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리 ①] 공공의 적, 한미 FTA

인간다운 삶과 자본의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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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니, 갑론을박은 하나의 주제를 두고 설전이 벌어질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FTA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지난 녹음기마냥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한국정부의 모습은 민망할 지경이다. 특히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요구하지는 않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사회공공성 해체에 대한 우려를 무마하려는 모습은, 한국정부가 한-미 FTA를 계기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공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다

미국과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한-미 FTA의 목표다. 시장은 자본의 이윤 동기가 작동하는 공간. ‘하나의 시장’은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이윤동기를 억제해온 공공성의 영역을 침범하기 마련이다.

먹으면 체한다는 한미FTA 파이, 드셔보실래요? <사진 출처: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www.nofta.or.kr>


수많은 FTA들이 집중공략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약품. 한-미 FTA 역시 예외없이 지적재산권 조항을 강화하고 있다. 의약품특허기간을 연장하고 의약품 관련 자료를 독점하며 복제의약품의 생산을 막는 것, 즉 시장에서 약이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는 것이 FTA가 노리는 바다. ‘약이 없어 죽을 수는 있어도 돈이 없어 죽을 수는 없다’던 환자들의 절규에 ‘돈이 없으면 차라리 죽으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의약품을 더욱더 시장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노력은 공공의료제도를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호주의 공공의료제도인 ‘의약품급여제도’는 의약품을 싸고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미국과 호주가 FTA를 체결한 이후 이 제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한국 정부의 협정문 초안에도 있는 ‘투명성’이라는 문구가 이 제도를 흔드는 무기가 되었다. 협정에 관련된 국내 제도와 절차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협정과 관련한 행정조치 등에 대해 행정적, 사법적 검토와 재심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 ‘투명성’이 요구하는 바이다. 이는 의약품의 판매를 허가하고 약값을 산정하는 절차에 제약자본이 공식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이런 불편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협정문 초안의 8장 ‘투자’에서 보장하고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이미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투자자인 기업이 투자유치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보장된 NAFTA는 멕시코와 캐나다 정부의 환경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공공정책을 자본의 이해에 맞춰 해체하는 것이 바로 FTA가 불러올 사회공공성 해체의 실상이다. 그러나 인권이 협상의 대상일 수 있는가.


권리는 내어주고 의무는 팽개치고

자본이 공공정책에 개입해서 더욱 많은 것들을 시장으로 가져가는 동안, 이 과정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좁혀져 간다. 이미 FTA 협상 개시에서부터 민주주의는 훼손되어왔다. 민중의 권리가 도마에 올라있는데도 FTA와 관련된 절차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어떤 집단과 어떤 규칙의 교역을 할 것인가에 대해 민중이 발의할 수 있는 구조는 언감생심이라고 치자. 그러나 정부의 보고서 하나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입법부의 ‘능력’은 어떻게 봐야 하나. FTA를 체결해온 수많은 국가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잽싸게 협상을 추진한다고 경축해야 하나.

이에 뒤질세라 사법부 역시 이미 신통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작년 9월, 전북 학교급식 조례안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위반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그것이다. 부실한 학교급식이 여론의 뭇매를 수차례 맞은데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놓인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여론을 울리던 당시,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은 분명 용감한 것이었다. 더구나 국제기구나 초국적자본의 명시적 압력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국회 비준을 거쳐 공포.시행된 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헌법 6조1항을 즐겨 내뱉는 사법부가 무역협정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면서 유독 사회권규약 등 국제인권조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과연 무지의 소치일까. 대법원의 판결로 ‘식량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제3자의 힘이나 경제적 지배에 의해 박탈되지 않도록 입법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보호할 의무’는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진 것은 농민들의 생존권과 어린이들의 식량권, 건강권이었다.


불평등은 정부의 힘?

정부 역시 민중의 권리를 내어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는 FTA에서 초․중등 교육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제주특별자치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목적의 각급 외국교육기관이 설립될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다. 외국의 유수 대학을 유치할 때는 토지 무상 임대뿐만 아니라 연구비, 장학금 등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그래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교육비용을 붙잡아두겠다는 알량한 고뇌를 기특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공교육의 붕괴로 인해 계층별 교육 격차가 구조화되고 교육불평등이 빈곤을 악순환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교육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해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외국대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면 미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왔는데, 이 기회에 확실히 1위 자리로 올라서겠다는 것인가.

인권에 대한 정부의 몰이해는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산업자원부는 ‘제조업 등 무역조정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농축산업, 어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분야의 피해에 대해서도 지원을 하도록 했다.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누군가 피해를 볼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피해의 규모를 터무니없이 작게 예측하고 있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이런 법률 쪼가리가 각종 인권후퇴에 대한 보완책이 될 수 있는지를 엄중히 물어야 한다.

지난해 7월 단전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문제되면서 산업자원부가 들고 나온 소전류 제한기만 봐도 인권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확연히 드러난다. 사용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는 110W로 사용할 수 있는 전류가 제한되도록 한 것. 냉장고를 켜놓으려면 TV는 볼 수 없고 형광등은 두 개까지 켤 수 있는 전력인 110W는 인간다운 삶, 바로 인권의 존재이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부가 FTA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놓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실상을 보자. 제조업의 피해는 고스란히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으로 떨어진다. ‘외부의 충격을 통한 내부 개혁’이라는 한-미 FTA의 목표는 비정규직 노동의 확대, 노동권의 후퇴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전기를 끊어놓고 제한된 전류로 삶을 묶어놓는 소전류제한기와 노동권을 박탈한 후 지원을 통해 피해를 보완하겠다는 시도는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보장하는 것이 인권이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로운 노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권이다. 줄 수 있는 만큼 받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노예계약일 뿐이다.


공공성의 해체는 인권의 부정

세계인권선언에도 규정되어 있듯, 인권의 보편성은 ‘모든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의 보장을 요구한다. 과연 FTA는 모든 권리와 자유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필연적으로 민중의 권리를 배제해가는 과정인 FTA는 단지 인권을 후퇴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공공성의 해체를 통한 인권의 부정, 그것이 FTA의 정확한 실체다.

지난해 11월 나온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보고서는 “자유무역협상들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무역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발표된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는 경제성장의 몫이 결코 빈곤층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한-미 FTA에서 어느 나라가 더 이익을 볼 것이냐를 셈하는 것은 도박판의 양편에 누가 앉아있는지를 보지 못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자유무역에서 나오는 열매들은 공공성의 영역에서 시장으로 넘어가 자본의 손아귀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이다. 이 화살표가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방향과 정확히 동일한 지점을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FTA 저지를 넘어 공공성 확보에 나서야

인권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공공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싸움들을 열어젖혀야 한다. 자본에게만 열린 영역들을 민중에게 열리도록 돌려놓아야 한다. 자본이 공중파방송에 프로그램 편성비율을 늘려달라고 하면 방송노동자와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편성에 개입할 수 있는 경로를 요구해야 한다.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표현의 기회를 넓히고 표현에 필요한 물적 조건을 공공이 보장하는 질서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위기에 놓인 우리들의 삶이 인간다워질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인권이다. 그것이 실현되는 질서는 과연 시장에 있는가, 공공성의 영역에 있는가. 모든 곳에서 인간다운 삶과 자본이 격돌하고 있다. FTA 협상의 진행에 주목하고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인권의 역사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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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2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공공성과 인권을 연결시킨 좋은 논의네요. 좀 퍼가겠습니다.

balmas 2006-05-2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
그렇게 하세요. :-)
(추천까지 해주시고 ... ^^;;)
 
 전출처 : waits > [펌/민중의소리] "장애인 격리하지 마라", 유시민 장관에 맹비난

 

"장애인 격리하지 마라", 유시민 장관에 맹비난
정부 장애인시설 확충 방안, 자립생활 도모하는 장애인 노력에 찬물
윤보중 기자    메일보내기  

  

△24일 장애인들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8회 장애인차별철폐 행동의 날을 가졌다. 이들은 장애인수용시설 확충 반대와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촉구했다. ⓒ민중의소리 맹철형기자

  
  보건 복지부는 올해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매해 60-70개의 장애인 수용시설을 확장해 총 271개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시설 신축에 따라 장애인 1만 800여명이 추가적으로 수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장애인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시설에서 고립된 삶이 아닌 사회로의 통합"을 외쳤던 장애인 단체들의 요구에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어서 큰 반발이 예상된다.
  
  특히 23일 김포의 미신고 생활시설에서 시설주가 장애인들에게 강제로 신경안정제를 수십 알식 먹여 6명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이같은 정부발상에 대한 비판여론은 더욱 가세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사회복지시설생활인인권확보를위한연대회의,밝은내일회 4개 단체는 24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철창 1인 시위에 돌입했다.
  
  밝은내일회 김보건 간사는 "우리는 결코 시설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밥도 같이 먹고 학교도 같이 다니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고 말한 뒤 "정부는 귀를 틀어막은채 탁상공론만 하고 있다"며 장애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보건복지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빈곤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도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 시설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보다는 장애인의 소득을 보장하고 중증장애인에게는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의선 사무국장은 "정부는 시설수용의 입소 대상으로 저소득 장애인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은 돈 없는 장애인을 사회와 격리시키겠다는 말도 안되는 정책"이라며 보건복지부를 규탄했다.
  
  장애인참교육부모회 김경애 회장은 이전에 국가인권위 실태조사의 일환으로 김포의 시설을 방문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언론은 지난 23일의 장애인 6명에 대한 살인사건을 인면수심의 목사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로 치부하지만, 관계기관의 묵인과 유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관할구청의 책임을 물었다.
  
  한편 이 날 기자회견에는 서울시의회선거에 출마한 중증장애인 박정혁후보가 참여해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매일 11시부터 1시까지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철창 1인 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며 △ 김포 미신고시설에서의 장애인 살인사건은 정부가 방치한 문제이므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즉각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 보건복지부는 장애인 수용시설 확대 계획을 전면 폐기하고 △ 보건복지부는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를 즉각 약속하고 △ 보건복지부 장관은 앞선 세가지 사안에 대해 성실한 답변을 마련해 즉각 면담에 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4일 장애인들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8회 장애인차별철폐 행동의 날을 가졌다. 이들은 장애인수용시설 확충 반대와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촉구했다. 한 장애인이 장애인수용시설에 쳐밖혀 있을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과 함께할 권리가 있다며 절규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맹철형기자

  
△ 24일 장애인들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8회 장애인차별철폐 행동의 날을 가졌다. 이들은 장애인수용시설 확충 반대와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촉구했다. 한 장애인이 통해 금지 표지판 앞에 서있다ⓒ민중의소리 맹철형기자


2006년05월24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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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은 실재하는가” … 텍스트의 역사성 인식을
해외동향_‘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번역 계기로 유태인 담론 새롭게 읽기

2006년 05월 22일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유태인의 비밀을 그의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비밀을 실제 유태인에게서 찾자. 유대주의의 세속적 토대는 무엇인가. ‘실용적’ 욕구, 개인적 이해. 유태인의 세속적 숭배는 무엇인가. ‘거래’. 세속적 신은 무엇인가. ‘돈’. 옳거니!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유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로구나.”

 
마르크스의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2부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아직까지 반유태주의 혐의를 받는다. 로베르 미스라히는 심지어 ‘마르크스와 유태인 문제’(1972)에서 이 텍스트가 “인종 청소를 호소하는”, “19세기의 가장 반유태인주의적인 저서 중 하나”라고까지 말한다. 소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유태인문제고찰’(1946)이나, 알랭 바디우의 ‘정황 3권, “유태인”이라는 단어의 효력들’(2005) 역시 반유태주의 논란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르트르의 책은 2차대전 직후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문제를 다루면서 쇼아(Shoah) 문제에 대해 함구했다는 이유로, 바디우의 책은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유태인들이 유대율법이나 전통을 통해 간직해온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다. 이런 논란 속에서 최근 장-프랑수와 프와리에의 번역과 다니엘 벤사이드의 주석으로 이뤄진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의 역간은 단순한 고전 재번역 이상의 현실적 개입의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 문제’를 다루는 위 세 저작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목을 배신한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유태인 문제의 자리를 옮긴다. 가령, 마르크스는 브루노 바우어가 유태인의 정치적 해방과 종교 문제를 ‘철학적·신학적’ 행위로 환원하던 것을 권리담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세속적 정치문제, 나아가 인간해방의 문제로 전치시키고, 사르트르는 그것을 반유태주의 문제로 전치시키며, 바디우는 그것을 자기부정을 통한 ‘보편적 주체’의 문제로 전치시킨다. 다시 말해 유태인 문제에 유태인은 없다. 왜 그럴까. 이들은 공통되게 유태인은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맑스가 말하듯이, “유대주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유지됐다”―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미리 가정된 유태인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아니라, 유태인을 생산하는 담론-실천 메커니즘을 추적하거나[유태인은 반유태인주의에 의해 생산됐다!], 그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유태인도 아랍인도 더 이상 없다!]을 제시하는 데 있다.


요컨대, 유태인을 옹호하는 자들과 거리를 두고 철학적 개입을 하려는 자들 사이엔 “유태인이 (우리가 다뤄야할 문제의 대상으로서) 실재하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있는 것이다. 양 진영의 대화 불가능성 혹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세 저작에서 자리 옮겨진 채 제기되는 고유한 질문들이다.


첫째, 사르트르는 “유태인은 다른 사람들이 유태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 즉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반유태인주의”라 본다. 따라서 유태인 문제의 진정한 쟁점은 반유태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다. 특히, 그는 반유태인주의를 통해 공무원, 임노동자, 소상인들이 (상상된) 유태인들에 반대하면서 그네들이 한 문화, 한 국가의 소유자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고 봤다. 이를 두고 사르트르는 “반유태인주의는 貧者의 스노비즘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 나라는 이 나라 사람에게’라며 타자를 배척하고 자신이 그나마 나라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며 상상속에서 안도하는 인민들. 이들에 기생하는 극우파들. 여기서 “유태인”이란 이름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종주의 담론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과는 “다른”, 자신(의 일자리 및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유적 이름일 뿐이다. 


둘째, 바디우의 유태인 담론은 그의 이전 책,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1997)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책은 “바울이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이타성들(유태인, 그리스인, 여성, 남성, 노예, 자유인 등)로부터 출발해 어떻게 보편적 사유가 같음과 평등(더 이상 유태인도 희랍인도 없다)을 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유태인은 스스로의 특수성(정체성을 부여하는 술어들)을 부정하지만, 이 과정에서 돌출하는 보편적 특이성을 갖게 되는 주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유태인 국가’를 자처한다면, 더 이상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반유태인주의적인 나라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 모색, 유럽통합 과정에서 기존의 국적을 그대로 유럽 차원으로 확장하는 배타적 주체화를 넘어서, ‘유럽인’이라는 기존의 술어를 버리는 과정 속에서 생산되는 도래할 ‘주체’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어떤가. 1816년 5월 4일 칙령 이후, 독일 유태인들이 공직에서 배제된 사건, 그리고 1840~42년간의 브루노 바우어의 텍스트에 대한 응답이라는 특정한 배경을 갖고 있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유태 민족’, ‘시오니즘’, ‘반유태주의’ 등이 문제되기 이전의 글임을 잊어선 안된다.


대부분의 비난들은 이처럼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것들이다. 더불어 벤사이드는 글 첫머리에 인용된 난감한 구절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안한다. “유대주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이라는 이름을 아직 받지 않은 체제를 부르기 위한 잠정적인 별명, 혹은 자본주의의 정신이 될 것에 대한 은유적이지만 다소 부정확하고 초보적인 명명이었다”는 것. 이제, 맨 처음에 인용된 구절에서 유대주의를 자본주의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얻게 될 것이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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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3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전출처 : 라주미힌 > 노무현 정권의 비밀 - 손석춘

 

비밀은 전략의 고갱이다. 영국 속담이다. 기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속살을 숨긴다. 아무 것이 없을 때도 마치 뭔가 있는 듯이 어루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권이 목매는 풍경을 두고 곰비임비 추측이 이어진다. 어떤 비밀이 있을까. 보수는 물론, 수구세력 일각에서도 갸우뚱한다. 왜 그럴까. 양극화를 해소한다면서 양극화를 부채질할 협정에 저돌적인 노 정권의 깜냥을 저들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다. 대한민국의 미국 예속으로 벅벅이 분단체제를 영구화할 협정을 아무런 여론수렴도 없이 강행하는 노 정권 앞에 군부독재 세력까지 입을 다물지 못해서다. 그래서다. 장안의 화제다. 언제나 정치인 노무현의 ‘깊은뜻’을 헤아리는 지지자들은 여러 가지 ‘비밀’로 풀이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를 내세운다.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보장받았다는 ‘큰거래’설이 나돈다. 하지만 개성공단이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조지 부시 정권의 살천스런 눈초리가 풀리는 조짐은 없다. 현실은 거꾸로다. 자유무역 협상과 동시에 노 정권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까지 덥석 받아들임으로써, 동북아 정세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진실은 미국의 ‘보장’을 받아 진전되는 남북관계는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또다른 비밀은 미국의 압력이다. 수출로 살아가는 한국 경제가 미국 압력을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다. 노 정권을 비판할라치면, 대뜸 현실을 모른다고 시쁘게 여긴다. 하지만 압력론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 손사래쳤다. “어떤 압력”도 없었다며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하여 우리가 제안하여 성사된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결국 ‘큰거래’도 없고 압력도 없었다.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 대통령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이 많이 걸려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생각은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도 불거진다. 그가 “책임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며 제안한 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신감”이다. 결국 비밀이 있다면 하나다. 대통령이 거듭 밝혔듯이 자존심이다.

자신감과 자존심. 딴은 좋은 말이다. 카네기 따위의 성공처세술에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일찍이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경고했다. 어리석은 권력자들이 지니는 게 바로 자존심임을. 게다가 자신감이 무지를 밑절미로 할 때 폐해는 무장 커진다. 아니, 차라리 자신의 무지를 알면 전문가나 지식인에게 귀라도 기울인다. 가장 큰 문제는 어설프게 아는 일이다. 대통령이어서 더 그렇다. 최고의 의사결정권을 지닌 걸 마치 최상의 판단력을 갖췄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보라.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사뭇 진지하게 자처하는 모습을. 썰렁한 희극이다.

임기 내내 자신의 실정을 언죽번죽 남 탓으로 돌려온 대통령의 언행에 비추어본다면, 최악의 ‘비밀’도 가설이 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때, 경제 실정을 모두 그 탓으로 돌리려는 정략은 아닐까. 임기를 마치며 진보세력의 무책임한 반대로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노라고 실패를 합리화하지 않을까.

노 대통령은 자유무역 협상을 강행하며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문했다. 실소를 머금으며 명토박아 둔다. 이땅의 민중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무책임한 자신감이 없을 뿐이다. 도박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남 탓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다. 국민의 자존심 걱정은 접기 바란다. 겸손하게 대통령 자신을 성찰할 때다.


-손석춘 칼럼-[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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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늦봄,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

[매일신문 2006-05-17 14:06]


15일 오후 5시 35분. 베트남 이주노동자 A(25)씨가 성서공단 내 한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숨졌다. 산업 연수생으로 대구에 들어와 공단 생산 현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정확하게 3년 40일이 지난 날이었다.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는 '과로사'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상담소가 입수한 그의 4월분 월급 명세서에 따르면 A씨는 4월 한 달간 단 이틀밖에 쉬지 못했다. 그는 주·야간 번갈아가며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을 일만 하다 이국 만리에서 쓰러진 것으로 상담소는 보고 있다.

지난 1월 25일에 베트남 이주노동자 B(26) 씨가 기숙사에서 잠을 자다 돌연사했다.

이주노동자 인권단체들은 "이주 노동자들이 법정 근로시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1일 8시간, 주 40시간은커녕 밤낮 없이 연장, 야간 근무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

근로복지공단 대구지역본부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대구·경북 산업재해 인정건수는 2003년 176건, 2004년 220건, 지난해 155건. 이 가운데 사망은 2003년 4건, 2004년 3건 지난해 3건. 올해는 성서공단 한 곳에서만 벌써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김경태 목사는 "인권단체들이 대신 산업재해를 신청해주지 않으면 업주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아예 산재사실을 모르는 이주노동자들이 허다하다."며 "실제로는 훨씬 많은 산재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대구지역사회선교협의회, 이주노동자인권문화센터, 이주여성인권상담소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근로기준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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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녁 6시부터 새벽 5시 정도까지 하는 야간 주방보조 알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단 3일을 하는데도 일주일 전체의 리듬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과 이길 수 없는 졸음... 과외 하면서 졸고...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와 부모한테는 참 미안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주야 교대로 일하던 사람들도 야간에만 일하는 걸로 바꾸는 경우가 많아졌다.

며칠 전에 만난 N 씨는 새벽 3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한다고 했다..

이런 근무시간이라면... 대체 생활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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