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저는 제가 멀리 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로쟈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모든 국민'이라고 한 건, 한반도, 특히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부시와 국내외 수구세력들 및 노무현 정부의 동맹 때문에 객관적으로 피해를 입을 거라는 점을 지칭한 것이지, 주관적인 감정을 가리킨 게 아닙니다. 곧 모든 사람이 노무현 정부와 수구반동세력의 불가피한 결탁에 주관적으로 고통스러운 느낌을 가질 것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표현을 다시 보니 그렇게 읽힐 만한 소지가 있더군요.
그리고 조선일보와 같은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모든 정부가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하셨는데, 이건 제 의도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도덕성 운운하면서 노무현 정권을 협박하는 거나, 제가 [조선일보] 사설을 인용함으로써 사태의 위중함을 지적한 것은, “다른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안하는데, 노무현 정부만 거짓말한다. 그러니 나쁜 놈들이다. 그러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노무현은 물러나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읽기에 [조선일보]가 제기하는 쟁점은 이런 겁니다. “노무현 정부는 정권 초창기부터 늘 자신의 정권의 도덕성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알고봤더니 노무현 정부는 김선일 씨의 피랍 사실을 미리 알고도 이를 모른 체했다. AP 통신 문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AP 통신 문제는 한편으로 외무부, 국정원으로 대표되는 정보 지휘체계가 대통령에 의해 제대로 지휘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체계,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었다면, 대통령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 체했다는 게 된다. 대통령이 김선일 씨의 죽음을 알면서도 방치했다는 말이다. 이게 정부인가?”
사실 이 문제는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 같은 곳이었다면, 대통령 탄핵 사유에 해당할 만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아직 그만한 법정신을 갖고 있지 못해서 그정도까지 밀고가지는 못하겠지만, 당장 외교부장관과 국정원장 목이 날아갈 만한 문제입니다. 특히 국정원장 목이 날아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국정원은 국내외 정치, 안보와 관련된 모든 주요 정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하고, 특히 지난 오무전기 노동자 피살사건 및 일본 민간인 납치 사건 이후 이라크와 관련된 상황을 낱낱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장이 경질된다는 것은 국정원이 이 일을 소홀히 했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김선일 씨 피랍 사실을 알고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실이 개연성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김선일 씨 피랍 사실은 당연히 노무현 씨에게 보고가 되었고, 노무현 씨도 당연히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훨씬 더―몇 퍼센트의 확률인지는 불확실하지만―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지요.
어쨌든 이제 이처럼 [조선일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이 이를 공개적인 쟁점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실제로 AP 통신 문제가 토요일 모든 신문의 1면 톱기사였습니다]. 앞으로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벌어질 것이고[김선일 씨 피랍 의혹에 관한 국정조사에 여야가 합의를 봤습니다], 언론에서는 특유의 하이에나적 속성을 발휘하여 소소한, 그야말로 소소한 의문점들을 이리저리 재구성하고 짜맞추고, 심야토론이니 100분 토론이니 하면서 각계의 의견을 듣고 하겠지요. 노무현 정권은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든 사태를 외교부장관과 국정원장 교체를 통해 마무리하려 할 것이고,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등은 이 문제를 계속 물고늘어지면서 최대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겠지요.
이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파병철회냐 파병강행이냐가 아니라, 이 정권이 얼마나 기만적인 일들을 했고, 이 정권의 어떤 사람들, 어떤 선까지 은폐에 가담했고, 얼마나 이 정권의 국정시스템이 부실하고, 그러니 이 정권의 시스템을 어떻게 개조해야 하고 등등에 맞춰질 것입니다. 김선일 씨 피살에 대해 울분과 애도의 감정을 표시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는 사이에 국회 한 쪽에서는 전투병 파병에 대한 여야 간의 조용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훨씬 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부대가 파병될 것입니다.
그러니 게임은 수구반동세력의 압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강력한 부대가 파병될 것이고, 김선일 씨 피랍 의혹이 대통령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청와대나 열린 우리당은 최대한의 양보를 하면서 타협점을 모색하겠지요[열린 우리당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노무현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이 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또 이 정권의 통치 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하고 부실한 것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또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각인될 것입니다. 완고한 노사모들만 이를 거부하고 부정하겠지요.
제가 노무현 정권이 유령이 된 채 꼭두각시로 놀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요?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하듯이 “대통령님 우리를 살려주세요. 군대를 파병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애원할까요? “수구반동세력에 놀아나지 마시고, 미국의 손아귀에서 꼭두각시처럼 놀아나지 마시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우리를 돌봐주세요”라고 애원해야 할까요?
오히려 어떻게든 망각되고 배제되어 가는 파병철회라는 쟁점을 제기하고, 노무현 정권이 파병철회를 하도록 촉구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기어이 파병철회를 강행하려 한다면? 그래서 기어이 수구반동세력과 결탁하게 된다면? 그때는 퇴진투쟁, 타도투쟁을 하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느냐고요? 사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두달 전에 탄핵으로부터 지켜낸 사람을 다시 몰아내야 한다는 데 당혹스러워하는 게 사실이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주저하는 게 사실이지만, 힘이 없다고 해서, 역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냥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또는 오히려 올바른 싸움의 쟁점과 방향을 제기하고 사람들을 이쪽으로 끌어모으려고 노력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제가 너무 멀리 나간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