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칼럼] 지금은 애도할 시간
데이비드 브룩스/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이번주 신문 1면은 죽은 채로 나란히 복도에 누운 아이들 옆에서 어머니가 울부짖는 사진, 해변에서 죽은 아들 시신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는 아버지 사진 등으로 채워졌다.
인류는 항상 이런 종류의 일들을 ‘대홍수’ 설화로 설명해왔다. 대부분의 문화는 사람들 상당수가 죽고 일부만 살아남아 이를 정화(淨化)의 계기로 삼으며 살아가는 홍수 설화를 갖고 있다. 이들 설화에서 신은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응보의 벌을 준다. 그리하여 인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새로운 역사를 맞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재해에 희생된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든 벌을 받을 만하니까 그렇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홍수 설화에서는 인류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들의 도덕성이 운명을 좌우했던 것이다. ‘신의 분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적어도 활동적인 신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신이 인간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의 끝에는 구원이 있게 마련이다. 요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이번 쓰나미에 대한 얘기들을 주의깊게 보면 이번 사태가 갖는 의미는 ‘무의미’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우주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지표면 위에 붙어있는 ‘각다귀’(벼나 보리의 뿌리를 잘라 먹는 모기 비슷하게 생긴 해충)에 불과하다. 지구가 몸을 한 번 비트니까 14만여마리의 각다귀가 죽는 형국이다. 자신들보다 훨씬 크고 항구적인 힘에 의해 희생되는 모습이다.
이번에 지겹도록 반복됐던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라졌는데 어떤 한 사람은 기이하게 생환했다는 식의 휴먼드라마다. 누구는 행운을 누리고 누구는 불운을 맞는 데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한 아기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다로 쓸려갔고 퉁퉁 부은 시체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고 단지 자연의 무서운 제비뽑기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 우리가 보았던 자연은 자연사 박물관이나 유기농 채소전, 국립공원 등에서 보는 자연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 자연은 도덕과는 무관하고 잔혹하게만 보일 뿐이다. 제 마음대로이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나온 ‘야생(wilderness)’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라이언 킹’에서 보았던 온화하고 규칙적인 생명의 주기, 헨리 D 소로가 쓴 ‘월든’의 자연, 환경운동가 존 뮤어의 자연 등과도 정반대다. 소로는 “우리 생명이 좀더 자연에 적합했다면 우리는 자연의 더위나 추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필요없이 동물, 생물들처럼 자연을 보모나 친구로 여기며 살 것”이라고 썼다. 이번주 자연은 결코 보모나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언론에는 인류가 큰 위기 앞에서 끈끈한 인류애로 얼마나 잘 뭉치는지 성급하게 결론짓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인들의 후한 인심은 물론 놀라웠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스스로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이번 사태를 미담으로 가득 채워 훈훈한 연말연시를 맞을 수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죽은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벌이는 구호금 경쟁에서 보듯 이번 사태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겹기까지 하다. 지금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깊이 애도할 시간이다.
〈정리|손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