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내가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1번을 찍었을 때 2번에다가 투표를 했고, 나보다 못사는 준부자들마저 한나라당을 열심히 지지하는 판에 지난 총선에서 민노당에다 투표를 했다. 이유?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이념이란 과연 뭘까. 자기 처지에 맞게 투표를 하는 걸까, 아니면 옳다고 믿는 쪽에다 투표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이 석권하다시피한 소위 강남벨트를 내가 결코 비난하지 않았고, “거긴 그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는 걸 보면 ‘처지론’에 기울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집 자식이었던 내가 지금껏 소위 보수에 단 한번도 투표하지 않은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거기엔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게다가 생각을 하며 산 게 얼마 안되서 판단 같은 것도 주체적으로 내리지 못한다. 진보적인 책을 읽기 시작한 97년부터, 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눈치를 봤다. 어느 게 옳은 것일까, 한겨레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처음에는 책에 쓰인대로, 한겨레에 난대로 말을 했다. 지금은 혼자 판단을 내리지만, 그건 오랜 기간의 학습을 거쳐 그들의 틀에 자신을 맞춘 것일수도 있다. 그점을 의식하고 한겨레와 다른 시각을 가지려고 내 딴에는 노력을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조선일보는 늘 틀리고, 한겨레는 대개 옳다. 젠장.


요즘 한겨레에는 고교등급제에 대한 비판 기사가 연일 실린다. 명문대학이 사실상 고교등급제, 그러니까 실력있는 고교 출신이면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 요지다. 조선일보를 보면 고교등급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고교평준화는 깨져야 하고 이미 깨져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양측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겠지만, 난 이번만큼은 한겨레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고교의 격차는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상태며, 강남과 강북의 학력차를 무시하고 일괄적인 내신을 적용한다는 게 말이 안되어 보이니까.


신문을 보니 챔피언스 리그의 조편성이 나왔다. 유럽 축구의 명문구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는 게 바로 챔피언스 리그, 하지만 그 출전팀의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 세계 최강의 리그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4팀이 나가고, 네덜란드에서는 아인트호벤 한팀이, 터키는 단골팀인 갈라타사이가 아니라 처음 듣는 이름을 가진 팀이 나온다. 러시아도 한팀, 우크라이나도 한팀, 이렇게 모인 팀들이 32개다. 축구강국 프랑스 같으면 자국 팀도 4팀이 나가야 한다고 강짜를 부릴만도 한데, 세팀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선 거의 열팀이 출전하고, 나라수가 많은 아시아는 티켓이 겨우 4장이다. 하지만 8강에 오르는 나라가 대부분 유럽인지라 아시아의 티켓을 늘리는 건 매우 비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고교등급제도 바로 이런 것이리라. 강남의 10등이 강북의 2등보다 학력이 높다면 그걸 인정하는 것. 닭의 머리보다 용의 몸통을 우대하는 것.


반면 메이져리그 야구는 그렇지 않다. 선수를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명문구단 보스톤은 언제나 조 2위다. 더 명문팀인 뉴욕 양키스와 같은 조니까. 지금 세경기차로 따라붙긴 했지만, 보스톤이 1위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행히 2등 세팀 중에서 한팀이 올라가는 와일드 카드제가 생겨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보스톤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반면 중부지구는 매우 약하다. 돈도 없는 미네소타 같은 구단이 엄청난 경기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승률은 보스톤보다 2푼6리나 낮다. 그래도 미네소타는 남은 경기에서 반타작만 하면 포스트시즌에 나가는 반면, 보스톤은 다른 2위팀들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보스톤으로서는 억울하지 않겠는가.  내셔널리그 최강으로 15년째 지구우승을 확정지은 아틀랜타와 같은 조에 속한 필라델피아와 뉴욕메츠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거다. 우린 왜이리 운이 없냐고. 하지만 플레이오프는 승률이 아니라 누가 1위를 했는가를 우선시하니,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수밖에.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걸까. 메이져리그는 억울한 패자를 낳지만, 그래서 더 인기가 높다. 하지만 애들 공부는 흥미 위주의 게임이 아니며, 억울한 패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평준화주의자로 생각해 왔지만, 이 글을 쓰다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34890
     
paviana(mail) 2004-09-15 11:16
제 생각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
대학에 그정도의 자율권은 줘도 되지않을까 하는게 제생각입니다.
부리님 서재 일등이네요..아이 좋아라~
부리(mail) 2004-09-15 11:20
호홋, 파비아노님 2등!!
sweetmagic(mail) 2004-09-15 11:25
바람직한 무한 경쟁의 측면에서 고교평준화에 극히 반대합니다.
문제의 시각적 차이는 공정함, 평준화 인 것 같은데... 지금의 고교 평준화는 평준화가 아니라 획일화 같습니다. 교육은 세상 어떤 것 보다 가장 평등한 기회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획일화와 다른 겁니다. 실력은 실력이되 공부만 실력 평가 대상이 되선 안됩니다. 특성화된 교육이 특성 분야 별로 차별있는 경쟁이 가능해야 양질의 인재들이 길러질 것입니다. 대학 신입생이 열 아홉 스물인 것이 너무나 당연한 지금의 인식이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은 정말 학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시기에도 무리없이 공부 할수 있는 교육문화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무조건 대학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거 바뀌어야 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 나왔다고 웬지 주눅 드는 거 바뀌어야 합니다. 모두들 각자 흥미에 맞고 취향에 맞는 분야의 프론티어가 전문가가 되어야 하며 그 기회의 장에는 철저한 실력제가, 무한 경쟁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만약에 제가 아이를 원해서 - 입양을 하든, 혼자서 낳든, 결혼해서 낳든 -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한 제시를 하고 자기 적성을 찾기 위한 일을 도와 주는 것 만 할겁니다. 철저히 자립시킬 것이며..대학 교육을 일정 시기에 강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토론문화하나 정착 안되어 있는 정보전달에만 열혈한(?) 일방통행 같은 지금의 대학교육 현실.... 대학이 무슨 학원 입니까 ???
꼬마요정(mail) 2004-09-15 11:34
하지만 고교시절부터 생기는 계층의식이나 우월주의 같은 건 어쩌죠? 그 예로 울산을 보면 그렇잖아요...서울대를 없애자는 둥 그런 말도 나오지만 정작 실천이 안 되는건 그 학교 출신들이 다 잘되어 그걸 막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요...

아무튼 너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tarsta(mail) 2004-09-15 11:40
상식적으로, 장기적으로 볼 때 고교 등급제는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재는 키워져야 해요. 공부뿐 아니라 예체능에 봉사점수까지 따지는 고교 시스템은 팔방미인을 요구합니다. 그런 시스템에서 천재는 낙오되기가 더 쉽지요. 천재 하나가 평범한 사람 몇백명을 먹여살린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시대에 그런 시스템은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만족스럽지 못한 교육현실때문에 이미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 일찌감치 해외로 아이들을 내보내죠.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에서 등급제를 시행하면 반대급부가 더 심할겁니다. 인맥으로 해결하는 줄타기가 더 견고해질 것이라는 우려와, 비정상을 넘어 기형화된 사교육시장 때문이에요.
WASP 같은 부류가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물 위로 드러나겠지요. '새로운 KS'(경기고-서울대)가 생겨나게 된다면, 과거의 KS 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강한 힘을 만들어 그걸 절대 놓지 않을껍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같은거, 기대도 못할 분위기에서 생겨나는 또하나의 기득권층은 이미 사회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그래도 쉬쉬해가며> 하던 일들을 드러내놓고, 훨씬 지능적으로 하려 들껍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선일보가 고교등급제를 찬성한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워보여요.
미쳐가는 사교육때문에 이미 많은 고교생들은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EBS라거나 생각있는 몇몇 '스타강사'에 의한 무료 강의니 하는게 가끔씩 나오고 있지만, 기업화 된 학원들과는 게임이 되지 않고, 게다가 훨씬 더 근본적으로, 인터넷은 구경도 못하는 고교생이 아직도 많이 있어요. 억울한 고교생이 나오지 않도록, 이라는 이유라면 더더욱 고교 등급제는 시기상조입니다. 돈이 있는 부모들은 명문대 입학률이 높은 고교에 자식을 입학을 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교육비를 쓸거에요. 중학교 대상 사교육시장도 더 확대되겠죠. 이게 현대판 음서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살벌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변화의 흐름을 기대한다는게 무리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문제점들이 정서적으로, 국가차원의 시스템 문제로 해결되지 않는 한.. 차라리 고교 평준화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등급 따기 힘든 좋은(=합격율 높은) 교교에 가느니 내신 잘 받을 수 있는 보통(?)학교에 아이를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해외로 빠지는 유학비를 생각해봐, 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교육시장이라는 블랙홀은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tarsta(mail) 2004-09-15 11:55
제 대안은 언제나 <이 문벌주의를 없애야 해!> 였죠. 교육을 차별화(다양화, 라는 의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해야 한다는 스윗매직님 의견에 백프로 찬성입니다. 마이스터 제도 같이 기술자도 동등히 우대받는 사회만이라도 된다면 고교등급제도 충분히 가능성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대학 교육을 일정시기에 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 저랑 너무 똑같습니다. ^^
sweetmagic(mail) 2004-09-15 11:44
제 말이 지금의 현실을 무시하고 매우 지나치게 이상적이게 들릴 것도 같다 라는 생각도 합니다만...계층의식이, 우월의식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시각이 고교평준화라는 이름으로 실력 획일화를 만들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대학은 학문하는 곳으로, 전문대학은 실용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철저한 실력주의로 경쟁하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 출신과 전문대학의 출신이 그냥 단지 다른 분야를 공부한 또는 익힌 사람들이라는 차이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식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이라는 단어가 필요 하지도 않을 만큼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인데... 답답 합니다.
의식 변화의 문제가 수반 된다면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우루루 움직이는 데 익숙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이빨 안 먹힐 얘기 란거 압니다. 갑자기 제 처지가 답답하네요.
마태우스(mail) 2004-09-15 11:52
스윗매직님/님의 글도 아름답지만, 1등을 기꺼이 양보한 게 더더욱 아름답습다. 이미지 안바꾸신 거 제 반대 때문이죠?^^
타스타님/코멘트로 남기엔 너무 아까운 글입니다. 저도 그래서 평준화를 지지하는데요, 대학에서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는 거를 막는다는 게 과연 옳은 건지 싶네요. 국가 차원에서 교육을 전적으로 해결해 준다면 평준화를 깨도 되겠지만 지금처럼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선 평준화를 깨는 게 무리죠. 고교등급제에는 찬성하고 평준화도 찬성하는 게 과연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마태우스(mail) 2004-09-15 11:54
꼬마요정님/님의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애들이 중학교 때부터 입시에 시달리는 게 과연 좋은가 싶구, 어려서부터 계층별로 층이 갈라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여간 전 모든 문제의 근원에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서열화에 있다고 보고요, 서울대 폐지를 위해노력할 겁니다. 근데 그게 잘 될까요...
마태우스(mail) 2004-09-15 11:54
근데 내가 왜 부리 서재에서 답을 하고 있는걸까.
tarsta(mail) 2004-09-15 11:58
(풉.! ^^)
sweetmagic(mail) 2004-09-15 12:06
ㅎㅎㅎ 될까요 ? 라 물으셨지요. 님 혼자서요 ?? 절대 안돼지요.
저희가 할겁니다. 어떻게 할거냐구요 ? 그냥 무관심 할 겁니다.
서울대가 사랑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 보고 다시 사랑할지 안 할지 결정할갑니다.
서울대는 폐지 되어야 할것이 아니라 개혁 아니 변화 해야 하는 것 뿐입니다.
의식 변화이지요.
서울대가 지금 까지 이바지 해 온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희가 무관심 하기 전에 서울대 스스로 서울대로 부터의 변화가 생기길 바랄뿐입니다.
sooninara(mail) 2004-09-15 12:24
고교등급제가 되던 획일적인 평등화가 되던..부모입장에선 아이에게 가장 좋은것을 주고싶은 거라서..분명히 부작용은 생길겁니다..대학입학시험 한번에 목숨을 걸던 예전의 입시제도는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실력을 정당하게 비교한다는 장점도 있었던것 같아요..
요즘은 중학교때부터 수행평가에 엄마들이 목숨걸고 다 챙겨줍니다..시험외에 수행평가 점수가 중요하고..엄마가 같이 챙겨주어야 일정한 점수가 나온답니다..기술시간에 필통만들기 숙제에서 아크릴판 사가지고 간판집에 잘라달라고 가져간 엄마가 바보됐다고 하더군요..
이미 만들어진 필통 완성품에 이름만 써서 팔고 있어서..가지고간 아크릴판은 놔두고 완성품 사가지고 올수밖에 없었다구요..시험외에 모든면에서 완벽한 슈퍼맨을 만들어야하는 내신으로 대학가기는 더 엄청난 비리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우리아들,딸이 서울대 못가더라도..특수고등학교 못가더라도..잘난 놈들은 더 키워주어야하는것이 우리나라 경쟁력을 위해서 필요한것이 아닐까요? 이미 우리나라안에서 경쟁하던 시대가 아니고 전세계와의 무한경쟁 시대인데..이해찬세대이후로 학력은 점점 더 떨어져만 간다고 하는데...외국에선 오히려 공부잘하는 아이들만 대학가려고 고등학교때 공부하고 그외에는 직업학교가 발달되어있어서 문제가 적은거 아닌지요? 유럽쪽은 그렇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란 상고나 공고나..자격증따서 대학에 특례입학하는 중간코스로 보는경우가 많더군요..
고등학교에서 직업훈련은 아예 없어진거 아닙니까...우리때는 가정형편이 어려우면 반에서 5등안에 들어도 여상가는 아이들도 있었는데..이젠 그런 여상 명문도 없어진지 오래라는...
sooninara(mail) 2004-09-15 12:34
한참 수다 떨다보니,,중요한걸 안썼네요..^^
저도 부리님 의견에 찬성입니다..이미 차이가 있는걸..짧은것은 길게 늘리고..긴건 잘라서 침대길이에 맞추는 짓은 웃길것 같아요..(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던데..생각은 안남)
부모에 따른 재력에 따른 실력차는 생길수밖에 없잖아요? 무조건 눈감고 그런거 없다..없어야한다고 하는것은 불가능할듯...군사독째때처럼 사교육 금지시켜도 비밀과외는 돈있는집은 다 하잖아요..과외금지세대라서 놀긴 실컷 놀고 대학도 갔는데..요즘 아이들이 불쌍해요..
초등학교1학년부터 엄마들의 마음가짐이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갈대(mail) 2004-09-15 13:23
저는 '무한경쟁'이라는 시스템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경쟁에는 평가가 뒤따라야 하는데, 이 평가가 어떤 것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교육의 방향이 한정되고 결정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미래의 돈벌이가 걸려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공부할 수도 없습니다. 또 경쟁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적대감과 배척, 집단 분열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재'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백만 명에 한 명씩 나올까 말까 한 천재를 염두에 두고 교육을 결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우수한' 학생들을 염두에 둔다면 모를까.
mannerist(mail) 2004-09-15 13:56
고교등급제를 실천하자는 사람들이 눈감는 사실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하는 "권리"의 크기와, 주거지 근처에서 학교를 골라야 하는 현재 고등학교 "선택권"의 크기와 똑같은가요? 그리고 과연 강남지역의 애들 성적이 평균적으로 높은 게 고등학교의 교육 탓인가요? 고등학교를 고를 선택권이 배제된 상태에서 실시하는 고교등급제는 집이 어디인가에 따라 출발선이 달라지는 단거리 달리기 경주를 시키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지금의 고교평준화 내신 구조가 문제 없는 건 아닙니다. 대학의 고충은 내신 성적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지금 고등학교 시험 문제들 보면 정말 골때립니다. 될 수 있으면 얘들 내신 잘 주려고 평균은 80-90점대로 치솟습니다. 보충교재 문제집 숫자도 안 바꿔 낼 뿐더러, 쉬운문제에 배점이 크고, 어려운 문제에 배점이 작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같은 반의 1등과 5등 차이는, 누가 실력이 좋나 보다 누가 더 실수를 안 하는가 차이입니다. 변별력이 하위권 - 중상위권 가르는 데는 있어도, 실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갈 비율인 상위 15%간의 내신성적은 신뢰할 수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내신 간의 격차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사교육 스팀팩 쳐바른 애들만 유리해지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빽빽대는 걸 없에려면 교육청에서 각 학교 중간/기말고사의 평균과 표준편차 관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균은 65 -80점, 표준편차는 +-5 ~ 10점 정도로 말이죠. 단기적으로, 일단 급선무는 내신에 대한 신뢰를 높여, 대학에서 변별력 없으니 어쩌란 말이냐. 소리 못나오게 하는 거 아닐까요.
Epimetheus(mail) 2004-09-15 14:29
저는 고교등급제 개폐와 관련해서 이 문제의 핵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은 고교등급제 개폐의 중심논거로 양측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력’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 정답찍기 능력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육시키는데 있어 유용한 것이냐 비유용한 것이냐를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겠지요. 그러고 난 차후에 고교등급제 개폐를 둘러싼 논의를 시작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먼저 학력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행 교육체제 내에서 ‘학력’이란 것은 사실상 정답찍기 능력이겠죠. 그렇다면 이 정답찍기 능력이 과연 대학교육에 있어서 얼마나 유용한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떨까요?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 한 가지 고전적 기준을 내세워 봅시다. 대학의 고전적 정의는 “국가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학리와 응용 방법을 교수,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함양하는 기관”입니다. 여기서 “학리와 응용 방법을 교수, 연구”하기 위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지성은 다음의 네 가지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번째는 “탐구 또는 발견하는 기술”입니다. 두 번째는 “음미 또는 판정하는 기술”, 세 번째는 “보관 또는 기억하는 기술” 그리고 네 번째는 “발표 또는 전달하는 기술”입니다. 다소 추상적이어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현대식으로 의역한 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정보수집기술”, 두 번째는 “정보평가기술” 세 번째는 “컴퓨터 사용기술 즉 리터러시(literacy)” 마지막 네 번째는 “정보이용기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현행 교육체제에서 ‘학력’으로서 함양시키고 있는 정답찍기 능력은 어느 범주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쉽지만 단 하나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결국 헛굴만 파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고교등급제 논란은 겉만 번지르한 공중누각일 뿐입니다. 근본이 없는데 거기에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이것은 이념적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사실이냐 사실이 아닌가에 초점이 맞춰줘야 합니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이념과 노선이 끼여들 여지는 없습니다. 진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고 보수이기 때문에 이것이 거짓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뒷 넋두리

'엘리트'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수한 학생을 '엘리트'라 정의내리는 것은 이미 오류라는 것이 교육학의 정설입니다. 말을 엄밀하게 쓴다면 '엘리트'가 아니라 '수월성'이겠죠. 교육이란 것도 하나의 제도인 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적응이 요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커리큘럼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죠. 예컨대 에디슨과 테슬라가 살았던 당대에는 에디슨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오늘날 공학계에 있어서는 테슬라의 업적이 에디슨의 업적보다 두드러진다 하더군요. (이건 책에서 읽긴 한건데, 그쪽에 워낙 문외한이라 좀 그렇네요. 매너님이라면 잘 아실 듯하고... 매너님 진짜에요?)
어디에도(mail) 2004-09-15 14:46
위에 쓰신 분들처럼 구체적으로 논할 능력은 되지 않지만, 저는 부리님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현 상황에서의 고교등급제 시행은 단순한 '실력 등급'이 아니라 매너리스트님의 말씀처럼 그저 '주거지 등급'에 다름아닌 것 아닐까요.
만약에 부리님의 2세가 단지 마포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강남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비해 등급에 따른 불이익을 받는다면 님은 그저 당연하다 하실건가요, 아니면 강남구로 이사를 가실 건가요.
'재력에 따른 실력차' 를 등급으로 만든다면 비강남권 아이들이 더욱더 '억울한 패자' 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nugool 2004-09-15 16:38
여기에 대해 다들 생각이 많으시군요.. ^^ 전 상세하게 의견을 개진할 만큼 제대로 알고 있진 못하지만요.. 등급제가 바람직 할 거 같진 않아요. 어쨌거나, 지금 우리 선배들 처럼 대학뿐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까지 레이블이 붙게 되겠죠. 지금의 엉성한 고교등급제가지고는 안되겠지만 점점 더 자리를 잡게 되길 바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렵니다. 매너리스트님 말씀이 아주 공감이 가는 군요.
부리(mail) 2004-09-15 16:59
우와, 너무들 글 잘쓰세요. 님들의 댓글을 읽다보니 제가 왜 저 글을 썼던가 후회가 될 정도예요. 그래도 님들의 댓글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으니, 글을 괜히 쓴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로 감사합니다.
조선인 2004-09-15 17:48
제가 생각하는 진짜 대안은 대학 수를 줄이자! 입니다.
쓸데없이 대학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보니,
고교등급제니, 기여입학제니 야릇한 논의가 범람하는 겁니다.
sweetmagic(mail) 2004-09-15 17:56
망해 자빠지는 대학이 팍팍 늘어야 합니다.
mannerist(mail) 2004-09-15 18:10
Epimetheus님_어설프게 에디슨과 테슬라를 비교하는 건 범주에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에디슨이 무수한 공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던 건, 그가 공학도(engineer)이자 기업체를 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되겠지요. 반면에 니콜라 테슬라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자연과학도였거든요. 기술의 응용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 현상의 발견과 탐구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학자 말입니다. 에디슨이 전기 사업과 관련하여 교류에 대한 근거없는 폄하를 비롯한 비열한 짓거리는 이 연장에서 바라보면 이해할만도 합니다. 자기 회사가 나자빠질 지도 몰랐거든요. 물론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말이죠. '업적'이란 것 역시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틀려집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바로 실생활에 쓸 수 있는 편리함에 주안점을 둔 에디슨의 귀납적 연구 방법과 그 성과, 엘리트 과학 교육과 타고난 천재성에 근거한 연역적인 니콜라 테슬라의 전자기학에 대한 업적과 그 성과는 실제적인 영역, 학문적인 영역에 각기 그 무게를 두고 있으니까요. 둘을 라이벌로 보는 시각에는 전 그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리님. 딴소리 늘어놓는거 용서해 주시길. =)
soyo12(mail) 2004-09-16 00:46
대학에서 말하는 고교 등급제를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고의 내신 10등급은 일반 학교의 1등급과 동등하게 인정하자로요.
저는 이건 실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저는 대학갈때 평준화 내신의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제가 내신등급이 2등급이었기에 저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갈때는 고만고만한 내신이었지만,
제 친구보다는 수능 10점이 낮아도 대학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제 친구는 내신이 8등급이었거든요.
결국 그 친구나 저나 같이 붙기는 했지만 어쩌면 현행과 같은 평준화는 역차별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거지요.
사회적인 평등을 이룩할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실력이 더 월등한 아이를 뽑을 것인가?
지금 현실적으론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
Epimetheus(mail) 2004-09-16 15:20
매너님/ 님의 글은 언제나 절 계몽합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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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09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 대학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수능점수나 내신 등급이 요구되는 걸까? 혹은 부산대 갈 성적인 학생이 연세대 가면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까 연세대 갈 성적인 사람이 부산대 가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내 생각에는 일정정도의 수학능력(?)과 학습의욕만 있으면 아무 대학에나 보내서 공부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

객관적인 실력에 관해서도 내 생각으로는 가령 강남에서 10등급인 사람이 지방에서의 1등급인 사람과 비슷한 실력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답안지에 모범답안을 몇개나 넣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서 몇 프로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정확한 수학능력 테스트가 아닐까? 더 경쟁력이 있는 학생들이니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릴케 현상 2004-10-09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대학 수를 줄이는 게 왜 대안인지는 좀 의아하네요. 혹시 경쟁력 있는 대학만을 남겨놓고 고등학생 상위30프로정도가 아무 대학이나 골라서 가게 하자는 의견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실 대학수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대학가고자 하는 사람이(공부하고 싶지 않은 다수의 사람이 대학가고자 하죠) 너무 많은 게 문제고 그건 사회의 문제지 대학 수의 문제는 아닌 것 같거든요.

망해 자빠지는 대학이 많아야 한다는 것도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하는 문제와는 관련이 있겠지만...고교등급제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NA 2004-10-0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 선배 서재에는 처음 글을 남깁니다. 사실 눈팅은 많이 했는데, 별로 헐말도 없고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오늘은 고교등급제를 주장하는 분들을 보면서 한심해서 한마디 하게 됩니다. 지역 '불평등', 계급 '불평등'을 '공정하게' '평등주의적으로' 반영하라고 주장하다니....이런 형용모순이 어디있습니까?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어퍼머티브 액션 비판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논리군요. 가진 자만이 더 가질 권리가 있다. 가진 것을 기준으로 평등하게 기회를 부여하라! 어퍼머티브 액션이 그렇게 진보적인 것도 아닌데 그걸 옹호하는 말을 해야할 때 정말 짜증이 나죠. 문제는 고교평준화가 너무 지나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평준화가 계급간 격차해소가 전혀 안되어 있다는 것인데, 참 역시 스피노자가 말하듯 사람들은 언제나 원인보다는 결과에 많이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릴케 현상 2004-10-09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trl님 말씀 너무 어려워요. 누구 해설 좀 해줘요


balmas 2004-10-09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trl님은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자명한 산책님이 해설을 좀 해달라고 하시는데, 제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ctrl님 말씀은 그런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강남과 강북 사이에, 서울과 지방 사이에 학력 차이가 존재하니까 고교등급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 현실적 격차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니까 이게 좀더 공정하다는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좀 혼동하는 게 아니냐는 말씀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사이의 학력 차이를 낳는 원인은 계급적, 지역적 불평등인데, 또는 이러한 불평등이 교육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원인의 문제는 놓아둔 채로 학력 차이가 존재하니까 고교등급제를 인정하라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원인, 곧 계급적, 지역적 불평등을 한층 더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느냐 시행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결과를 둘러싼 쟁점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데, 다만 고교등급제의 시행은 계급적, 지역적 불평등을 훨씬 더 조장할 우려가 있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그것을 금지하는 게 필요하다, 또는 그런 정책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ctrl님 말씀은 그런 말씀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어퍼머티브 액션을 둘러싼 논의와 유사한 구도를 갖는 게 아니냐고 보시는 듯하고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답답하시면 ctrl님이 좀더 설명을 해주시겠죠.^^


NA 2004-10-1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 함축적으로 썼었나 보군요. 자명한 산책님께는 죄송합니다. 발마스 선배께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아시다시피 소수자들에게 입학허가 등을 주어야할 의무를 대학에 부과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설사 백인들이 보다 많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흑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백인 학생들은 바로 점수를 기준으로한 평등논리를 앞세워 어퍼머티브 액션이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정치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요즘의 인종주의는 많은 경우 노골적인 불평등논리를 주장하지 않고, 평등논리를 이렇게 왜곡함으로써 뒤통수를 공격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은 백인들이 현실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특권과 소수자들이 처해있는 어려운 조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들간에 보다 평등한 관계들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고교등급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실력차이를 인정하라.' 단 백인과 흑인 사이가 아니라 강남과 강북사이, 혹은 서울과 지방 사이 등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더 사회가 신분제 비스무레하게 변해나가는 것이 보이는데, 고교등급제는 당연히 그것을 고정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오히려 강남 학생들에게는 무슨 가산점을 덜 준다든지 해서 독식을 막아야 될 판국인데, 이런 고교등급제를 주장하는 것은 정말 아니올시다라는 것이지요. 고교등급제, 좋습니다. 만일 지역적 빈곤도를 조사하여 빈곤한 지역들 출신 학생들에게는 가산점을 주는 고교등급제를 실시한다면, 저도 대 찬성입니다.


balmas 2004-10-1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trl님이 다시 상세히 설명해주셨으니,
이제 자명한 산책님이 만족하실 듯하군요. ^^


릴케 현상 2004-10-1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대만족이에요. 마음에 드는 논평인데요^^

 
 전출처 : 갈대 > 시사투나잇

요즈음 자정만 되면 나는 거실로 향한다. 그리고는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티비를 켠다. 왜? '시사투나잇' 보려고. 그게 뭔데? KBS 2TV에서 자정부터 약 40분간 하는 뉴스프로그램. 그걸 왜 보는데? 그 이유를 이제부터 말하려고.

아마 9시 뉴스에 완전히 질려서 뉴스란 걸 아예 안 보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굳이 9시 뉴스를 볼 필요도 없다. 7시 뉴스랑 똑같으니까. 나도 가끔 밥 먹을 때 우연찮게 보게 되는 경우를 빼면 왠만해선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뉴스가 사실 전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방송국 전화통이 항의전화로 불이 난다고 한다. 심지어는 있는 사실만을 말해도 뉴스거리 선정 자체가 편파적이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매우 좋은 비판이긴 하나, 비판자가 꼴통이라는 사실이 문제이다.

매일 똑같은 뉴스에 신물이 났다면, 내가 도대체 저 소식을(예를 들어 이름모를 누군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등의 소식들) 왜 봐야 하는지 뉴스 제작자 멱살을 붙잡고 묻고 싶을 정도라면, 속는셈 치고 '시사투나잇'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간략한 소개를 위해 방금 전에 끝난 오늘자 방송내용을 순서대로 적어 본다.

1. 국정감사 - 서울시 국정감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다른 뉴스들은 국정감사 하는 과정을 방송하기에 무리 없도록 아주 짤막하게 편집해서 그냥 '국정감사 한단다', '누가 무슨 주장을 했다더라' 라고 방송할 뿐이지만 시사투나잇은 직접 찍은(9시 뉴스랑은 완전히 다르다) 화면을 재미있게 편집해서 길게 보여준다. 오늘은 주로 명바기가 곤혹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실로 통쾌했다. 서울시 행정과장이 증인으로 호명되자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슬그머니 도망가는 모습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면서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오직 행정수도 공방 문제만을 두고 9시간 동안 떠들었다는 비판을 잊지 않는다.

2. 헤딩라인뉴스 - 이거 보신 분들 많으실 거다. 일종의 풍자페러디 뉴스인데 시사투나잇에서 중간에 해준다.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박진 선수가 외국 용병을 영입하지 않으면 16분만에 골을 먹는다고 호들갑을 떨었단다.

3. 월경축제, 성교육 - 대학가에서 월경축제하는 현장에 가서 축제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둘러보고 사람들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이런거 해주는 뉴스는 아마 없을 것이다. 덕분에 여자가 월경 전에 몸에 다양한 변화들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관련 책을 읽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추천 환영).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행해지는 성교육이 나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임신했을 때의 고통을 체험해 보기도 하고 수정의 과정을 인형극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때는 왜 그런 게 없었나 싶었다.

4. 외국인 한글 백일장 - 한글날을 앞두고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백일장을 열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의 한국어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알 수 있었다. 대상을 수상한 탄자니아 여학생의 시는 심금을 울렸다.

5. 미국 동성애자 결혼 허가 - 미국의 몇몇 주에서 동성애자 결혼을 허가했단다. 그래서 직접 미국에 가서 찍어 왔다(외주이긴 하지만 역시 이런 건 다른 뉴스는 일체 안한다). 예상보다 엄청나게 많은 동성애자들이 있었고 동성애자 결혼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동성애자 하면 떠오르는 이유없는 거부감이 조금은 사라진 듯 싶다.

보면 알겠지만 별 쓰잘데기 없는 뉴스는 아예 다루지를 않는다. 대신 다른 뉴스들이 그냥 지나치는, 하지만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 소식들을 전한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찍어온다. 한동안은 이라크 소식을 현지에 있는 활동가와 통화를 해서 전했다(기자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포지션은 왼쪽으로 상당히 치우쳐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좋은 놀림감인 것은 당연하다. 가끔은 이렇게 막나가도 되나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뭐 나야 재밌고 좋지만. 혹 내가 여아나운서의 미모 때문에 이렇게 칭찬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절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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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0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아나운서가 예쁘다고요?(솔깃^^)
 
 전출처 : urblue >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추측컨대, 당신들은 백만장자인 모양이다.

당신들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 미래가

당신들 앞에 환히 보인다. 당신들의 부모는

당신들의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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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프랑스 사회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 그는 이 책 첫머리에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더 나은 장래를 거부당한 이들에게" 그 책을 바친다고 써놓았다(그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대작이었다).
내일을 거부당한 사람들, 내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단순한 정서적 연민을 넘어, 도덕적 책임을 넘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
한 가지 존재론적 관점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만큼 지배와 규율, 포섭과 착취의 그물망은 편재적이고 촘촘하다. 브레히트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

릴케 현상 2004-10-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늘 공부 안하는 애들한테
'죽어 봐야 저승을 알지' 하던 게 생각나네요
 

 

법공부 헛한 모양이다


확실히, 나는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 네티즌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즉석 투표’에서, 내가 던지는 표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대미관계나 북한에 대한 생각,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네티즌들 의견은 나를 놀라게 한다. 일하는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주변의 생각을 좇아 조로한 탓이라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나이든 변호사들과 네티즌들이 한편이다.

그러나 파견근로 업종을 확대하는 파견법 개정과 관련한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나도 다수 편이 되었다. ‘다음’의 인터넷 즉석 투표에서는 68.6%가, ‘네이버’에서는 59.61%가 파견법 개정에 반대하였다. 파병에 찬성하고 파업을 매도했던 그들이, 파견 확대에는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왜? “같은 일 하면서 반 토막 연봉 받고 언제 잘릴지 몰라 눈치 보는 게” 눈물나도록 힘들고 “정규직 시켜준다는 말에 하루 12시간씩 일해도 2년 만기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게 파견직의 현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만나본 일도 없는 파견회사가 월급 일부를 가져가고, 같은 직장에서 몇 년을 같이 일해 왔지만 원청에 속한 ‘그들’과는 달리,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노동환경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누구나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회사의 인력구조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울긋불긋’이어서 정확히 아는 데만 여러 시간 걸린다. 정부 예산지원을 받아가며 선심 쓰듯 인턴으로 채용하거나 기약 없는 수습기간이라 하다가, ‘위촉직’이라는 정체불명 계약서에 사인하라더니, 듣도보도 못한 파견 업체를 중간에 끼고 파견으로 사용하면서 법이 정한 2년 기한이 지나면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서 몇 달 쉬다가 다시 오라고 한다.

나는 무엇보다 이러한 ‘파견의 일상화’가 무섭다. (성공하는 예는 거의 없지만), 큰 공장의 사내 하청이나 방송사 비정규직처럼,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이슈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엄연히 파견금지 업종에서 상시적으로 행해지지만 누가 알려 주지도 않고, 혹 문제를 알더라도 이를 제기하다가 실업자가 되느니 그나마 ‘파견직’ 일자리라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어차피 법원에서 이길 수도 없으니, 파견기간 연장 방법이나 상담하고 있는 엉터리 변호사-내가 싫다.

무엇보다 이렇게 당연한 현상이니, 아예 법으로 정하자는 사람들이 겁난다.

일자리보다 구직자가 많은 현실에서 누가 정규직을 쓰겠냐며, 파견을 널리 허용하는 것이 고용을 창출하는 길이라고 한다. 노동부 사무관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기업이 근로자를 어떤 식으로 뽑는지는 자기 맘이고 간접고용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 노동법 공부를 새로 시작해야 할까 보다. 나는, 한 사람의 노동의 대가를 다른 사람이 중간에서 받는 일을 막고, 직접 사용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중간착취 금지’는 노동인권의 역사가 처음 쓰여질 때 생긴 원리라고, 우리 헌법·근로기준법·직업안정법이 오랜 기간 선언해 온 것이라고 배웠다. 더욱이 차별을 통해 임금을 깎고 해고를 손쉽게 하기 위해 간접고용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땅을 팔고 회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을 팔고사는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강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게 노동법이라고, 다른 법 아래 있는 법이 아니라 우리 법 체계의 두 기둥 중 하나라고 했고, 그래서 다른 법보다 노동법에 특히 경외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나는, 공부 역시 헛한 모양이다.

억울하다. 내가 사랑해온 노동법이 고작 이거였다니. 억울하다. 당연히 파견법을 폐지하자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개정에 반대”하면서 지금 파견법이라도 지키자는 글을 써야 하다니.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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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0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애절하게 들리네요 딴 경우지만 제 직장은 요즘 구조개편중-_-

balmas 2004-10-07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조개편은 구조조정과 다른 것인가요??

릴케 현상 2004-10-0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리는 사람이 있지는 않으리라, 믿어 보아요~

딸기 2004-11-0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김진 변호사의 글이로군요!
 
 전출처 : 딸기 > 기다렸던 책.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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