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2)

이어서 데리다가 끌어오는 것은 영어에서 address란 타동사이다. 이 동사는 연설하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다 (편지에) 주소를 적다 (편지를) 발송하다 구애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역자는 주로 전달하다라고 옮긴다. 그러니까 address란 동사는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 기조연설에서 (데리다) 자신을 청중들에게 address해야 하며,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문제) address해야 한다. 정확하게 우회 없이. 여기서 특별히 정확성을 문제삼는 것은 흔히 편지/문자(letter)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전달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해체(주의)의 표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러한 표어 혹은 주제를 이 기조연설에서 address해야 하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道斷)을 뜻하는바, 해체의 지배적 관심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그에게 강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의무를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가지 영어표현을 문제삼음으로써 주제화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갖게 된 것은 힘과 정확성, 그리고 정의의 독특한 혼합물(36)이다. 이 혼합물과의 대면은 아포리아의 경험 자체를 요구한다. 먼저, 정의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인지, 욕망, 요구는 자기 자신, 곧 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37) 

 

다시 반복하자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포리아적인 경험들은 정의에 대한, 곧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결정이 결코 어떤 규칙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경험들이다.(37)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법은 정의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권리)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법의 곤궁에 대해 더 파고들어간다. 전달/주소(address)는 방향처럼, 정확성처럼,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데(*주소를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편지/문자는 전달된다. 안 그러면 반송된다), 우리가 정의를 원할 경우, 정당하고자 할 경우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전달/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38)

 

그렇다면,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 하는() 정의의 행위(법관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는 정의, 규칙이나 규범, 가치 명령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에 일치하게(=합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되겠지만,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규칙은 독특성(=단독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고진의 문제틀을 가져오자면, 합법적인 결정/판결이란 건 고유명이라는 단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법은 갑, , 병을 다루지 배용준과 이나영을 다루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데리다는 그러한 확신이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어서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자신이 처한 언어적 상황(영어권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해야 하는 상황)과 계속 비교해가면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까 불어로 말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연설의 주제는 제대로 제시/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제시/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원텍스트는 불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이다.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그렇다. 비록 발표문이 최초의 불어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더라도 이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으며 이 연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우연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39, 나의 강조)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정의가 (불가능한) 아포리아인 것처럼.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 언어의 문제는 어떤 판결이 그것을 구성하는 고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졌을 때 발생하는 불의의 폭력을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건 (이 콜로퀴엄의 담론공간을 넘어서) 더 나아가 동물(재판)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데리다 자신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넌지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동물의 희생은 (인간의)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며, 또한 지향적 주체의 정초 및 (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법의 정초에 본질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법의 기저에 있는 동물 희생과, 양육과 사랑, 애도 및 사실은 모든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전유에서 상호주관성을 구조화하고 있는 상징적이거나 비상징적인 모든 식인 풍습 사이의 친화성(41)과 연계된다(이에 대해서는 애도식인풍습과 관련한, 역자의 용어해설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아주 복합적이며 방대하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간 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42)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걸 통째로 문제삼고 있는 해체를 정의에 관한 윤리적/정치적/법적 물음 및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대립을 유사-허무주의적으로 포기하려는 태도로 간주하는 일부의 피상적인 이해/오해는 (데리다가 강조하거니와) 해체와 무관하다(그들은 엉뚱한 주소지에 가서 해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와는 전혀 반대로, (1)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양하고 있으며(가제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앙가제하고 있다).(43) 여기서 불어의 가제 앙가제는 영어의 gage engage로 옮겨서 이해해도 무방해 보인다. 즉 해체는 정의의 요구에 be gaged 돼 있고, be engaged 돼 있다. 그리고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것이 해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변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애초에 그는 법과 힘(폭력)의 관계를 정식화했고, 이어서 정의와 해체의 (아포리아적) 관계를 진술/전달했다. 암기하기 좋게 말하자면, =(폭력)이고, 정의=해체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의 연관성이다. 정의로서의 법에 대해서 해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에 정의와 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법은 정의가 아니다)이 진정한 구분()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문제는 거기서 종결될 테니까).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집행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법은 힘 아닌가? 그러니 정의가 힘을 얻는 방도는 그것이 법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

 

거기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세 가지 아포리아의 기술이 이 연설의 결론부이다. (1) 어떤 결정(=판결)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59)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고,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요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해서, 이러한 역설로부터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결정이 정당하며 순수하게 정당하다고, 더욱이 나는 정당하다고 현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이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때 읽은 한 동화에서는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인가(동화에서 여자들이 갖는 두 가지 명분이다), 하여간에 한 처녀가 왕으로부터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알몸이어서도 안된다. 말을 타고 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걸어와서도 안된다. 이런 아포리아적인 요구에 대한 현명한 처녀의 해법은 이랬다. 옷을 입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걸쳤고(그건 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을 타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말에 매달고 끌려왔던 것(적어도 걸어오진 않았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법과 정의 사이에 끼인 해체는 내게 그러한 해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해체는 지혜인가?   

 

그리고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흔히 해체는 결정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이해되지만, 그때의 결정불가능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같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는 두 번째 아포리아인바,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53)

 

만약 현전하는 정의를 규정하는 확실성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 해체된다면, 이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작동한다. 물론 이 정의의 이념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환원불가능성은 타자로부터, 타자의 (단독적인) 독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렇듯 결정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며(이 또한 정당하지 않다) 오직 결정(=판결)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이 아포리아의 내용이다(그러니까 정의는 판단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판단의 실행에 있다).  

 

끝으로,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이것이 세 번째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전제로서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다. ,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이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56-7) 따라서 결정은 광기 어린 것이며 신들린(=수동적인) 것이다. 하긴, 정의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 혹은 불가능한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불가능한) 아포리아에 대응하는 것이 광기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데리다가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54)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나 엄살은 아니겠다. 

 

이상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다시 암기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불가능성] (2)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불가피성] (3)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아주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계산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판단하고 결정/판결해서는 안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영역하면, Unaccountable justice orders us to account!)(그러니, 정의도 미쳐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해체 불가능한, 현전 불가능한, 계산 불가능한, 그래서 견적 안 나오는 정의의 구조이며 요구이다. 그리고 해체는 거기에 미쳐 있다. ?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59, 나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들릴 때 우리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망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데리다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04. 12. 26-27.

 

P.S. <법의 힘> 2벤야민의 이름 읽기는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내가 읽기에 2부는 1부보다 수월했으므로 정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1부를 밤새 읽은 것만으로도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건 <법의 힘> 읽기를 제안한 최소한의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였는바, 이쯤에서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면제되고자 한다. 벤야민과 관련해서는 그의 <모스크바 일기>(1926-7)를 구해보고 싶지만, 러시아어로는 번역돼 있는 것 같지 않다(영역은 돼 있을까?). 벤야민에 대해서, 그리고 데리다의 벤야민론에 대해서 몇 마디 하는 일은 다른 계기와 자리가 필요하다.

 

더불어 하름스에 대한 글도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미리 손봐야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지난번 통신문에 실은, 기적에 대한 몇 마디는 일종의 에피그라프인바, 본론은 조금 기다려봐야 도착할 수 있을 듯하다. 정의는 기다리지 않지만, 글은 기다려야 한다.

 

모스크바의 날씨가 예년 같지 않게 포근하다(하긴 최근 2년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고 한다). 비까지 내릴 정도이고, 나는 서울에서 챙겨온 내복을 아직 꺼내보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서울보다도 따뜻하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왕이면 (공정하게) 모두에게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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