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내가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1번을 찍었을 때 2번에다가 투표를 했고, 나보다 못사는 준부자들마저 한나라당을 열심히 지지하는 판에 지난 총선에서 민노당에다 투표를 했다. 이유?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이념이란 과연 뭘까. 자기 처지에 맞게 투표를 하는 걸까, 아니면 옳다고 믿는 쪽에다 투표하는 것일까. 한나라당이 석권하다시피한 소위 강남벨트를 내가 결코 비난하지 않았고, “거긴 그렇게 해야 돼!”라고 말하는 걸 보면 ‘처지론’에 기울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집 자식이었던 내가 지금껏 소위 보수에 단 한번도 투표하지 않은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거기엔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게다가 생각을 하며 산 게 얼마 안되서 판단 같은 것도 주체적으로 내리지 못한다. 진보적인 책을 읽기 시작한 97년부터, 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눈치를 봤다. 어느 게 옳은 것일까, 한겨레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를. 처음에는 책에 쓰인대로, 한겨레에 난대로 말을 했다. 지금은 혼자 판단을 내리지만, 그건 오랜 기간의 학습을 거쳐 그들의 틀에 자신을 맞춘 것일수도 있다. 그점을 의식하고 한겨레와 다른 시각을 가지려고 내 딴에는 노력을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조선일보는 늘 틀리고, 한겨레는 대개 옳다. 젠장.
요즘 한겨레에는 고교등급제에 대한 비판 기사가 연일 실린다. 명문대학이 사실상 고교등급제, 그러니까 실력있는 고교 출신이면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 요지다. 조선일보를 보면 고교등급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고교평준화는 깨져야 하고 이미 깨져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양측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겠지만, 난 이번만큼은 한겨레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고교의 격차는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상태며, 강남과 강북의 학력차를 무시하고 일괄적인 내신을 적용한다는 게 말이 안되어 보이니까.
신문을 보니 챔피언스 리그의 조편성이 나왔다. 유럽 축구의 명문구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는 게 바로 챔피언스 리그, 하지만 그 출전팀의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 등 세계 최강의 리그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4팀이 나가고, 네덜란드에서는 아인트호벤 한팀이, 터키는 단골팀인 갈라타사이가 아니라 처음 듣는 이름을 가진 팀이 나온다. 러시아도 한팀, 우크라이나도 한팀, 이렇게 모인 팀들이 32개다. 축구강국 프랑스 같으면 자국 팀도 4팀이 나가야 한다고 강짜를 부릴만도 한데, 세팀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선 거의 열팀이 출전하고, 나라수가 많은 아시아는 티켓이 겨우 4장이다. 하지만 8강에 오르는 나라가 대부분 유럽인지라 아시아의 티켓을 늘리는 건 매우 비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고교등급제도 바로 이런 것이리라. 강남의 10등이 강북의 2등보다 학력이 높다면 그걸 인정하는 것. 닭의 머리보다 용의 몸통을 우대하는 것.
반면 메이져리그 야구는 그렇지 않다. 선수를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명문구단 보스톤은 언제나 조 2위다. 더 명문팀인 뉴욕 양키스와 같은 조니까. 지금 세경기차로 따라붙긴 했지만, 보스톤이 1위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행히 2등 세팀 중에서 한팀이 올라가는 와일드 카드제가 생겨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보스톤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반면 중부지구는 매우 약하다. 돈도 없는 미네소타 같은 구단이 엄청난 경기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승률은 보스톤보다 2푼6리나 낮다. 그래도 미네소타는 남은 경기에서 반타작만 하면 포스트시즌에 나가는 반면, 보스톤은 다른 2위팀들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보스톤으로서는 억울하지 않겠는가. 내셔널리그 최강으로 15년째 지구우승을 확정지은 아틀랜타와 같은 조에 속한 필라델피아와 뉴욕메츠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거다. 우린 왜이리 운이 없냐고. 하지만 플레이오프는 승률이 아니라 누가 1위를 했는가를 우선시하니,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수밖에.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걸까. 메이져리그는 억울한 패자를 낳지만, 그래서 더 인기가 높다. 하지만 애들 공부는 흥미 위주의 게임이 아니며, 억울한 패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평준화주의자로 생각해 왔지만, 이 글을 쓰다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