리고 매혹적인 짜임새”로 “음들을 넘어서고 싶은 동경, 우리가 늘 도달해서 손끝으로 만지고 싶은 조용한 혁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천재적인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와 델리커시한 리듬을 과시했던 드러머 폴 모티안과 이룬 트리오는 솔로연주가 반복되는 이전의 전형적인 트리오의 틀을 깨고, 새로운 즉흥연주의 세계를 보여준다.
    춤추는 음악으로 알려졌던 전통탱고에서 모던탱고를 일궈내고 클래식의 영역까지 자유자재로 아우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다. 프랑스의 첼리스트 요요마가 “자신의 음악 안에 실재했던” 인물이라 평했던 피아졸라는 탱고음악 안에서 성장했고 세련된 솜씨로 뉴욕,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휘어잡았다. 그는 철저하게 탕구에로(탱고문화에 젖어있었다는 뜻)이면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제 방식대로 연주했다. 탱고와 클래식, 재즈를 하나로 묶어내면서 탱고를 현대 실내악 형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지만, 그는 탱고음악의 개척자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간 진정한 의미에서 ‘방랑자’였다. 그의 예술적 욕망과 결심,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도전들을 이 책에서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꼽히는 토스카니니. 그가 암보한 곡은 3백여 개에 달한다. 세네 번만 연습하면 악보를 다 외웠다. 지휘자의 개인적 해석이 아닌 작곡가의 의도에 맞춰 곡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책은 음악비평서도 그렇다고 전기도 아니다. 이전에 하베이 삭스가 토스카니니를 탐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왜 토스카니니가 숭배되는지 그 본질과 비밀을 제대로 탐구해내지 못했다. 이 책은 바로 토스카니니의 진실한 삶과 예술을 포착해내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전시회가 열렸던 헬무트 뉴튼은 어빙 펜, 리처드 아베돈과 함께 20세기 3대 패션사진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올해 자동차 사고로 죽기 몇 달 전 이 자서전을 아내에게 남겼다. 뉴튼은 살아생전이나 지금이나 ‘외설’과 ‘예술’ 사이의 끊임없는 시비에 휘말린 작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사진작업에서 ‘예술’과 ‘고상한 취미’를 가장 지저분한 단어로 여기며, 자신의 사진들을 가리켜 ‘세련된 포르노’라 칭하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육체와 성적 욕망, 나르시시즘, 변태에 대한 이미지와 그것이 전하는 흥분과 불쾌감의 대립된 감정은 뉴튼의 영원한 주제였다. 그는 모델에게 옷을 입히고 벗기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충격적일 만큼 강하게 연출해냈고, 당당한 육체, 차갑고 빈틈없는 모델의 시선을 빌어 옷 속에 숨겨진 인간의 실체와 패션이란 고상함에 포장된 인간의 가식을 통쾌하게 비웃었다. 이 자서전에는 뉴튼의 성장과정과 애정편력, 일류사진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져 있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사진작업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을유년을 맞아 창립 60주년을 맞은 전통의 출판사 을유문화사가 펴내는 현대예술거장 시리즈는 ‘마일즈 데이비스’, ‘피나 바우쉬’, ‘자코메티’, ‘글렌 굴드’ 등으로 이어져 총 12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5-01-0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졸라는 잘 모르는 사람이고, 빌 에반스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재즈 음악가인데,

    오랜만에 향수를 자극하는군 ...

    바람구두 2005-01-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졸라.....
     
     전출처 : 로쟈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2)

    이어서 데리다가 끌어오는 것은 영어에서 address란 타동사이다. 이 동사는 연설하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다 (편지에) 주소를 적다 (편지를) 발송하다 구애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역자는 주로 전달하다라고 옮긴다. 그러니까 address란 동사는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 기조연설에서 (데리다) 자신을 청중들에게 address해야 하며,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문제) address해야 한다. 정확하게 우회 없이. 여기서 특별히 정확성을 문제삼는 것은 흔히 편지/문자(letter)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전달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해체(주의)의 표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러한 표어 혹은 주제를 이 기조연설에서 address해야 하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道斷)을 뜻하는바, 해체의 지배적 관심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그에게 강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의무를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가지 영어표현을 문제삼음으로써 주제화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갖게 된 것은 힘과 정확성, 그리고 정의의 독특한 혼합물(36)이다. 이 혼합물과의 대면은 아포리아의 경험 자체를 요구한다. 먼저, 정의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인지, 욕망, 요구는 자기 자신, 곧 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37) 

     

    다시 반복하자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포리아적인 경험들은 정의에 대한, 곧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결정이 결코 어떤 규칙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경험들이다.(37)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법은 정의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권리)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법의 곤궁에 대해 더 파고들어간다. 전달/주소(address)는 방향처럼, 정확성처럼,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데(*주소를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편지/문자는 전달된다. 안 그러면 반송된다), 우리가 정의를 원할 경우, 정당하고자 할 경우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전달/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38)

     

    그렇다면,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 하는() 정의의 행위(법관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는 정의, 규칙이나 규범, 가치 명령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에 일치하게(=합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되겠지만,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규칙은 독특성(=단독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고진의 문제틀을 가져오자면, 합법적인 결정/판결이란 건 고유명이라는 단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법은 갑, , 병을 다루지 배용준과 이나영을 다루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데리다는 그러한 확신이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어서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자신이 처한 언어적 상황(영어권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해야 하는 상황)과 계속 비교해가면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까 불어로 말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연설의 주제는 제대로 제시/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제시/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원텍스트는 불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이다.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그렇다. 비록 발표문이 최초의 불어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더라도 이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으며 이 연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우연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39, 나의 강조)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정의가 (불가능한) 아포리아인 것처럼.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 언어의 문제는 어떤 판결이 그것을 구성하는 고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졌을 때 발생하는 불의의 폭력을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건 (이 콜로퀴엄의 담론공간을 넘어서) 더 나아가 동물(재판)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데리다 자신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넌지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동물의 희생은 (인간의)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며, 또한 지향적 주체의 정초 및 (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법의 정초에 본질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법의 기저에 있는 동물 희생과, 양육과 사랑, 애도 및 사실은 모든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전유에서 상호주관성을 구조화하고 있는 상징적이거나 비상징적인 모든 식인 풍습 사이의 친화성(41)과 연계된다(이에 대해서는 애도식인풍습과 관련한, 역자의 용어해설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아주 복합적이며 방대하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간 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42)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걸 통째로 문제삼고 있는 해체를 정의에 관한 윤리적/정치적/법적 물음 및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대립을 유사-허무주의적으로 포기하려는 태도로 간주하는 일부의 피상적인 이해/오해는 (데리다가 강조하거니와) 해체와 무관하다(그들은 엉뚱한 주소지에 가서 해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와는 전혀 반대로, (1)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양하고 있으며(가제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앙가제하고 있다).(43) 여기서 불어의 가제 앙가제는 영어의 gage engage로 옮겨서 이해해도 무방해 보인다. 즉 해체는 정의의 요구에 be gaged 돼 있고, be engaged 돼 있다. 그리고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것이 해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변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애초에 그는 법과 힘(폭력)의 관계를 정식화했고, 이어서 정의와 해체의 (아포리아적) 관계를 진술/전달했다. 암기하기 좋게 말하자면, =(폭력)이고, 정의=해체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의 연관성이다. 정의로서의 법에 대해서 해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에 정의와 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법은 정의가 아니다)이 진정한 구분()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문제는 거기서 종결될 테니까).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집행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법은 힘 아닌가? 그러니 정의가 힘을 얻는 방도는 그것이 법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

     

    거기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세 가지 아포리아의 기술이 이 연설의 결론부이다. (1) 어떤 결정(=판결)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59)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고,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요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해서, 이러한 역설로부터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결정이 정당하며 순수하게 정당하다고, 더욱이 나는 정당하다고 현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이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때 읽은 한 동화에서는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인가(동화에서 여자들이 갖는 두 가지 명분이다), 하여간에 한 처녀가 왕으로부터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알몸이어서도 안된다. 말을 타고 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걸어와서도 안된다. 이런 아포리아적인 요구에 대한 현명한 처녀의 해법은 이랬다. 옷을 입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걸쳤고(그건 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을 타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말에 매달고 끌려왔던 것(적어도 걸어오진 않았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법과 정의 사이에 끼인 해체는 내게 그러한 해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해체는 지혜인가?   

     

    그리고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흔히 해체는 결정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이해되지만, 그때의 결정불가능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같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는 두 번째 아포리아인바,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53)

     

    만약 현전하는 정의를 규정하는 확실성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 해체된다면, 이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작동한다. 물론 이 정의의 이념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환원불가능성은 타자로부터, 타자의 (단독적인) 독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렇듯 결정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며(이 또한 정당하지 않다) 오직 결정(=판결)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이 아포리아의 내용이다(그러니까 정의는 판단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판단의 실행에 있다).  

     

    끝으로,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이것이 세 번째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전제로서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다. ,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이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56-7) 따라서 결정은 광기 어린 것이며 신들린(=수동적인) 것이다. 하긴, 정의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 혹은 불가능한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불가능한) 아포리아에 대응하는 것이 광기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데리다가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54)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나 엄살은 아니겠다. 

     

    이상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다시 암기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불가능성] (2)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불가피성] (3)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아주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계산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판단하고 결정/판결해서는 안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영역하면, Unaccountable justice orders us to account!)(그러니, 정의도 미쳐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해체 불가능한, 현전 불가능한, 계산 불가능한, 그래서 견적 안 나오는 정의의 구조이며 요구이다. 그리고 해체는 거기에 미쳐 있다. ?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59, 나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들릴 때 우리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망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데리다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04. 12. 26-27.

     

    P.S. <법의 힘> 2벤야민의 이름 읽기는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내가 읽기에 2부는 1부보다 수월했으므로 정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1부를 밤새 읽은 것만으로도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건 <법의 힘> 읽기를 제안한 최소한의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였는바, 이쯤에서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면제되고자 한다. 벤야민과 관련해서는 그의 <모스크바 일기>(1926-7)를 구해보고 싶지만, 러시아어로는 번역돼 있는 것 같지 않다(영역은 돼 있을까?). 벤야민에 대해서, 그리고 데리다의 벤야민론에 대해서 몇 마디 하는 일은 다른 계기와 자리가 필요하다.

     

    더불어 하름스에 대한 글도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미리 손봐야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지난번 통신문에 실은, 기적에 대한 몇 마디는 일종의 에피그라프인바, 본론은 조금 기다려봐야 도착할 수 있을 듯하다. 정의는 기다리지 않지만, 글은 기다려야 한다.

     

    모스크바의 날씨가 예년 같지 않게 포근하다(하긴 최근 2년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고 한다). 비까지 내릴 정도이고, 나는 서울에서 챙겨온 내복을 아직 꺼내보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서울보다도 따뜻하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왕이면 (공정하게) 모두에게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1)

    아무리 크리스마스이고 연말 정서에 취해 있다고 해도, 법의 힘을 무시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읽은 대목을 정리해두겠다고 해놓고 입 닦는 건 혹 사기죄에 걸리진 않을까? 해서 입막음으로 약간의 시늉은 해두어야겠다. 책들을 펴놓으시길 바란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 책은 지난 7월에 나왔군.) 1부의 제목은 법에서 정의로이다. 제목부터 벌써 기죽이지 않는가? 역자에 따르면, 이는 또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복화술이 법에 고유한 것인지, 데리다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학부시절 법학과 경제학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은 걸 은근한 자랑으로 삼고 있는 나이지만(그러니까 나는 경제를 고의로 무시했던 것인바, 결정적으로 나는 돈 버는 법을 잘 모른다. 안쓰럽게도 이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이럴 때는 (무시가 발각되는 게 아니라) 무식이 탄로날까봐 긴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짐작에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정의의 권리란 말은 데리다의 의도(?)와 무관하며, 다만 프랑스어의 중의적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본문에서 정의의 권리란 말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치는 않지만(한번 읽었기 때문에), 그럴 법한 것이 데리다가 일차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은 법과 정의의 차이/구별이지 않은가?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37) 법은 계산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불어의 droit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란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이다. 법이 정의의 상 아래에서 심판될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받을 수 없으며 (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인 데리다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대로, <법에서 정의로> 1989 10월 미국의 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학술콜로퀴엄에서 발표된 것이고, 이 발표(영어본) 텍스트는 나중에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1992)란 단행본에 수록되었다. 나는 이 책을 제본해서 갖고 있는데, 그걸 구하러 몇 년 전에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십 몇 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법대도서관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법전들을 혐오하는 편이다. 그 일본어투의 한국어들을 말이다. 그런 내가 제 발로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 데리다의 힘이다. 어쨌든 그 영어본과 같이 읽었더라면, 한국어본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바꿔 말하면 효과에 기대어), 현지사정이 그러하질 못하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는 상대적으로 논리적인 언어가 아니다. 구문이 발달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문장에서 성(), (), ()이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남자의 말인지(혹은 여자의 말인지), 한 사람의 말인지(다수의 말인지), 수식어구가 도대체 어디에 걸리는 건지 모호할 때가 많다. 이런 모호성을 법학자나 법학도들은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나로선 궁금하기도 하다. 짐작에 영어나 독어로 옮겨놓고 이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그게 영어/독어로는 이런 뜻이야). 하긴, 우리의 근대법이란 것이 영어, 독어, 일어 법전들을 옮겨온/베껴온 것 아닌가? 법률용어들의 한글화 내지는 한국어화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는 것은 그 때문 아닌가? 거꾸로 말하면, 우리 6법 전서들의 말은 한국어의 외양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외양조차도 상당히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이어서 법의 문턱은 너무 높다(해서, 한국인들은 법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다. 법의 발굽/발치 아래). 그건 공정하지 않다. 저명한 고시서적 저자가 곧 저명한 법학자로 통하는 나라에서는 공정한 것인가?..  

     

    데리다는 먼저 자신이 기조연사로 초대된 콜로퀴엄의 주제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그는 다른 글들에서도 대부분 타이틀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곤 한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해체정의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성마른 연설자로 지칭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수사법도 해체정의의 이런 연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나는 이 사물들 또는 이 범주들 각각에 대해, 그리고 이 유사범주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말해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질서나 분류법 또는 어구에 따라 말할 수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11)

     

    거기서 범주들유사범주들은 문법용어로 말하자면, 실사(實辭)와 허사(虛辭)를 말한다.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단어결합)에서 해체 가능성 정의가 실사(=실질형태소)이고, 가 허사(=형식형태소)이다. 역자는 그리고 정관사 la -라고 옮겼는데, 이 꼼꼼한 번역서에서 옥의 티라 할 만하다. 그리고는 물론 불어의 et(영어의 and)를 옮긴 것일 테지만, et에 해당하는 것이 이며, 정관사 la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번역어구에 대응어를 갖고 있지 않다(이 제목의 불어문구 자체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러니 번역할 필요가 없는 단어이다). 데리다의 말은, 자신이 해체 정의 가능성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그걸 다 결합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에 대해서 말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흔히 하는 말로 주최측의 농간이라는 것).

     

    그는 잠시 자문자답을 하던 끝에 이 문제를 이렇게 일단락을 짓는다: 이 최초의 허구적인(=가상적인) 의견 교환에서부터 이미 법과 정의 사이의 애매한 미끄러짐들이 예고된다. 해체의 고통, 해체가 겪는 고통이나 또는 해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은 아마도 법과 정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과 규범, 그리고 확실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는 규범이나 규칙, 기준이라는 개념들에 관한 문제다.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12)   

     

    자신이 기조연설자로서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숙고/강조하면서 데리다는 (데리다답게) 이 언어의 문제로부터 연설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 그는 불어에는 없고 영어에만 있는 관용표현 두 가지를 인용하는 것에서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 그 하나가 to enforce the law인바(다른 하나는 address란 동사이다), 법을 집행하기(법 집행)이란 내용을 영어/불어/한국어는 각각 to enforce the law(직역하면 법을 강제하기)/appliquer la loi(직역하면 법을 적용하기)/법을 집행하기라고 표현한다. 이 셋은 동의어이다. 하지만, to enforce the law란 영어표현에서 데리다가 끄집어 내고자 하는 내용은 불어에도 우리말에도 없는데, 그건 바로 힘(force)이다. 이 법과 힘의 관계는 오직 영어표현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적용이라거나 집행이란 표현에는 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고로, 이 녀석들이 힘/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해서, to enforce the law를 불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에 대한 직접적인 문자상의 암시를 상실하게 된다.(나의 강조)

     

    어쨌든 이 영어표현에서 강하게 암시되는바,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은 법에 대하여() 외재적이거나 부차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법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법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이다.(15) 요컨대, 힘과 법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칸트의 <법론>에서도 환기되는 바이지만,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 가능성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16)

     

    역자가 계속 적용가능성으로 옮기고 있는 건 우리말의 집행을 뜻한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참에 언급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최상의 텍스트이다(데리다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해체도 시도한 바 있지 않은가. 나는 푸슈킨과 법이라는 테마의 논문도 준비중인데, <자에는 자로>에 대한 분석은 거기에서 일부 다루어질 것이다. 다른 논문을 먼저 써야 하지만, 내 희망은 봄이 오기 전에 그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데리다에 좀 익숙한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법의 힘폭력이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식의 해체가 이후에 진행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암시를 데리다는 이번엔 독어에서 가져온다. 게발트(Gewalt)란 단어에서. 2부에서 그가 자세하게 다룰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의 제목에도 쓰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이 게발트인바, 이 단어는 독어에서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기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17-8)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데리다는 영어에서 =이라는 등식을 가져오고, 독어에서는 =폭력이란 등식을 끌어온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폭력?! 법에 대한 이런 사전정지작업 이후에 데리다는 해체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에 들어간다.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 왜냐?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시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21)이기 때문이다.

     

    해서 가설상 이러한 해체가 고유한 (하지만 불가능한) 장소를 갖고 있다면, 그건 철학이나 문학부라기보다는 법학부, 혹은 신학이나 건축학부가 될 거라고도 데리다는 말한다(그런 이런 관점에서 비판법학이나 스탠리 피시 등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까 데리다를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쪽은 나 같은 문학도가 아니라 법학도이고, 신학도이고, 건축학도이다. 그게 데리다의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해체라는 이름을 지닌 가장 잘 알려진 작업들에서 해체가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24)

     

    그리하여, 데리다가 이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해체 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의의 문제를 전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 일반이 해온 일은 오직 이 문제를 전달하는 일이었는지(25)이다. ,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시작이다. 아니 시작도 아니다(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파스칼과 몽테뉴의 단장을 인용하면서, 그걸 해석하면서부터이다. 데리다가 <팡세>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스칼의 단장은 이것이다.

     

    정의,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Justice, force Il est juste que ce qui est juste soit suivi, il est necessaire que ce qui est le plus fort soit suivi.)

     

    이 대목은 브륀슈빅판의 단장 298번으로 돼 있는데(대부분의 우리말 <팡세>도 이 브륀슈빅판을 옮긴 것이다), 역자가 역주에서 참고로 제시하고 있는 국역본(셀리에판을 옮긴 서울대출판부본)의 번역은 이렇다: 정의, 정당한 것이 추종받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강한 것이 추종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해 보건대(그리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해보건대), 아무래도 역자(혹은 데리다)가 이 문장을 독특하게 읽은 듯하다. 내 불어실력이 고등학교 때보다도 못하지만, 그걸로라도 판단해 보건대, 역자가 지속되다로 옮긴 것은 soit suivi이며, 그 경우 이걸 (영어로 치자면) <be+형용사>(사전을 보니 suivi라는 형용사가 있다. 연속적인이란 뜻)로 본 듯한데, 나로선 <be+과거분사>, 곧 수동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말이다). suivr란 동사의 과거분사 역시 suivi이니까 나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그러니까 suivi는 그 과거분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모양이다). suivr의 뜻은 따르다이다(국역본은 추종하다로 옮겼고, 러시아어본은 복종하다로 옮겼다). 가장 큰 차이는 따르다가 타동사인 반면에 (be+형용사를 동사로 본다면) 지속되다는 자동사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에 하자가 없다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문맥일 텐데, 나는 타동사(수동태 구문)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옮기면: 정의, 정당한 것(=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불가피하다).

     

    이어지는 단장의 내용은 이렇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27)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그런데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힘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정의)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것(=)을 정당한 것(=정의)으로 간주했다는 것. 아주 냉소적인 단장인데, 곧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의해서 힘이 정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알다시피, 미국이 무한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정의 덕분이 아니라 때문이다).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국회의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정의 없는 힘이라면, 파병(연장) 반대힘없는 정의이다. 어떻게 하면 정당한 것이 강해질 수 있을까?

     

    파스칼은 다른 단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28) 러시아어본은 마지막 문장을 관습을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라고 옮긴다.

     

    즉 권위의 신비한 토대는 관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당히 래디컬한 관점이다. 거기에 견주면, 관습법(불문법)과 성문법을 구분하는 상식(적인 관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사실, 관습법이란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가로막는 알리바이는 아닐까? 마치 관습으로서의 법 말고 다른 법이 또 있다는 듯이 암시하는? 비유컨대, 관습법과 성문법의 관계는 니체에게서 은유와 개념의 관계와 같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파스칼-니체적 견해에 따를 때,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따라 위헌이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생각보다 래디컬한 결정이다(이 재판관들을 무슨 8 운운한 김용옥의 견해야말로 상식적이지만 보수적이다). 우리의 재판관들은 법적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성문)헌법이란 그저 닳아빠진 관습헌법에 다름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니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쨌든 우리의 재판관들은 ()의식적으로 법에 대한 자기-해체를 감행했던 것. 해서, 한국은 경이롭게도 (프랑스에도 없을 법한) 해체주의적 재판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은 파스칼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몽테뉴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정당하게도 몽테뉴에게 관심을 돌리는데, <수상록>(혹은 <에세>)의 저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법들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28)

     

    이 대목은 <수상록> 3 12장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수상록>은 전3권의 방대한 텍스트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13(마지막장)에 나온다(러시아어본은 <경험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3권이 모두 완역돼 있다. 2권짜리와 4권짜리로 두 종류). 신용을 얻으면서란 표현은 아마도 credit가 들어간 어구를 번역한 듯싶은데, 그냥 신뢰를 얻으며 준수되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 신용불량자의 경험이 있는 나는 신용이란 말을 싫어한다). 하여간에 몽테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거창한) 정의와 무관하다. 비록 법은 정의를 요구하며 정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해서 이러한 관점은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며, 그러한 비판을 넘어선다.

     

    정의와 법의 돌발(=우발적인 출현)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더 내재적이고 좀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31)

     

    사실 나는 첫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법을 만드는 작용은()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의 의미를 간취하지 못하겠다. 걸리는 건 해석적인 힘, 해석적인 폭력이란 표현이다. 그게 해석적인이 힘/폭력의 수식어인지, 아니면 해석과 힘/폭력이 등가적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해석적인 폭력의 짝개념은 무엇인가? 기술(記述)적인 폭력인가? 해석적인이란 말은 그냥 (오스틴의) 수행적인이란 말로 이해하면 되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어떤 정당화하는 담론도 창설적인 언어활동의 수행성 또는 이 수행성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대하여 메타언어적인 역할을 보증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32) 지배적 해석? 데리다의 메타언어는 없다는 테제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이해는 나로선 장래의 것이다(이해란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인데, 나는 이 대목을 아직 내 식으로 패러프레이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후의 내용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정초의 순간에는 불법적이지도 비적법하지도 않다.(32-3) 같은 지적은 이해하기 쉽다.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또 다른 법)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폭력(게발트)이다. 르네 지라르가 얘기하는 정초적 폭력 같은 게 여기에 대응할 것이다.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적 권의)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이다.

     

    이러한 법의 구조가 해체 가능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 토대에 정초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건축학적으로 어떤 건물이 해체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부실해야 한다). 이러한 법, 혹은 법으로서의 정의와는 대조적으로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해체 그 자체 역시 해체 불가능하다. 해서, 해체는 정의다.(33) 이걸 좀 어렵게 말하면,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34)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이것이(=이러한 정식화가) 명료하리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확신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곧 좀더 명료해지리라고 희망한다. 그것은 또한 성마른 독자인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