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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후기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와 마주침의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및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론의 난점들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려는 한 가지 시도이다. 이런저런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집약적이고 풍부한 논점을 담고 있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세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특히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치 이론 및 정치적 실천에서 주체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이 글은 영어로 된 원고를 불어로 옮긴 글인데,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불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나 표현들이 여럿 눈에 띄고, 불어 문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역자가 임의로 약간의 첨삭과 교정을 한 곳이 두어 군데 있다. 나중에 영어 원고가 발표되면, 대조를 거쳐 교정할 생각이다. 꺾쇠들 중 하나는 원주이고, 다른 하나는 역자가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역자).  


Miguel Vatter, "Althusser et Machiavel: La politique apres la critique de Marx", Multudes 13, 2003.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비판 이후의 정치


  1977년 이후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하나의 "전회"를 실행한다. 이 시기의 유고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위한 극히 풍부한 영감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두 가지 오류에 대한 논박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알튀세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폄훼와 몰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생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구성물에 대한 종속. 정치의 자율적이고 구성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지평을 정의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로 복귀해야 할 필연성을 느끼고 있다. 역사에 대한 근대 철학의 압류(emprise) 및 역사적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튀세르는 사건의 차원에 우선권을 주는 역사이론 및 역사적 생성의 모든 실체 및 주체를 비워내는 우연적 마주침의 이론을 소묘해볼 것을 제안한다. 정치의 필연성과 역사의 우연성은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를 재발견하기 위한 두 가지 선행조건이다.


    지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가와 정치를 적합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는 그것이 정치적 "상부구조"와 관련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제적 "토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사회를 표상하는 결함이 있는 은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역사적 생성을 적합하게 고려하지도 못했는데, 이는 결정론적 법칙들과 과정들에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역사를 간주하는 결함이 있는 전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쪽에서 실질적인 답변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매우 드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경 알튀세르의 사상은 예기지 못한 전회를 보여주는데, 이는 최근 그의 후기 저술들의 유고집 출간으로 해명되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그는 이러한 비판들이 적절했음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파멸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는 점을 수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몰락 속에서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좌파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혁신적인 답변들을 소묘해보려고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 사회적 적대와 정치의 자율성

    1977-1978년 동안 알튀세르는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p.359-524]라는 텍스트를 쓰는데, 이 텍스트는 그가 여기서 앞서 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약점들을 이론의 "절대적 한계들"로, 스탈린주의의 공포와 유로코뮤니즘의 정치적 실패를 불러온 한계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가지 중심적인 해석적 테제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관점을 넘어 전위시킨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현실적인 것[실재, le reel]이다"라고 쓰면서, 공산주의가 "사물들의 실존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과 동일시되고 있는『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현실적인 것"을 "계급들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에 준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급들"과 "계급투쟁"의 구분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이다. 계급 개념이 생산의 사회경제적 문법(마르크스주의 용어법으로 하면, 생산력, 생산수단, 노동분할[분업])에 의존하는 반면, 계급들 사이에서 생산되는 투쟁 개념은, 계급들에 선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한 문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투쟁이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의 문법과 연합시킨다. 항상 이미 정치적이고 착취의 사실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지배와 저항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들이 없이는 계급형성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것 자체에 거슬러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필연적으로 적대를 어떤 종합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일체의 주장과 독립해서 "계급투쟁의 우위"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적대는 계급투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그 다음에는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이행"의 관념(마르크스는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1852년 3월 5일자 편지에서 이를 옹호하고 있다)과 완전히 독립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그 모든 변종들 속에서도 사회적 적대, 곧 어떠한 보충적이고 해결적인 종합 없이 사회적 관계들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 운동"으로서의 투쟁을 사고하지 못했다. 사회적 적대를 총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이를 하나의 종합 안으로 해소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전통과 단절한다. 사회적 적대는 영속적이며, "역사의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해석적 테제는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에서 따라나온다. 정치, 국가 및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지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반영 내지는 표현으로서, 이러한 조건들이 변혁되자마자 제거되는 것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별도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은 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을 요구한다. "국가는 물론 낡지만 영속적이다 [...] 국가는 계급투쟁, 곧 착취가 폐지되는 게 아니라 보존되고 유지되고 강화됨에 따라 [...] 낡게 된다." 알튀세르의 판단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법적-정치적 장치와, 소위 그것의 "토대"("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몰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상부구조"를 그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며, 이는 그 이론의 "절대적 한계"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소묘한 이 관계에 대한 표상을 따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로부터 "성립된다."(erhebt)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성립의 순간, 이러한 관계를 결코 문제삼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상부구조의 "제도[화]" 및 "구성"은 결코 문제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정치적인 것은 토대의 실존조건이어서 "계급투쟁"과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의 토대로부터 "성립"하거나 이 토대의 "반영물"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분리된 실존은 사회적 적대의 보존, 곧 착취가 그 내부에서 생산되는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을 자신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정치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이 적대와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적대가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적대는 정치적인 것의 제도[화]의 원인일 수 없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계급들 사이의 투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테제를 사고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아마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을 결론, 곧 정치적인 것은 자기-제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인 것은 투쟁의 효과이기는커녕 사실은 "계급투쟁에 영향받지 않고, 심지어 이 투쟁에 의해 "관철될"" 수도 없다.[앞의 책, p. 437]
    1977년의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1970년 논문에서 제시된 정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재생산 이론을 심화한다. 정치적인 것의 분리 없이는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분리되어-있음"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관계들을 재생산하는 과제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이제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가 분리된 도구인지 또는 "기계"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게 국가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계인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이고 심지어 물질적인) 조건들의 재생산관계 하에서 국가를 파악하지 못한다."[같은 책, p. 457] 알튀세르의 테제는 정치적인 것이 생산의 적대적 관계들(여기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당한다)을 재생산하며, 역으로 이 적대적 관계들은 경제적 생산(곧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은 생산과 관련하여(사회적 노동분할, 계급들과 관련하여) 우위를 지니며, 역으로 정치적인 것은 재생산과 관련하여, 그리고 따라서 계급투쟁의 실존 그 자체와 관련하여 우위를 지닌다. 이 때문에 생산(관계들)의 조건들은 정치적 가능성의 조건, 이 관계들의 재생산의 정치적 원인을 갖는다.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며, 이렇게 되면 폐허만이 남는다. 계급투쟁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여이기 이전에 정치의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키아벨리: 공화주의적 자유의 회복

    유고로 출간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1986)에서 알튀세르는 소위 경제적 "토대"와 관련하여 국가의 정치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국가와 정치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에 대해 마키아벨리로의 회귀는 무엇을 보태주는가? 우선 이는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의 심연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하는, 무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이라는 이론을 보태준다. 피렌체 서기장의 중심적인 질문이 정확히 말하면 지속 가능한 정치적 국가가 무로부터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마르크스는 결코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다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새로운 군주라는 오래된 그람시의 문제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독해에서 혁신적인 점은 그가 이 문제를『로마사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통해 해소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로 돌아간다. 알튀세르에게 공화국은 국가의 지속의 계기를 포함하며 구성적 권력의 재생산에 따라 질서지어져 있다. 반면 새로운 군주는 단지 국가의 시작의 계기만을 포함할 뿐이다. 마키아벨리를 통해 알튀세르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의 공화적 형태 속에, 곧 군주적 형태가 아니라 법의 통치로서의 공화국 속에 담겨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암묵적으로, 1971년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관한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계급의 "독재" 형태로서의 국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해를 통해 알튀세르는 재생산 문제에 대해 한 가지 보족적인 재귀성(반성성, reflexivite)의 차원을 추가한다. 곧 1971년에 일차적인 질문은 단지 생산의 재생산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마키아벨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일차적인 질문은 재생산 자체의 재생산이 된다. 새로운 군주와 공화국, 구성적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자기 자신에 의한 국가(재생산 권력으로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 및 따라서 그 지속이라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독해가 르포르의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독해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르포르와 관련하여 그가 혁신적인 점은 "지속하는 국가"의 구성을 "무로부터의" 성립(emergence)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무"를, 정치적인 것(비르투)과 사회적인 것(포르투나)의 사건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분절(표현, articule)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체의 역사철학 및 "역사의 법칙들"과 "역사적 필연성"에 관한 일체의 담론 바깥에 놓여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을 사건과 우발성의 지평(그가 "정세적 결합"(conjonction)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면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이론적 한계, 곧 정치이론의 결여 및 역사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찾으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유물론적 사건이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할 목적으로 마키아벨리로 되돌아가는데, 이 이론에서 사건들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의 "마주침" 내지는 "정세적 결합"으로 인식된다. 다만 이 적대는 더 이상, "최종 심급에서" 정치적 마주침의 방도(issue)를 규정하는, 구조적이거나 실체적인 과정(곧 생산의 존재론)으로 이루어진 "토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반대로 사회적 적대는 "공백"으로, 정치적 마주침을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따라서 자유로운 것으로 남겨두는 유일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주요 논점은 이로부터 성립하는 정치적 형태들을 계급투쟁이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계급투쟁의 적대는 단지, 그 결과 여부가 완전히 열려 있는 어떤 마주침의 "불충분근거"[충분근거율 내지는 충족이유율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 역자]일 뿐이다. 알튀세르에게 사회적 적대가 "규정적" 이것의 인과적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적대 자체의 자기 동일성도, 존재론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키아벨리 독해에서 적대 자체가 소송의 대상, 갈등하는 관점들(perspectives)의 대상임을 의식하게 된다. "정치적 시점(point de vue)의 장소와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장소 사이에는, 정치적 시점의 "주체", 곧 인민과 정치적 실천의 "주체", 곧 군주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원성,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은 군주 인민 모두를 변용시킨다(affecte)."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그로부터 군주의 정치 전체를 정의하게 될 이 인민, 이 인민에 대해 어떤 것도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도록, 또는 정치적 세력으로 생성되도록 강제하거나 심지어 제안하지도 않는다. ... 그리고 어떤 것도 마키아벨리가 어떻게든 이러한 분할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시해 주지도 않는다. 역사는 인민의 관점에서 군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인민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군주의 구성적 기획은 이러한 기획 바깥에 놓여 있고, 그 기획보다 훨씬 원초적인 어떤 관점에 따라 분석되고 평가된다. 곧 또다른 정치적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합성과 순치(pacification) 이것이 어떤 정치적 형태를 띠든 간에 를 금지하는 사회적 적대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민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여기서 장래의 마키아벨리 해석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진전은 "정치적 시점"과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명료화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시점"이 정치적 통치 형태들의 구성의 시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의 관점은 정치 형태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어떤 정치의 원천이 된다. 이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해야 할 게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에 관한 쇄신된 이해를 위해 지극히 의미심장한 직관적 통찰이다[Le pouvoir constituant, PUF, 1997에서 Negri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비교해보라. 네그리는 인민의 "정치적 시점"과 새로운 군주의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네그리는 인민을 새로운 군주로 이론화할 수 있는데, 이는 인민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통치의 "절대적" 형태를 구성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비르투(virt , 역량)가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과 조우하게 되는, 사건의 근원적으로 우연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구성적으로 관점주의적이다. "현실 운동"이 주어진 어떤 정치 형태 속에서 완전히 합성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 안에는 정치 형태의 구성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을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형태의 "해체"이며, 또한 모든 정치 형태의 성립에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방식으로 따라다니는(귀신들려 있는, hante) 갈등적 사건 속으로 [정치] 형태의 복귀이다[해체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errida, Spectres de Marx, Galilee, 1993; Marx & sons, PUF/Galilee, 2002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과 대립하는 "정치적 시점"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사건 속으로 이러한 형태의 복귀이다. 인민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힘"[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인민이 정치적 기동력(ressort)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정치적인 것이 형태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환원되거나 이러한 실천으로 소진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는 이러한 전제를 반박한다.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인민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에 따라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인민의 정치적 행위는 항상, 어떤 정치적인 또는 적법한 지배형태 안에서 인민의 [구체적인] 표현 가능성(figurabilite)을 초과하며, 일차적으로는 통치형태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보다는 해체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국가의 해체에 관해 다루기 전에, 국가의 구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 국가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구성된 재생산의 권력은, 말하자면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인민을 복속시켜야 하며, 인민이 자신의 "주체"로서, 자신의 "기원"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에 대한 분석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마키아벨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 지속 가능한 국가의 정초, 시작인데, 이 국가는 일단 군주에 의해 정초되면 "혼합" 통치의 효과에 의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중심은 로마, [오랜 시간 동안] 지속했던 국가이다. 로마의 중심은 그 시작이다. 이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정이었다는 데 있으며, 이 군주정은 이 국가를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적절한 어떤 통치[정부], 곧 혼합 통치를 로마에 덧붙였고, [이를 통해] 이러한 통치는 공화국의 관점에서 추구되었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p. 96] 국가의 지속은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한 국가의 구성에서 두 가지 계기. 1) 절대적 시작의 계기가 존재하는데, 이는 단 하나, "단 하나의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는 그 자체로는 불안정하다 [...] 2) 두 번째 계기는 지속의 계기인데, 이는 법률의 부여(donation, 제정) 및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중적 작용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같은 책, p. 115] 이 두 번째 계기에서 국가는 군대, 동의(곧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통치 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인민 속에 "뿌리내린다." 로마사에서 공화국의 계기는, 단지 자기 자신을 국가를 "보존하는" 권력으로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절대적인" 구성적 시작으로 주어지는(se donne, 스스로를 제시하는) 재생산의 계기에 상응한다.
    알튀세르는 국가 이것 자체가 생산관계들의 재생산 형태이다 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해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로마 공화국 헌정[구성]의 발전에 대한 이러한 독해에 의지하고 있다. 로마 헌정의 발전은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재생산 형태로서의 국가)의 이데올로기(재생산)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는 로마인들이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헌정을 발전시키면서 제도화했던 정치적 권위를 산출하는 체계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권위(auctoritas)는, 정초자가 형태를 부여하고(agere)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는(gerere) 관계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가 설명하듯이,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들의 책임에 내맡겨지게 될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로마사론』1권 9장; 강정인·안선재 옮김,『로마사론』한길사, 2003, 109쪽]. 정치 형태는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를 뒷받침하려는 태세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뒷받침은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최초의 시작, 정초와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결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오히려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초를 완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통치자에서 시민들로 전달되고 대의 정치 기구(본질적으로는 입법 의회) 안에 제도화되는 이러한 요청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호명이라고 부른 것에 밀접하게 상응한다. 호명의 기능은 인민을 정치적 기체(基體, subjectum), 국가를 구성하는 토대로 만드는 데 있으며, 역으로 이러한 토대는 국가가 실행하는 예속과 지배에 대해 지속과 적법성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정초한다. 
    로마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독해에서 알튀세르는 이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직관에 대한 확증을 발견한다. 이 직관은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가 자기 자신의 정초, 지속 내지는 재생산을 위해 인민이 탁월한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곧 인민이 구성 권력이 되고 이를 통해 통치의 토대로 제공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절대적 한계들" 너머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속 가능한 국가의 토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는 자신의 토양 내지는 자신의 토대를 자기 바깥에서, 예컨대 특수한 경제적 이해관계들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 공화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의적이고 입헌적인 민주주의 형태 안에서 발견한다. 대의·입헌 민주주의는 국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소명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이다. 이는 구성된 권력이 자기 자신을 구성 권력으로, 곧 국가의 주체로서의 인민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해주는 형태이며, 역으로 이 후자는 국가 자신이 가장 오래 지속되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재생산되도록 보증해준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재생산 이론이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담론에서 자신의 확증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의 마키아벨리 독해는 환원적이어서, 정치적 지배의 비밀들에 대한 이해가 아닌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담론적 함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결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유일한 통치 형태, 곧 국가가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인민의 시점을 군주의 시점에 종속시킨다. 잘 정초되고 지속할 수 있는 정치 형태를 지향하는 것은 오직 군주일 뿐, 인민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인민의 관점은 국가의 주체-기체(sujet-subjectum)의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로마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이전 및 이후의 모든 정치 사상과 관련하여『로마사론』의 진귀함은, 시민의 삶(vivere civile)은 정치가 잘 정초된 법의 통치라는 이상 이는 로마식의 권위 체계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을 초월하고 전복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로마사론』3권에서 등장하고 줄곧 옹호되고 있는데,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시초로의 회귀(riduzione verso il principio)라고 부르는 것을 경유함으로써만 정치체는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옹호하고 있다. 내용 및 형태에서 "시초로의 회귀"는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회귀하는 시초는 권위의 시초, 정초의 절대적 시작과 동일한 "시초"이며, 이러한 회귀는 권위로부터 역사적 생성에 어떤 정치적 형태를 각인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역사적 생성의 근원적 우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근원적 우연성을 모든 정치 형태의 사건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모든 정치 형태가 그로부터 성립해야 하고, 또 어떤 주어진 정치 형태가 확립한 특권 내지는 불평등이 이 정치 형태 아래서 번영을 누리고 이 정치 형태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때마다 모든 정치 형태가 거기로 회귀할 수 있는, 권리평등(isonomy)의 시공간으로 재정의한다. 타락은 불평등의 소외인데, 이는 모든 주어진 지배의 정치 형태가 고착되고 존속됨에 따라 생산된다. 이 때문에 공적 공간의 평등 및 자유로의 회-귀(re-duction)는 "시초로 회귀하는", 곧 정치 형태를 혁-명(re-volutionne)하고 정치체 내의 타락과정에 저항하는 사건 속에서만 생산될 수 있다.

사건들의 유물론을 향하여

    자신의 마지막 혁신적인 철학 텍스트인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1982)에서 알튀세르는,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및 데리다 같이 그보다 먼저 이 오솔길을 밟아간 일련의 철학자들에 강하게 준거하면서, 명시적으로 형태 및 사실에 대한 사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또한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는 "사건들의 유물론"이라 불리기도 한다)은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성립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정세적 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는, 사건적인 마주침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구성 및 원자들의 결집을 설명하는 원자들의 클리나멘(clinamen) 또는 편향(deviation)에 관한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학설에 준거함으로써, 좀더 적합하게 마주침이라고 지시된다. "세계는 완성된 사실(기성 사실,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 후에 그 속에서 근거[이성], 의미, 필연성 및 목적의 군림이 시작되는 완성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이 완성은 우연의 순수한 효과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클리나멘의 편향에 기인하는 원자들의 우발적 마주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의 완성 이전에는, 세계 이전에는 사실의 미완성만이, 원자들의 비현실적 실존에 불과한 비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알튀세르,『철학과 맑스주의』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39-40쪽] 어떤 것도 원자들의 마주침에 선행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이러한 마주침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의 완성"의 "구성적" 차원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 사건이며, 이러한 차원은 알튀세르가 "사실의 미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사실의 완성에서 완성된 사실로의 이행이 군주 또는 국가의 활동을 기술한다면, 이러한 이행의 우연적 성격, "완성" 자체가 지닌 사건적 성격 이는 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현 여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in-differente) 남아 있는 역량으로서의 "미완성"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은 인민의 해-체적(탈-구성적, de-constructive) 활동에 상응한다. 이러한 해-체적 활동에서 인민은 더 이상 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국가에 의해 정립된 구성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히려 통치되지 않으려고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군주의 비르투는 마주침을 "지속"시키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군주는 "마주침의 효과들에 형태를 부여하는 형태들"에 상응한다. 군주는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화(필연적-생성, devenir-necessaire)"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전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달리 여기서는 "필연의 우연에 대한 종속"을 사고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함축하고 있다. 곧 "결코 어떤 것도 완성된 사실의 실재성그 영구성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지 못한다. (...) 역사는 (...) 완성해야 할 또 다른 판독 불가능한 사실에 의한 완성된 사실의 영속적인 폐지이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이 폐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결코 미리 알지 못한다. 다만, 패를 다시 분배하고 주사위를 빈 탁자 위에 다시 던져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철학과 맑스주의』, 46-47쪽] 지속하는 국가는 항상 이미 자신의 "폐지"의 내재적이고 임박한 가능성 내부에 기입되어 있다. "시초로의 복귀"가 단지 완성된 사실을 사실의 완성을 구성하는 권력으로 되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완성 자체가 자신의 사건 및 자신의 비 사건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적으로 남아 있게 만들 때, 그 때가 바로 "폐지"의 순간이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완성의 문법의 견지에서는 판독 불가능한 "또 다른 사실"에 상응할 것이다.
    알튀세르는 결코, 완성된 사실을 폐지하는 역량으로 이해된 인민의 역량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은 새로운 구성적 활동의 전제일 뿐 아니라, 좀더 원초적으로는 인민 편에서 보여주는 주권적 무차별성[무관심]의 표현이며, 따라서 국가 및 정치 정당 체계가 부과하는 통치의 기획에 대한 정치적 시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통치에 대한 주권적 무-차별성"이라는 표현에 의지하여 나는, 소위 구성적이라고 하는 인민의 입장의 세 가지 특징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첫째, 인민은 국가의 정초 기획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주장하는 한에서만 역량을 지닐 뿐이다. 그의 무-차별성은 이러한 차이 "내"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있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국가의 정초와 동일시하는 모든 전통적인 "공화주의" 기획을 좌초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비통치의 행위자로서 인민은 국가 및 그것의 통치 기획에 의해 정식화될 수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의 "무-차별성"은 통치 가능성의 결과들에 대한 근원적 비-이해관계[무-관심]에 준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가 되는 결과들에 대한 진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국가를 판정할 수 있으려면 인민은 국가 및 정치 체계가 적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재합성해야 하는, 특수한 이해관계의 저장소로 기능해서는 안된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시민사회와 동일시하는 모든 "다원주의적"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인민의 주권적 무차별성은 의회의 호명에 대한 그들의 무반응(impassibilite)에 준거한다. 인민은 역량을 지니고 있을 때 정치적으로 대표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국가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정치적 인정의 형태는 인민들의 예속적 주체화(sujetion)를 획득하는 주요 방식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선거 민주주의에 의해 구성된 공적 공간[공론장]과 동일시하는 모든 "자유주의적"인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혁명적 사건에서 인민은 더 이상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의해 통치의 기획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통치되지 않으려는 욕망은 국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인민의 역량을 국가가 다루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민이 통치되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때마다 재생산 과정은 정지의 고통을 겪고 국가의 기계는 중단된다.
    이러한 호명에 대한 위반들(manquements), 국가-기계의 갑작스런 중단들을 해명할 수 있는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은 이제 겨우 몇몇 사람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크 데리다와 자크 랑시에르가 최근 개진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은 특히 풍부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과거에 알튀세르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그렇다]. 이러한 인민의 역량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곧 국가의 궁극적인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국가 권력의 획득) 정식이나, "인민을 위한 인민의 통치"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정식으로 파악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이 두 가지 정식은 헤게모니 투쟁의 형태, 곧 통치를 위한 투쟁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우리가 방금 호소했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엄밀하게, 통치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쟁 이는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을 헤게모니의 세력과 정치적 실천들에 의한 이 투쟁의 "복속"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민이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구성된 권력이 사회적 적대와 정치 형태의 분리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러한 분리를 항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의 형태 아래 제어하며, 이를 명령의 대상이 되는 주체에 대한 투쟁이다. 하지만 "현실 운동"으로서 적대는 그 자체로는 헤게모니적이지 않으며, 헤게모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구성된 모든 정치 형태와 관련하여 이러한 적대가 지니고 있는 무차별적이고 근원적으로 비정초적 성격은 재생산적이고 해체적이며 정초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적인 것의 두 가지 계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계기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는 인식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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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07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수고에 감사합니다. 이 글의 원문인 영어본도 멀티튜드에 있더군요. 그냥 저자 이름의 링크를 따라가면 되더군요.

balmas 2004-10-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요.
저도 얼마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답니다. [Multitudes]에는 비프랑스어 논문의 경우 원문도
함께 실어놓았더군요. 제가 조금만 주의깊게 봤더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 ^^;;;

unsound 2012-05-28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발마스님!
얼마 전에 인터넷헌책방에서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새길)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는 게 이거 뭐, 완전 사람 죽여놓는구만요. 뭐랄까... <마주침의 유물론>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최고의 시같다고 할까요. 과한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제게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는 말씀이죠. 몇년 전에 [스피노자와 정치]를 읽었을 때 기억도 새록새록 나면서...

이렇게 글을 남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혹 알튀세르의 책 중 번역 중이시거나 계획하시는 게 있는지, 아니면 다른 분의 번역 계획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는지 궁금해서요. 특히, [철학-정치 논집]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기존에 번역된 알튀세르 책 중 오역 논란이 있던 것에 대해 재출간 소식을 들은 바가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알튀세르 효과]도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지만. ㅎ

아, 그리고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재출간은 어떻게 되는지도 정말 궁금합니다. 어쩌다 구입 시기를 놓쳐 여태 아쉬워하고 있네요.

발마스님의 소개글을 보니, 위 페이퍼는 [철학과 맑스주의]를 끝내고 읽어보면 아주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balmas 2012-05-28 0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래된 번역글에 댓글을 다셨네요.^^ 년도를 보니 벌써 8년전입니다.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끼게 되네요. :) [철학과 맑스주의]를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말년의 알튀세르 글들은 읽을수록 맛이 새로운 것 같더군요.

제가 지금 번역 중인 알튀세르 책은 프랑스에서 2005년에 나온 [역사와 정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라는 강의록과 [자본을 읽자]입니다. 앞의 책은 후마니타스에서 나올 예정인데요, 올해 안에는 출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마르크스에 대한 강의를 담고 있는데, 강의라서 그런지 훨씬 쉽고 재밌는 책입니다. 기대하세요. 그리고 [자본을 읽자]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랑시에르, 마슈레, 에스타블레가 공동으로 저술한 책인데, 저는 알튀세르의 논문 두 편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 내년쯤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2학기쯤 나올 것 같습니다. 번역 원고는 예전에 넘겼는데요, 출판사의 출간 일정상 다른 책들에 밀려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규항 선배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 현재의 정국과 관련된 글을 퍼오거나 쓰는 것은 그만하고, <서재> 본래의 기능에 맞는 일에 일로매진(?)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어떤 이가 나에게 왜 여의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냉소하느냐 말했다. 좌파가 ‘관념적 냉소로 가득찬 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을 냉소하겠는가. 그들은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에 사느라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욕심도 적을 뿐이다. 그들은 고작 축구팀이 세계 4강에 드는 일로 조국에 대한 첫 자부심을 느끼고, 개혁이라는 식인체제의 새로운 대변자가 처한 곤경을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냉소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울고 뒤론 웃는 놈들’을 냉소하기에도 벅차다.)


언젠가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우파 과잉의(좌파 결핍의) 사회임을 두고 한 말이다.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거나 옹호하는 세력이며,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단지 혁명적인 방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력을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혹은 좌파의 견제가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체제’일 뿐이다. 흔히 자본주의를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탐욕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식인 체제’였다. 분단과 6.25전쟁 체험을 빌미로 하는 강력한 반공 파시즘은 대한민국에서 좌파의 씨를 말렸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노동자와 농민과 민중을 내키는대로 마음껏 잡아먹었다. 물론 그런 식인 체제에 민중들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무릅쓴 끈질기고 빛나는 저항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제도 민주주의’를 얻는 것을 넘어 반공 파시즘이라는 ‘식인 체제’를 부수는 데 목표를 두었다.(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원 가운데 대부분은 변혁을 좆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제도 민주주의’가 마련되자 그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성원들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의 종결’을 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물론 그 선언은 거짓말이었다.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별 문제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 운동의 보다 평범한 성원들이 갖는 자괴감(현실 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에서 비롯한, 제 지난 운동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자괴감. 처음에 순수했으나 점차 비뚤어진 좌파 혐오로 발전한다.)과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대세가 되었다.

그런 거대한 기만을 비판하는 좌파는 갈수록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좌파를 공공연하게 ‘철 지난 이야기나 하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무렵,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후반작업’이자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내세우는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과 강준만 씨를 비롯한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런저런 네티즌 운동들이 그것이다.

좌파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대의 좌파운동’으로 포장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취에 넌더리가 난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협잡과 공갈로 행세해 온 정치인들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위세가 영원할 것 같던 파시스트 신문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개혁 정권’을 만들어냈다.

개혁이 만들어낸 사회적 변화들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이란 한국 사회를 실제로 유지하는 대대수의 사람들,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개혁이 가져다주었다는 변화가 지니는 의미를 판단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기준이다. 그렇게 볼 때 개혁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 휘황한 겉모습에 비해 믿을 수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한국사회의 실제 성원들은 왜 전보다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왜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하는가.

그게 다 개혁의 지도부가 늘 말하듯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에 순진한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도 역시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우리는 그런 현실들이 전적으로 ‘개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혁이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개혁의 지도부가 미숙해서거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좌파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그 식인 체제가 내뿜는 악취를 제거하는 ‘우파 운동’일 뿐이다. 개혁으로 위기를 맞은 건 ‘식인 체제’가 아니라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들’(제도 정당과 언론, NGO 따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이미 효용성을 다한, 극심한 악취로 더 이상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을 서둘러 교체하는 중이다. 그들은 ‘개혁적 외양을 가진 대변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실체이자 진실이다. 오늘 많은 선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는 ‘탄핵 사태’ 역시 그런 교체의 와중에서 나온 사건이다. 교체 위기에 빠진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은 어차피 죽을 거면 싸우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식인체제의 '대중적 대변자’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좀더 분명하게 했다. 그들은 노무현 씨를 탄핵함으로써, 수구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면서도 졸렬한 실무 능력으로 지리멸렬하던 노무현 씨와 열우당을 단숨에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열우당 의원들이 ‘앞으론 울지만 뒤론 웃고 있다’는, 아니 기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순교자’는 머지않아 강력한 대중적 호응을 업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하여튼 개혁 우파는 좀더 빨리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대변자는 교체된 대변자의 전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고, 적어도 중간 계급 이상의 한국인들은 좀더 ‘상식적인 시민 사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한국인들, 한국사회의 실제성원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몸을 불사르는 일도 계속될 것이며, 순진한 청년들이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서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는 설명은 ‘한국적 현실’이라는 좀더 전통적인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오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속속 여의도로 모여드는 선한 사람들을 보며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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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의 래디칼리즘은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는 단언에서 볼 수 있듯이, 대책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일은 이미 어떤 초월적 지평을 점유하고 있기에, 그것을 구현한 사회(단 한 사람도 불행해서는 안되는 사회?!), 그리고 역사는 지구상에 존재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의 칼럼은 (산문적이 아니라) 시적인데, 사실 '식인 체제'라는 은유(?)부터가 그런 식이지요. 저는 '시'보다는 '산문'을 신뢰합니다...

balmas 2004-03-1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 시적인 <마음>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그에게 '산문'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저에게는, 그는, 그냥 그대로도 좋습니다.
 

* 아는 분들도 있을 텐데,  최원 씨의 제안들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 탄핵정국에서 민중진영이 해야 할 일]-3/12

지금 현재의 상황은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닙니다. 계속 말하지만, 헌재에서의 결정은 노무현 말마따나 "법률적 결정"일 뿐입니다. 법률이 정치를 대신해 주지도 않고, 권력 찬탈을 막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반주변부의 남한과 같이 정치적 불안정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곤 하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헌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총선에서 민주, 한나라가 참패를 한다고 해도, 이 사태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은 쿠데타가 아니지만, 쿠데타까지도 '가능성'으로 고려하기 시작해야 할 위기가 도래했습니다(양진영 사이의 대타협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속에서 대중정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질식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친노 반노의 극단적인 대립이 야만적인 사태로도 흘러갈 수 있고, 따라서 진보세력의 일차적인 과제는 대중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중을 보호하는 것은 단 하나의 방식, 즉 대중들의 힘의 결집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대중들이 갖기 쉬운 친노반노의 허구적 대립구도의 환상을 깨고 새로운 대립구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주아 대 민중의 대립구도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중들이 스스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사태, 혹은 국가적 비국가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국면은 단순히 한나라, 민주로 대변되는 부도덕한 집단의 일시적인 미친짓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가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친짓은 제정신이 들면 사그러들일이지만, 이것은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단순히 사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순들이 하나도 해결이 안되는데, 그냥 이게 눈감고 며칠 있다보면 없어지고 이제껏 지내던 대로 세상도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한 관념적 사고일 뿐이고 진정 주관적인 희망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보세력은 이 사태의 본질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파탄에 기인하며, 따라서 한나라, 민주당, 우리당, 노무현 등 부르주아지들 전체의 연대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민중적 대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적 대안을 중심으로 대중을 결집해 나가야 합니다.

민노당 총선에서 눈 띠어 주세요! 지금 한가롭게 극장표 몇장 팔았나 세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중들이 불난 극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지금 극장표 계산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장석준 동지도 '탄핵취소, 노동자 농민의 평화 국회'라는 식으로 타협하던데,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 자체가 붕괴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국회에 노동자 농민이라는 말만 달면은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들의 직접 행동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부르주아 전체를 비판하는 싸움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민중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총선에 들어가서 어떻게 반노-친노의 허구적인 대립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대중의 공분을 반노-친노 대립 구도 안에 그냥 가두어버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것이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탄핵정국 요점정리 노트]-3/12


1. 현 탄핵정국 사태는 단순히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때문에 일어난 사태가 아니다. 노무현도 못지않게 올인을 하고, 도박을 해왔다. 유시민이 오늘 국회의사당에서 절규를 했단다. "이건 정치가 아냐!" 정확히! 그렇다. 의회 안에 더이상의 정치는 없어진지 오래다. 민중의 의사들을 관철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정치도 없다.

2.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주도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족국가의 위기, 민족적 공동체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민주권이 더 이상 의회를 통해서 관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신의 폭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고, 사실상 개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당들 사이의 차별성도 내용적 차별성이 아니라, 이미지 조작,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기(그것이 지역주의이던, 아니면 80년대의 망령이든, 후자는 386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에만 의존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삶 등의 문제는 정치에서 유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어떤 진중권스런 사람은 노통의 개인적인 도박사 기질과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등이 이 사태를 몰고왔다고 본다. 그러나 노통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가 내용 없는 인민주의적 동원체계에만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형해화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거기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 노무현이라서 노무현이 뜬 거지, 반대로 노무현의 도박기질이라는 것이 포퓰리즘적 동원정치를 지배적인 정치적 모델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론자와 관념론자는 정확히 여기서 갈라진다. 이게 차라리 철학의 문제라면 철학의 문제다. 영웅은 (진중권도 전에 얘기 했듯이) 시대를 잘못타고 나면 동키호테일 뿐이다.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시대고 그 시대의 모순이고 그 정세적 조건들이다.

4. 신자유주의하에서 인민주권이 배제되기 시작하고 의회가 단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하고 관철시키는 장소로 전락되고, 사실상의 계급대립 계급대의의 어떤 간접적인 기능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남은 건 뭔가? 깜짝쇼를 벌려서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시키는 것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나라 민주당의 탄핵이 노무현의 재신임 깜짝쇼하고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노무현 재신임 깜짝쇼도 국민에 대한 위협이었고, 니네들이 더 이상 까불면,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가겠다는 것 아니었나? 동시에 사조직인 노사모, 국민의 힘 등을 다시 조직해서 총선을 장악하겠다는 잔꾀아니었나?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다른 점은 없다. 둘다 실체적인 내용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온갖 국가 장치들을 전부 사적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 필연성이 생기고 지네도 어쩔 수 없이 그럴수밖에 없어진거다.

5. 그렇다면, 민중진영은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선전선동하고, 이번 16대 국회 뿐 아니라, 국회를 통한 정치 일반으로서의 의회정치가 파탄났음을 선언하면서, 민중발의권 등의 제도화를 요구하고 인민주권을 다시 보다 직접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경로들을 요구하고, 새로운 민중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선전해 나가야 한다.

6. 총선에 참여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할 수 있나?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총선만큼은 보이콧을 하고,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하고, 민중발의권을 비롯한 직접적인 인민주권 관철경로의 제도화 없는 총선은 그나물에 그밥으로 다시 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7. 국회의원 전원소환은 노무현의 동시 소환 없이는 노무현에 손들어주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것이 의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효과는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동시 소환 없는 국회의원 전원소환에 명확하게 반대한다.

8. 그러나 노무현의 동시소환도 여전히 문제를 갖는다. 이는 국회 그 자체, 의회정치 파탄 그 자체를 이슈로 삼는것이 아니라, 현 국회만을 이슈로 삼는 것이고 기껏해야 노무현까지를 이슈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발의권의 명확한 제도화가 없는 국회의원전원소환 및 노무현 동시 소환도 나는 반대한다.

9. 이 두가지, 즉 노무현 소환과 민중발의권의 중심적인 이슈화를 조건으로 해서만, 나는 국회의원 전원소환투쟁이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10.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친노 대 반노의 그 대립구도의 허구성과 반민중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점이 전제가 되어야만 모든 정치적 행동이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의 기본적인 방향, 그리고 부탁]-3/15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의회의 파괴가 아니라 의회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 나는 그 권리들을 의회정치에 대한 '보충물'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보충물'이란 영어로 말하면, complement가 아니라 supplement이다. complement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지칭한다면, 오히려 supplement는 그 양자가 모순되고 갈등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발의권은 '일차적으로는' 인민의 특정 수 이상의 결의로 발의하여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의해 의사를 관철시킴으로써 새로운 입법을 할 수도 있고, 국회가 이미 결정한 것을 폐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다른 한 편 소환권은 국회가 특정한 입법을 하려고 할 경우, 국회의원들에 대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이룰 것이다. 이는 의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반대로 '단순히'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하고 혁신할 수 있다. 당연히 민중발의와 소환은 의회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갖겠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며, 사회운동들이 자신의 주장들을 관철시키고 국가장치의 개조를 통한 국가의 민주화를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경로를 이루며, 동시에 사회운동 자신의 역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제를 이룬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고하는 민중발의권, 소환권은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계급 코퍼러티즘(혹은 사회적 협조주의, 사회적 합의주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제도화시킴으로써 계급적이거나 비계급적인 적대들에 입각한 집단성들을 국가장치들을 통해 충돌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반정치(anti-politics)를 비판하고, 이에 따른 대중들의 정치적 사기저하를 극복하며, 대항-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대항-권력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외부라기 보다는 갈등적 내부이며 권력과의 투쟁의 영속화로서의 정치의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채택된 표현이다. 즉 그것은 권력-외부에서 사회운동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과 기타 다른 투쟁들을 국가적 제도들, 국가장치들에 관통시키는 방식으로 싸움을 조직해 내는 것이다.

아직, 국외의 사례들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제도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한 점검을 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전공분야와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지적인 협조들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분야에 대한 다른 분들의 많은 조사와 의견들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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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5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런 '관념적인' 구호들을 다시 보게 되는군요.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있는 한나라나 민주당이 가장 반길 만한 구호가 아닙니까?(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친북좌파들의 책동!)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신물나게 보아왔건만. 문제는 (무책임한) 구호의 선명성을 좌파의 특권처럼 내세우면서 (억압받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도나 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총선을 보이콧하자는 주장은 총선일만 되면 유유히 해외여행을 나가는 태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aporia 2004-03-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초면에, 그것도 진태원 선생님 개인 게시판에서, 이런 식으로 첫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게 좀 안타깝군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위의 저 구호들이 과거의 그 '관념적인' 구호들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반복에도 차이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위의 구호가 과거의 단순반복은 아닐 뿐더러, 한-민당이나 반길 구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poria 2004-03-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위의 구호에서는 '부르주아, 의회정치' 일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고, 그 이유는 부족하지만 앞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민주주의'의 경우에도, 이를 이른바 '일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자거나, 87년으로 끝이 난 민주/반민주 전선을 지양하는 개혁(또는 진보)/보수 전선(이는 우파도 좌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를 구축해야 한다는 식의 90년대 사고를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라지는 매개자' 정도로 폄하하지 말고 '갈등적 보편성'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토론 하에 '재영유'된 것입니다(물론 '민중민주주의'가 동어반복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제안자도 그냥 '진정한 민주주의' 정도면 된다고 입장을 선회했지요).

aporia 2004-03-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총선 보이콧'의 경우도, '총선 일반'을 문제삼은 게 아니라 정확히 이번 총선에 국한시켜 얘기한 것입니다. 혹자가 지금을 '제2의 6월항쟁'이라고 말하는데, 지금은 6월항쟁에도 미달하는 것이, 왜냐하면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제도개혁(이를 위해서 최소한 '헌법'을 건드려야 하는) 논의는 전혀 거론되지 않은 채, 기존 세력들 중 어느 한 분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 정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손을 들어주려 하는 분파가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지난 IMF 이후 대중들을 가장 괴롭혔던)이기 때문에, 이는 87년 당시의 '자유bg'의 손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퇴행적인 면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87년 6월항쟁을 반복하는 수준을 위해서라도, 총선에 갇히지 말고 발본적인 제도개혁 및 (그것이 좋은 안을 내는 문제는 아닐 것이기에) 그를 위한 대중적 역량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이는 각자가 '전술적으로' 이견을 가질 수 있는 문제겠지요.

aporia 2004-03-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길어졌네요. 제가 말하려 했던 것은 이 입장이 맞다 틀리다 가 아니라 최소한 이것이 과거의 '관념적' 구호(저는 거기에도 진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를 단순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현 사태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개입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대우받을 권리 정도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입장의 선명함'만을 주장하는 좌파의 고질병... 확실히 위의 구호는 지금 정세에서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제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좌익소아병이라기보다 '막대구부리기'로 얘기해 볼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무슨 '혁명' 하자는 얘기 한 마디도 없고 기껏해야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속/확장하기 위한 조건을 사고하고 확보하자는 얘기를 한 것 뿐인데도 이 정도의 (제가 느끼기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걸 볼 때, 오늘날 민주화가 됐다지만 실제로는 지젝 등이 말하는 '좌표를 문제삼는' 사고가 얼마나 불리한 역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효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글쎄요, 지젝이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물론 그가 자유주의자들과의 전술적 연대를 말하지만, 그가 연대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중도좌파적) 자유주의자들과 남한의 신자유주의자들을 '자유주의'라는 이름만으로 동급에 놓을 수는 없을 테고, 더구나 위의 요구가 (민주주의라는) '대타자와의 과잉-동일화'라는 노선 위에 있는만큼, 위의 입장을 최소한 '유물론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까요?

aporia 2004-03-1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져서 두 분께 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비단 이 문제만 아니더라도, 항상 선배님들께 '너희들은 왜 그리 변한 게 없냐?'란 얘기를 들어서, 우리도 사고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운동 다 망한 후에 그래도 한번 뭣좀 해보겠다고 끙끙대는 후배들에게, 비판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라, 좀만 더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주십사 하는 'acting out'으로 너그럽게 봐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04-03-1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려놓고 한참 뒤에 와보니 두 가지 의견들이 붙어 있군요. 어정쩡한 입장인 것 같아서(부끄럽긴 하지만, 또 사실이 그렇긴 합니다) 뭣하긴 하지만, 로쟈님이나 아포리아님 이야기 둘 다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좌파와 극우파의 <객관적 동맹>에 관해 말했던 게 생각나는데, 로쟈님은 이 점을 우려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아포리아님의 논평은 현재 좌파들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직면해 있는 어려움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고, 최원 씨의 글을 이러한 난점을 돌파하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도 공감이 갑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논평을 달아준 분들 덕분에 조금 눈이 트이는 것 같아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별로 도움이 못되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발리바르의 글들을 비롯한 몇 개의 글을 번역해서 실을 생각인데, 그게 얼마간 면피의 구실을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 오늘자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어제 낮에 기자가 전화를 해서 [교수신문]에 실린 기사에 관해 몇 가지 묻길래 2-3분 정도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사를 봤더니 대략 논점은 전달한 것 같은데, 초점을 "일급 필자들"의 오역에 맞추고 있더군요. [교수신문] 기사(아래 [동문선 출판사에 관한 두 개의 기사]에 실려 있습니다)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 논점은 오역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체계를 고치고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있는데, 이 기사만 읽으면 제가 마치 "일급 필자들"의 오역을 고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좀 동의하기 어려운 발상입니다.

이름 있는 필자나 역자들일수록 번역에 좀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 당연한 개인적 윤리이겠지요. 그리고 <특히> 김성도 교수의 번역본들은 알아볼 수 없는 오역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그가 그런 오역으로 <번역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 지식계의 대표적인 코메디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는 제가 오역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 책들에 관해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누구누구가 오역을 했고, 어느어느 출판사에서 오역본을 냈더라는 게 아니지요.  오역은 누구나 범하기 쉬운 일이고, 또 국내 출판사들 중 오역에서 자유로운 출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민음사 같은 국내의 대표적인(물론 <규모>면에서) 단행본 출판사에서도 여러권의 오역본들을 냈다가 그 중 일부(특히 들뢰즈의 저작)는 재번역 중에 있고, 문학과 지성사 같은  전통있는 인문학 전문 출판사의 책들 중에도 심한 오역을 범하고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역을 범했을 경우, 책임을 지고 재번역을 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오역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묵혀 두거나 개역하는 시늉만 한 채 값만 올려받는 출판사들에 비해서는 정직한 태도지요. 하지만 이처럼 개역본을 낸다 해도 독자들 개개인이 이미 입은 피해는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제가 아는 한 오역본 구입한 독자에게는 개역본을 무료로 준다고 말한 출판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역의 가능성은 항상 상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오역본의 개정본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거지요. 다시 말해 한 개인에게는 오역이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지만, 적절한 출판 체계를 갖춘다면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지는 오역을 걸러내고 바로잡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좁은 의미의 출판방식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지식체계를 어떻게 개조하고 지적 역량을 어떻게 축적해나갈 것인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를 읽는 사람들이 이런 저의 생각을 고작 "일급 필자들"의 오역을 겨냥하는 고발로 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시각] 다시 불거진 '오역' 논란
"1급 필자들 글도 誤譯투성이"…'벼락치기 번역' 언제까지?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오역(誤譯)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진태원(서울대 강사)씨가 최근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 독자 서평에 자크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교수신문’이 보도하자 번역자 이경신(박사 과정)씨가 반박문을 올렸다. “데리다 특유의 문체를 살리려는 시도였으므로 ‘모든 페이지가 오역’이라는 말은 잘못됐다”고 반박했지만 “번역 기간이 짧은 데 따른 부주의에서 (일부 오역이) 기인했다”고 했다.

진씨는 이 책에서 오역의 예를 10개나 들었다. 예를 들어 79페이지 “저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종종 악용되는 결합의 특징을 아랍적, 그리고 차례로 이슬람적이라고 말합니다”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식으로 자주 악용되곤 하는 붙임표를 쓰지 않기 위해 저는 차례차례 아랍 그리고 이슬람이라고 말합니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씨의 초점은 ‘불량배들’의 오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역)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이진경 등 역) 등 국내 인문학계의 ‘일급 필자’들이 번역한 책에 대해서도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등 오역이 많다”며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서를 서둘러 번역해서 내놓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번역이 있는 한 오역은 피할 수 없는 멍에일까. 한 유명 출판사가 펴낸 미국여행기는 ‘주유소’란 뜻으로 쓰인 ‘스테이션(station)’을 ‘역(驛)’이라고 썼고, 이름난 관광지인 ‘사우전드 아일랜드’를 ‘1000개의 섬’이라고 직역하기도 했다. 영미문학연구회는 최근 기존 영미 고전 번역본들이 오역 투성이란 연구를 내놨고, 이름난 작가의 ‘삼국지’ 번역에도 오역이 많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오역(誤譯)’의 근본 원인으로는 번역자에게 시간을 너무 짧게 주는 출판계의 고질적인 관행이 지적된다. 또 번역이 학술 업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연구자들에게 ‘과외의 일’쯤으로 치부되는 것도 문제다. 김지원 한국번역학회장(세종대 교수)은 “번역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른 전문가나 외국인과 토론해야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드러내길 싫어한다”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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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회성 기사의 한계라고 봐야겠지요. '일회성', 그리고 '기사'(=저널리즘). 중요한 문제제기가 일회적으로 휘발되어선 곤란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제도적인 개선방향을 시급하게 모색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계속 '발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공부하는/공부한다는 사람들에겐 있는 것이겠구요(물론 '조선일보'에 대한 '발언'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balmas 2004-03-1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전화를 받자마자 퍼뜩 <내가 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것도 일종의 기고에 해당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석고대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반성해야겠군요.
 

한국일보

[출판] 인문출판 20년 동문선 신성대 사장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4년 02월 02일 (월) 18:39
‘신학이란 무엇인가’(데이비드 F 포드 지음, 강혜원 등 옮김), ‘코란이란 무엇인가’(마이클 쿡 지음, 이강훈 옮김), ‘푸코와 문학’(시몬 듀링지음, 오경심 등 옮김)….관련 전공자가 아니면 들춰보지도 않을 만큼 난해한 내용, 표지엔 저자 사진 한 장 달랑 넣은 단순한 디자인으로 일관된 동문선의 ‘문예신서’ ‘현대신서’시리즈는 사흘이 멀다 하고 한두 권씩 나오고 있지만 판매와 거리가 멀다. 문예신서는 1988년, 현대신서는 98년부터 선보이고 있다.신성대(50) 동문선 사장은 20년간 이처럼 ‘안 팔리는 책’을 만들어온 괴짜 출판인이다. 84년 ‘뭣 모르고’ 출판사를 인수한 후 지금까지 500종가까이 책을 내면서 그에게 남은 건 수 억원의 빚과 팔리지 않은 수십 만권의 재고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표정은 밝기만 하다.

‘자선사업을 하는 것인가’란 물음에도 “이윤 따지려면 진작에 배추장사로 나섰다. 웬만한 책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에둘러 말했다. 그래도 책을 엄선해서 낼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태산은티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으로 응답한다. “팔릴 만한 책을골라서 내는 것은 자기 집에 정원을 꾸미는 것에 불과해요. 보기 좋은 정원수를 가꾸기보다는 자연을 흉내내고 싶다고 할까요.”그의 뚝심과 옹고집에 원고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판매 걱정을 해준다고 한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 중에 99%가 초판만 찍었고, 그것도 팔리지않아 대부분이 창고에 쌓여 있으니 그럴 만하다. 일산에 있는 60평짜리 농가 창고 3개 동에 보관된 책들은 관리비만 한 달에 270만원, 1년이면 3,000만원이 들어간다.그러나 ‘소도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는다’고 했던가. 그 동안 많은 책을내다보니 베스트셀러도 있긴 있었다. 2000년 처음 출간된 ‘느리게 산다는것의 의미’(1~3)는 30만부가 팔려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려운 책들을 다루다 보니 답답해서 머리 식히려고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끝나고도 6개월이나 묵혀두었고 초판도 2,000부만 찍었죠.”여기에 소설가 이외수씨의 작품 ‘말 더듬이의 겨울수첩’을 비롯해 10여권이 그의 빈 주머니를 그나마 채워주고 있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과 함께 상경한 신 사장은 신림동 판잣집에서 새벽엔 신문배달, 밤엔 지게를 지고, 주말에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등 해보지 않은일이 없을 만큼 고생도 실컷 했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해양대 부설 해양전문학교를 졸업, 7년간 외항선 기관사로 세계를 누비며 돈을모아 출판사를 냈다.

서울 마장동 전셋집에서 살다가 최근에야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했다는 그는 가난이 지긋지긋하기도 할 법한데 여유만만하다. 쪼들리는 생활속에서도 중학교 때부터 배운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1년에 2,000만~3,000만원씩 지원금도 내고 있다.IMF 외환위기 후에는 회사 사정이 더 어려워졌지만 출판에 대한 열정은더욱 뜨겁다. 지난 해에는 86권을 냈는데 올해에는 100권, 앞으로 하루에한 권씩 내는 게 목표이며 조만간 각종 사전 편찬에도 뛰어들 예정이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작업에 방해를 받을까 봐출판사 간판도 없애버렸다.“‘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서울 종로구 관훈동 사무실 한 켠에 적힌 ‘꾸준함을 이기는 경쟁자는 없다’는 글귀가 동문선의 꿋꿋한 자세와 신념을 함축하고있다.

/글 사진 최진환기자 choi@hk.co.kr

 

교수신문

외국서적 번역 이대로 좋은가...짧은 시간에 졸속 양산
프랑스 철학서들 오역논란 빚어

2004년 02월 26일   강성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최근 철학계에 오역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가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데리다의 '불량배들'(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刊)에 대한 독자서평을 올리면서 불거졌다. 진 씨는 '불량배들'이 "거의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으며, 개념을 잘못 옮긴 부분도 많다"라며 예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또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옮김, 민음사 刊),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옮김, 한뜻 刊)도 오역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진 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진경·권순모 씨가 옮긴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 刊)도 "매 쪽마다 심각한 오역이 하나씩 나온다"라고 지적하는 등 "학술적 인용을 위한 전공도서로는 문제가 많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철학서적의 번역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프랑스 철학일수록 오역논란이 그치질 않는다. '믿음에 대하여'(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를 비롯한 지젝의 책들, '진보의 미래'(도미니크 르쿠르 지음, 김영선 옮김) 등이 구설수를 타고 있다. 특히 '진보의 미래'는 읽을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후문이다. 그러다보니 프랑스 철학서들을 많이 펴내는 동문선, 인간사랑 출판사는 '오역 공장'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동문선의 신성대 대표는 "우리 책이 오역이 좀 있죠. 고쳐야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줄일 지는 대책이 서지 않고 있다. 동문선은 거의 4일마다 책을 한권씩 내는데 "실용서 개발로 경영손실을 충당하면서 학술번역은 좀더 신중을 기하면 어떤가"라는 질문에 "전공자의 번역기피가 심각한 상황에서 마냥 역자를 기다릴 순 없다. 올해는 3일에 1권씩 내야 먹고살 것"이라고 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좋은 책이 죽는다는 것도 문제다. 안 팔리다보니 금방 절판돼, 불명예를 안고 죽어가는 책들은 보는 識者들의 한숨을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오역을 막기 위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프랑스학회, 프랑스학회, 한국불어불문학회 등 관련 학회에서는 필요성만 인정할 뿐 구체적 고민은 없는 상태다. 최근 '영미문학연구회'가 학진 지원연구로 광복 이후 2003년 7월까지 발간된 번역본 573종을 평가한 사례는 꽤 고무적이다.


학술지에서 '서평'란이 없어지는 것도 번역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학진의 학술지 평가나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에서 서평에 점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글쓰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학술진흥재단 측은 "학술지평가의 평가 항목 중 편집위원 연구실적 부분에서 서평을 연구실적으로 일정비율을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제 지식인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진태원 씨는 번역에 대한 토론영역을 섹트별로 나눠서 차례차례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식인을 활용하는 출판시스템의 문제, 오역과 스타일의 구분, 분석철학·정치철학·형이상학 등 분과별 참조점의 차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하는 문제, 많은 인적자원을 거느린 대학출판부의 역할강화 문제 등을 논해서 번역에 대한 지적 公準을 마련하는 일 말이다.


이번 '불량배들'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비평문화의 부재 위에서 제기됐다. 이 책의 번역자인 이경신 씨는 "모든 페이지가 오역이라는 비판은 잘못됐으며, 짧은 기간과 薄利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번역에 나선 역자에게 치명타를 안겨주는 발언"이라며 자기성찰적인 비판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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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3-0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아연실색입니다!!
이만하면 필화사건(?)으로 불붙은 건가요? ^^; 당연히 중요하게 지적되었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혹 어려움 겪고 있다면 힘내세요. ^^

balmas 2004-03-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좀더 문제가 널리 알려지고 검토되고 해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동문선 출판사라는 한 출판사의 문제는 아니지만, 동문선 출판사는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 사회 지식-출판 시스템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증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관해 조만간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간단히 적어서 올려놓겠습니다. 한번 같이 토론해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