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이 사람이 죽는다면.

"지금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내 손이 올리브 가지를 놓지 않게 해 달라"

이스라엘이 중동 각국을 상대로 연이은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로서의 면모를 나날이 일신하고 있던 1970년대, 유엔 총회장에 망명자의 신분으로 나타나 세계를 상대로 연설을 했던 그 사람, 이제 거의 죽어가는 모양이다. 방금 전 뉴스를 보니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하는데, 뉴스 나오는 형식을 보니까 거의 가망이 없는 듯하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 사람, 그리고 싫든 좋든 그를 보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들.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집안은 아마도 무명의 상인 집안이었던 듯하며,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 아라파트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외가였다. 아라파트의 외가는 팔레스타인의 양대 세도가문으로 통했던 알 후세이니 가문이고, 아라파트는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어릴적에는 알 후세이니라는 성(姓)으로 알려졌던 아라파트는 후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투신하면서 스스로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이름을 지었다. '아라파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근방에 있는 평원의 이름이고, '야세르 아라파트'는 '아라파트 평원의 근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아마도 일평생 일평생 근심걱정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아라파트의 정치활동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일어난 전쟁에 참전하면서 시작됐다. 유태인 시오니스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됐고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는 확인사살에 불과했을 수도 있지만, 아라파트는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에 맞서는 평생의 임무를 시작했다. 아라파트가 대학생이던 시절의 카이로는 (지금도 그렇듯이) 아랍 지성계의 중심지였고, 카이로의 대학들에는 중동 각지에서 온 해방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의 한 명이었던 아라파트는 선동가 자질을 타고난 덕에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학생 동맹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아라파트의 공식 호칭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반'이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혹은 지금도) 아라파트의 이름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라파트는 1959년 PA의 전신 격인 PLO의 주축 '알 파타' 조직을 창설했다. 알 파타는 10년 뒤 PLO로 확대개편됐으며 아라파트는 PLO를 통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한다. 격렬한 투쟁을 통해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에 맞선 해방운동의 상징이라는 위상을 얻게 됐고, 첫머리에서 말한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았다.

아라파트의 투쟁 역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국제사회에서는 '상징성'을 인정받았지만 팔레스타인의 해방운동은 곡절에 곡절을 거듭했다. 1970년대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아랍 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는 무능력할 뿐임을 보여줬고, 투쟁은 침체기를 맞는다. 다시금 투쟁에 불길이 붙었던 것은 1988년, 이른바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때였다. 인티파다는 당초 이스라엘 점령 뒤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일으킨 자발적, 비조직적 봉기였지만 바로 그 '상징성' 때문에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한 PLO 세력에 다시금 힘이 실리게 된다(아라파트가 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고 보는 운동 내부세력들은 아라파트 세력이 민중봉기의 성과들을 가로채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인티파다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채 끝난 이후 아라파트의 노선은 눈에 띄게 타협적으로 변해간 것이 사실이다. 아라파트의 인생역정에서 가장 화려했던 것은 아마도 1993년 최대 적수였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평화협정을 맺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오슬로 평화협정'의 공적을 인정받아 이듬해 라빈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지만, 아라파트의 이후 행로는 평화 혹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화협상 뒤 라빈 총리는 유대 극우파에 암살됐으며 평화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다. 팔레스타인만 놓고 보자면, 이 문제는 아라파트의 권력기반과 관련이 있다. 아라파트는 앞서 말한대로 팔레스타인의 전통적인 세도가문 출신이고, 계급투쟁 우선론자들은 그의 부르주아지적 속성을 줄기차게 비판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라파트의 기반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밖에 있는 사람들 쪽에 있다는 점이다. 시오니스트들의 정착 이후, 특히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나 아랍권을 떠돌게된 난민들은 4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의 산물인 이 난민들의 염원은 당연히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팔레스타인 땅에서 지금도 힘겹게 이스라엘과 '공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생존 차원에서라도 이스라엘과 평화적 관계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난민들의 귀환을 보장해줄 것인가. 좁디 좁은 땅에 난민들까지? 이스라엘은 절대로 이 문제에서는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그러면서 자기네들은 세계 각지의 유태인들을 불러모으고 있지만), 난민들은 이 문제를 속수무책으로 방기한 아라파트를 거세게 비난해왔다. 다름아닌 아라파트의 지지기반이 난민들인 마당에,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라빈 암살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잇따라 강경 보수정권이 들어섰고, 그 중 압권은 1982년 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의 주범인 아리엘 샤론이 2001년 총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후 3년간, 아라파트의 형편은 고난 그 자체였다. 가택연금에 암살 위협, 게다가 팔레스타인 안에서 지지 상실 등 내우외환이 겹쳐 사실상 정치력을 행사하지 못해왔다. 말 그대로 '상징'이었을 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내의 분란조차도 잠재울 능력이 없었다.

한때 아라파트는 '부도옹'이라 불렸다. 오뚜기처럼 역경 속에서도 일어났던 아라파트. 이재에 밝아 숨겨놓은 재산이 엄청나다고도 하고(마타도어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스라엘로부터도 알게모르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풍문도 많다. 어찌됐든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모든 공과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아라파트는 '상징 그 이상의 상징'이다. 죽음을 앞둔 아라파트를 지켜보면서 이스라엘은 어쩌면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카운터파트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라파트를 노골적으로 미워했던 조지 W 부시는 재선의 기쁨에 더해 아라파트의 죽음을 속시원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라파트와 어떻게든 연관이 되어있는 아랍권 국가들은 자국 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그 땅의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상징을 잃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통치력 없는 자치정부와 난립중인 무장투쟁단체들 틈에서 어떻게든 질긴 목숨을 유지해가겠지만, 그들의 운명이 더욱더 험난해질 것만은 틀림없다. 희망이란 무엇이길래, 어떤 민족에게는 이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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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문학, 그리고 맥주가 생활 속에…

 

동유럽 여행기 <1>체코 프라하

이상희 <ishtarfor@hanmail.net>
          
▲ 유람선에서 본 밤의 프라하.  ⓒ 이상희

석양이었습니다, 프라하는….

밤에 도착한 공항은 처음인가? 기분 탓인 지 프라하 공항은 애잔한 느낌을 주네요. 시설이나 디자인은 아주 세련됐는데….

위협적이거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변과 어울린, 보기 드문 공항 건물입니다. 공항 주차장 조명이 녹색 창과 아이보리색 벽에 부딪혀 따뜻하고 친근해 보이네요.

사실 공항들 다 비슷하고 거기서 거기지만 버스를 기다리고 앉아있으니 전에 김해공항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도 혼자 해지는 시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요….

참, 제가 비행기로 여행을 다니니 '웬 호사?'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으실 듯합니다. 저도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저가 항공사들이 엄청 많습니다.
GO-FLY, EASYJET., RYANAIR….

물론 시시각각 요금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터넷을 잘 두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행 한 코스를 마치고 와서, 싼 표를 찾아서 돌아다니다, 좋은 조건을 찾으면 바로 떠나는 그런…. 아무튼 좀 황당한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프라하도 영국까지 왕복항공료가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였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런던까지 기차 타고 가는 것보다 싼 가격입니다.

▲ 유람선에서 본 프라하.  ⓒ 이상희

프라하는…. 너무 반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깨끗하고 이쁘고…. 근데 사람들이 저마다 가장 인상적인 도시로 꼽는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부다페스트 쪽이 더 좋았거든요. 좀 더 아담하고 따뜻한 느낌, 관광객이 적어서 그런가…. 사람 사는 데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프라하보다 좀 더 가난한 느낌이지만.

영어 식으로 프라그라고 부르는 게 듣기 싫데요. 도시들 이름 그 나라 식으로 제대로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이탈리아 쪽도…다 영어 식으로…. 오죽했으면 밀라노에서 나오는 가이드북 이름이 <밀란 이즈 밀라노>…. 거꾸로였나?

제가 아무리 방향치일지라도, 한 도시에서 이틀쯤 지나면 대강 윤곽이 잡히고, 다니는 데 별 문제가 없어집니다. 근데 프라하에서는 나흘이 넘어가도 계속 헤매고 다녔습니다. 작은 지역들은 익숙해지는데, 그것들이 결합이 안되는 겁니다. 심지어 가이드 투어까지 했는데 말이죠. 이유를 모르겠어요….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에는 다리가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다리는 '카를 다리'입니다. 프라하성이랑 시내 쪽을 연결하는 다리지요. 이 다리에는 아주 근사한 조각들이 많이 있는데,게 중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조각이 있지요.

▲ 체코 성인 Jan Nepomucky의 조각상.  ⓒ 이상희
Jan Nepomucky라는 체코 성인의 조각상입니다. 조각상 아래 쪽에 조각되어 있는, 순교하는 성인의 모습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주신다네요.

우리네 부처님들이랑 비슷하지요. 그 옆의 개의 조각을 붙잡고 기도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일생, 자신에게 충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요? 그 얘기를 프라하 가기 전부터 들어서, 계속 고민하다 카를 다리를 한참 가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만 들어준다니까 뭘 원해야 되는지 도저히 고를 수가 없더라구요. 그냥 구경하고 다시 가면 될텐데 인간이 고지식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비겁하게 두리뭉술한 소원을 만들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남해 금산 보리암 갔을 때도 소원 하나 들어주신다고 해서 전날 밤부터 계속 고민했었는데…. 하여간 인간이 얄팍해요…하하.

프라하 성내의 성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창은 보통 스테인드 글래스 분위기인데 창 하나가 선명한 채색화의 느낌을 줍니다.

창 옆의 벽에도 그림이 인상적인데, 프레스코화도 아닌 것 같고 마치 판박이를 붙여놓은 느낌이었습니다. 성 조지 교회당은 천장이 나무로 격자무늬 모양으로 짜놓아서 독특해 보였습니다. 미사 의자도 이때까지 다녀본 중에 가장 질이 좋아보이더군요.

성내의 황금 소로는 예전에 연금술사들이 연구하던 집들이라네요. 카프카가 잠시 집필했던 집도 있구요. 지금은 공예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로 꾸며져 있는 집들을 구경했습니다.

그 집들 낮은 2층은 쭉 연결되어 갑옷이나 창들을 전시해 놓았더군요. 근데 그런 건 별로 재미없고 벽에 있는 창이 아주 독특하데요. 통나무를 잘라 중간에 사각으로 홈을 파서 끼워 놓은…잘 설명이 안되네요. 어쨌든 재미있는 창이었습니다.

프라하에는 카프카의 흔적이 참 많네요. 하긴 카프카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 조각들을 그냥 생활로 받아들이는구나 싶을 정도로 문화적인 분위기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집.  ⓒ 이상희

전에 프라하를 다녀오신 분이 저더러 꼭 프라하 가야한다고 하셨는데 이유를 알겠더군요. 프라하는 맥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입니다. 오리지널 버드와이저를 비롯해…. 버드와이저나 미켈롭이 체코의 지방 이름이라네요.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많습니다. 저는 부드러운 라거 보다 비터 쪽을 좋아하는 편이라 영국 쪽 맥주가 더 입에 맞지만 워낙 다양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으니 종류별로 맛보는 재미로 마시게 됩니다. 밥 먹으면서도 한잔, 길 가에 앉아 쉴 때도 한잔, 목마를 때도 맥주 한 캔…하루종일 맥주를 달고 다닙니다.

프라하에서 밥 먹고 물론 맥주도 마시고…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맞고 가든지 기다려 보려고 하는데 제대로 비를 피할 곳도 마땅찮고 계속 더 심해지데요.

그 핑계 대고 가까운 펍으로 뛰어들었는데…이 집 참 좋더라구요. 테이블 다섯 개 정도의 작은 가게인데 아주 관록있는 느낌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참 편하게 해주시더군요.
낯선 나라에서 처음 간 곳인데도 늘 다니던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낮에는 웬만히 혼자 있어도 밤에 혼자 술집에 가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지요.

체코 물가가 싸다고 하지만 서유럽 사람들 기준으로 그런 것 같고, 그냥 우리랑 비슷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체코 음식들은 먹을 만 하구요. 전통 스프라는 건 스코틀랜드 홈메이드 스프랑 거의 흡사합디다.

▲ 프라하 성내의 황금 소로.  ⓒ 이상희

기름기가 약간 많은 게 차이랄까? 닭 같은 걸로 육수를 내는 것 같고 감자, 당근, 샐러리 같은 야채를 잘게 썰어서 푹 끓였는데 거기다 보리 비슷하게 생긴 곡식을 같이 넣었더군요. 국에 밥 말은 것 같은 식이었습니다.

체코는 웨이터들이 우리 1년치 영수증 모으는 지갑처럼 칸이 많이 나눠진 지갑을 들고 다니며 바로 계산을 해줍니다. 돈의 단위가 워낙 많아서 그런 걸 사용하나본데 볼 때마다 좀 우습더군요.

제가 워낙 수치에 약하다 보니 체코랑 헝가리에서는 화폐의 단위나 가치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고생하다가 그냥 환산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습니다. 도대체 유로화 전에는 어떻게 유럽 여행을 했는 지 존경스럽더군요. 그때 여행자들….

밤에 유람선을 탔습니다. 강을 따라 서너 시간 내려가는 코스였는데 좀 어설프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도 있구요. The Girl From Ipanema, La Vie En Rose 같은 곡들을 연주하는데 공간이 넓으니 소리가 다 퍼져버리네요. 다리 밑을 지나갈 때는 소리가 울려 제법 들을만 합니다. 역시 울림판이 중요하군요.

이 많은 사람들 중 일행 없는 혼자는 또 저 하나네요. 이제 적응도 되어가지만 특히 이런 밤 유람선 같은 데는 워낙 다정한 사람들이 많아서 강바람이 더 춥게 느껴집니다..

강 중간쯤 갔다 다시 돌아오는데 요즘 해가 늦게 지니 프라하성 조명이 켜지는 걸 기다리느라 배가 일없이 빙빙 돌고 있네요.

▲ 성 비투스 성당.  ⓒ 이상희

마지막날은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에 갔습니다. 이곳은 동화 속 마을 같았습니다. 처음 이 도시로 접어들 때, 숲 속에 작은 성 같은 호텔과 예쁜 집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모습이 참 이쁘더군요.

마침 영화제가 한창이었는데 김기덕감독전이 있어서 거리에 영화를 소개하는 대형포스터 중에 '나쁜남자'도 보이더군요. 워낙 광적인 분위기의 부산국제영화제 밖에 영화제를 본 적이 없는지라, 영화제 때문에 복잡하다고 하는 데도 그냥 느긋한 관광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작은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온천수가 나오는 곳들이 있어서 도자기로 된 전용컵으로 오며가며 마시고 다닙니다. 거리 중간에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많은 도로는 그 길에서 담배를 필 수도 없고 개를 데리고 다니지도 못하게 해놓았더군요.

모든 여행길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만 들어나 봤습니까? 투어버스 운전사가 차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얘기…. 황당하더군요. 프라하에서 다시 차가 와서 태우고 간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프라하로 돌아가는 일 밖에 없는 듯 느긋했지만 저는 그날 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를 타야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도 미안하다는 얘기만 하고…예정보다 세 시간쯤 늦게 출발해서 정말 열심히 달리는데… 세상에 우박이 쏟아지데요. 정말 차 지붕, 창에서 툭탁툭탁 소리가 나도록 큰 우박들이….

▲ 황금 소로의 통나무 창.  ⓒ 이상희

겨울에는 지름 2,3 cm의 우박들이 온다고 하네요. 와이퍼를 움직여도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을 만큼 내리는 상황에서 당연히 거북이 걸음…어쨌든 기차 타기는 탔습니다. 진땀났지요.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 가는 기차는 침대칸이었습니다. 3인용 객실이었는데 출발할 때까지 다른 손님이 없더군요. 마침 승무원아저씨도 너 혼자 쓰는 거라고 얘기하셔서 횡재다 생각하고 대강 싼 배낭 짐 풀고 세수하고 난리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막 두드립디다.

3중으로 잠궈놓은 자물쇠를 겨우 열었더니 아까 그 승무원아저씨 안면을 바꾸시고 딱딱한 표정으로 니 자리는 꼭대기라고 하시는데…. 그 뒤로 서너살된 꼬마랑 젖먹이 아기를 안고 산만한 배낭을 진 엄마가 들어옵니다.

부랴부랴 짐을 삼층으로 쓸어 올리고 인사를 하는데, 그 시끄럽고 답답한 침대칸에 갓난아이가 탔으니…애기 엄마는 미안해 하지만 어쩌겠어요. 다들 고생하고 가는 수밖에….

근데 이 열차가 체코에서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로 들어가니 겨우 애 재울 만하면 국경 통과하는 검문소입니다. 나가고 들어가고 도합 4번의 여권검사로 다들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 프라하 전경.  ⓒ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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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의외로 굉장히 섬세한 분이시군요.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생각난 김에 따우님 방에 가서 알래스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거든요. 따우님은 안 계셨지만......
그런데 프라하 기행문을 쓴 이상희 씨가 <잘 가라 내청춘>의
그 시인 이상희 씨는 아니겠죠?
담담한 여행기와 사진이 마음에 듭니다.
고마워요, 발마스님.^^

balmas 2004-10-29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의외라니요??
평소에 얼마나 둔감해 보였으면 ...(ㅋㅋ)
시인 이상희 씨인지는 확인이 안되는데요.

릴케 현상 2004-10-2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 여행안내를 시작하셨네요^^

balmas 2004-10-2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는 저도 한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balmas 2004-10-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마련하셔서 꼭 가보세요.
저도 언젠가는 ...^^
(헉, 원고청탁 거절했다는 소식이 따우님 귀에까지 들어갔군요.
저는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바쁘기도 하고 데리다 추모글은
벌써 쓸 만큼 썼는지라 ...)

숨은아이 2004-10-2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를로비바리라면 베토벤도 애용했다는 온천지네요. 가보고 싶어라. 그렇게 먼 곳에서 김기덕 감독전을 하는군요!

balmas 2004-10-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죠, 베토벤도 애용했던 곳이죠.
(마치 잘 안다는 듯이 ... ㅋㅋㅋ;;;)

딸기 2004-11-05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져요. 프라하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런데 저 여행기는 퍼오신 것 같은데, 발마스님도 프라하에 가보셨던 거예요?

balmas 2004-11-0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스트롱베리님,

저 같이 게으르고 돈없는 촌놈이 프라하 같은 데 가봤을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언제 가봐야겠다, 벼르고 있을 따름이죠.^^
 


 

 

 

수정처럼 맑은 물, 그리고 '오물'의 맛

 

한스와 함께 하는 바이칼 여행 <3>멋있는 곳, 맛있는 곳
윤희만 <imhans89@hanmail.net>
          
▲ 노을 지는 바이칼 호수. 출처 http://nature.baikal.ru  

바이칼은 남부 시베리아 산지에 있는 호수이다. 호수의 길이는 636㎞, 면적은 3만1천500㎢(네덜란드의 넓이)로 세계 호수 중 면적으로만 8번째로 꼽는다.

하지만 물의 깊이와 수량을 따진다면 바이칼 호수는 어떤 호수도 따라올 수 없다. 평균 깊이는 730m, 가장 깊은 곳은 1620m, 수량은 23만㎡이다. 이는 러시아에 있는 전체 담수양의 80%, 세계 전체 담수양의 20%를 차지하는 엄청난 양이다.

호수 해안선의 총 길이는 2100㎞이다. 재미있는 것은 336개의 하천이 바이칼 호수로 들어오고 있으며, 오직 하나의 강만이 바이칼에서 나간다.

바이칼 호수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부럇트 민족인데, 현재도 이 곳에 하나의 공화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에게 바이칼 호수는 매우 신성한 곳이었다. 부럇트 민족은 돌 하나라도 함부로 바이칼 호수에 던지거나, 그 위치를 바꾸는 것을 금기시했다.

바이칼 호수로부터 빠져나가는 강은 오직 하나, 앙가라 강인데 이 강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 바이칼 호수에서 빠져나가는 앙가라 강. 이 강은 이르쿠츠크 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오른쪽이 리스트뱐까 마을이다.
출처 http://baikal.irkutsk.ru  

전설에 의하면 바이칼은 늙은 아버지이며, 앙가라는 그 딸이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잔인하고 무정했으나, 외동딸인 앙가라를 무척 사랑했다.

어느 날 앙가라는 아버지 바이칼이 잠든 사이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젊은 청년인 예니세이에게 도망간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아버지 바이칼은 크게 분노했다. 그의 분노로 하늘과 땅, 산맥과 호수가 어두워지고 천둥과 바람이 몰아쳤으며 바위들이 날아다녔다. 바이칼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바위를 앙가라에게 던졌고, 그 바위는 앙가라의 목에 걸렸다. 앙가라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빈다.

앙가라는 “아버지, 바위 때문에 아무것도 마실 수가 없어요, 제발 물 한 모금만 마시게 해주세요”라며 빌었지만 아버지는 매정하게 답했다.
“너에게는 물 한 모금도 줄 수 없고, 단 내 눈물만 줄 수 있다.”

그래서 현재도 바이칼에서 앙가라 강으로 빠지는 호수 어귀 가운데를 보면 바위 덩어리가 올라와 있다. 그 바위가 바로 바이칼이 딸에게 던진 바위라 하고, 앙가라 강은 계속 가다가 러시아의 유명한 강 중 하나인 예니세이 강으로 빠지게 된다.

▲ 나무 아래 물을 퍼가는 구멍이 있다.  ⓒ 윤희만

근데 차로 가다가 그 바위를 본 한스는 바위가 생각보다 작아 의아해했다.
한스: 흠…저 바위가 목에 걸렸다니.. 별로 안 큰데.
운전기사: 물 위로 올라와 있는 건 작지, 물 속에 있는 부분은 얼마나 큰데.
한스: 글쿠나….

예로부터 샤머니즘을 믿는 부럇트 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장소들은 바이칼 호수 곳곳에 있다. 현재도 부럇트 족이건 러시아 현지민들이건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동전, 담배 등을 던져놓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리랑 같이 다니던 기사 아저씨도 차를 세워두고 담배 한 개피씩을 던져놓았다.

겨울 바이칼은 장관이었다. 전설처럼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바이칼 호수는 러시아의 국립공원이기도 하고, 유엔에서 정한 자연보호지역이기도 하다.

처음에 어렵게 묵었던 집은 바로 바이칼 호숫가에 있었다. 집을 찾을 때는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호수 얼음 위에 있는 조그마한 전나무들이었다.

▲ 바이칼 호수의 얼음 조각. 먹어도 된다. 입이 꽁꽁 얼지만.  ⓒ 윤희만

호수는 전체가 얼어 있었다. 육지와 가까운 얼음 위에 중간중간 있는 전나무의 정체는 일종의 우물이었다. 사람들이 그 곳에 얼음을 깨고 나무를 세워놓는다. 왜냐하면 다음 사람이 물을 뜨러 올 때 표지판이 되는 것이다. 깬 곳은 약간 살얼음이 얼어 있으므로 삽 자루로 톡톡 두들겨서 깨고 물을 떠간다. 그 물은 식수다. 그냥 호숫물을 떠먹는다. 워낙 깨끗하니까.

얼음 위를 처음 걸어갈 때 겁도 났다. 혹시 깨지면 어떡하지? … 어떤 곳은 얼음이 매끈하게 얼어서 속이 다 보였다. 나중에 한 친구한테 얘기했다.

한스: 얼음이 너무 깨끗해서 속이 다 보이더라. 너무 신기했어.
친구: 뭐가 보였는데?
한스: 물이 보이던데.
친구: ……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곳에서 물고기도 낚는다. 바이칼에 가기 전에 갔다 온 사람들은 '오물(омуль)'이라는 생선을 꼭 먹어보라고 했다.

▲ 바이칼 얼음 구멍에서 잡혀 올라오는 오물.  ⓒ 윤희만

▲ 금방 훈제된 오물, 싱싱하면서도 담백한 오물 맛을 한 겨울에 맛보는 것,추위도 잊게 된다!

  ⓒ 윤희만

한스: 오물이라는 물고기를 꼭 먹어보래요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요?
일행: 오물? 뭔 쓰레기를 먹으래??
한스: 헉!

발음이 좀 그렇지? 아무튼 간 날부터 계속 오물만 먹고 다녔다. 영하 20-30도에서도 호수가에 나와 나무를 지펴 훈제구이 한 오물 맛은 정말 일품이다. 그 외에도 ‘씩(сиг)’이라는 생선도 먹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선들이 있는데, 너무 생소한 이름이라 사전을 보니 하나같이 '시베리아에서 나는 연어의 일종'이라고만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물고기들은 대개가 바이칼에서만 나는 종류이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단다. 참 신기하지?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물개다.
민물에 물개가 산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는가? 특히 바이칼에 사는 이 물개를 '네르파'라고 부르는데,

▲ 바이칼에 사는 민물 물개, 네르파. 출처 http://nature.baikal.ru  

친구: 물개가 다 있어?
한스: 응.
친구: 어떻게 물개가 호수에 있냐?
한스: 그러게 말야..
친구: 봤니?
한스: 아니….

사실 이 네르파라는 물개를 보려면 북쪽으로 상당히 올라가야 한단다. 사람이 없는 오지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이라, 우리가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어쨌든 우리는 바이칼에서 맛있는 오물을 열심히 먹었다.


200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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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는데,
게으른 나는, 직접 여행을 떠날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

로드무비 2004-10-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개의 눈이 너무 슬프고 예쁩니다.
저는 오늘 아침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을 보고 알래스카에 가고 싶어
여기저기 뒤져봤거든요.
그런데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어 주옥같은 글쓰기를 포기했다는......
그런데 발마스님, 느림 님께 날렸다는 추천이 어디 있나요?^^

balmas 2004-10-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꼭 구슬같군요.^^
ㅋㅋ
다시 가서 추천했답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티토 :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뛰어난 전기작가의 세 가지 덕목

오늘날 전기작가가 주는 인상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돈나 같은 인물의 뒤꽁무니를 추적해 이들이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들을 파헤쳐 가십거리를 양산해내는 옐로우 페이퍼를 연상하거나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들이 쓰는 자서전 형태의 전기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은 일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소위 잘 알려진 이들의 배꼽 아래 이야기와 같이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 전기문학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인식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의 성공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쓰여진 여러 종의 책들을 읽어 보았으나 지난 번에 성공을 거둔 "장 코르미에" 판 체 게바라 평전이 거둔 인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흡함이 많은 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의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까닭이 책 자체가 주었던 것이라기 보다는 "체 게바라"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탓이 더 크다고 여긴다.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당시 게바라의 행적만을 무미 건조하게 추적했을 뿐, 게바라의 활동이 가진 사회적 의미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의 대응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부족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인식의 한계를 꼬집곤 하는데,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 못한 전기 작가의 저술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기작가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일급 전기작가들은 역시 일급의 역사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려고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단지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네들의 삶과 역사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듯 서로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뛰어난 전기작가는 문학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취재기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기 혹은 평전과 같은 장르에 대해 우리 문학계는 거의 전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 문학은 시와 소설만을 의미한다. 에세이 역시 일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즐기는 시중한담으로 치부된다. 이래서는 철학적 에세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에세이는 힙합이 그러하듯 한국에 와서 그저 미셀러니 수준으로 격하되며, 기자들의 르뽀 문학 역시 문학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의 르뽀가 서구에서는 정식 문학 장르 안으로 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심지어는 작가나 시인이 저술한 산문집도 문학비평에서 제외되는 협소한 장르가 문학이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의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장르로 머무는 동안 한국 문학은 계속 외국 이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고, 폐쇄적인 학문사회가 서로 인접한 학문의 교차를 금지하는 것처럼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라).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가들이 집필한 전기문학들은 문학적으로는 평가받을지 모르나 역사학자들에게는 고증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이는 문학가들의 전기문학인 탓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급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있으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없다

우리의 근대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들의 태생만큼이나 상이한 체제를 구축했고, 북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행보는 호치민식 민족주의, 티토의 비동맹외교노선, 카스트로의 반미와 일부분은 겹치고, 일부분은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보여왔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은 냉혹한 국제질서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극심한 분열 속에 놓였던 유고가 어떻게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리더십을 통해 봉합될 수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요셉 브로즈가 유고 공산당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단계, 2단계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숙청을 피해 유고지도자가 된 티토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협공으로부터 승리하여 유고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단계, 3단계는 스탈린의 공격으로부터 유고 지도자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유고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단계, 4단계는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의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들로 부터 유고식 사회주의를 지켜내는가로 구분된다. 이렇듯 20세기 가장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정치지도자 티토에 대한 평가가 단지 위대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가능하다.

제1단계는 티토가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는가를 살피는데는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892년 5월 7일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계곡에서 태어난 요시프 브로즈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 이르까지 그가 진짜 요시프 브로즈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의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티토"라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사실 무수히 많은 가명을 지닌 사내였고, "티토"라는 이름 역시 그의 무수히 많은 가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티토가 통치하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나라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유고슬라비아 인들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티토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몬테네그로인, 코소보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지명 속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경계선상에서 종교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함락시킨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대립 양상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제스퍼 리들리"가 집필한 "요셉 브로즈 티토"의 평전은 매우 뛰어난 전기작품이자, 나에겐 그간 궁금했으나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었던 지난 역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담긴 책이었다. 우리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제3세계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자 시금석 역할을 해주는 나라이지만 이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지닌 여러 궁금증 가운데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시즘에 저항한 주된 세력은 좌파였으나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까닭과 그렇게 되기 까지의 과정은 총체적으로도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각국의 사례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론적 접근방식으로야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발칸 반도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각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은 현재도 태부족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리스"를 우리는 오로지 "신화의 땅"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리스 올림푸스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활동을 보인 다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은 전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복귀한 그리스 왕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과거의 강대국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들은 그들의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은 반면, 신흥독립국들이나 약소국가들은 대개 두 가지 혹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의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것을 유럽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같이 좌파의 몰락이 기존 정치체제의 부활로 이어지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태로 전이되었다가 군부쿠데타와 연이은 파시즘적 군부독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가는 형태이거나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같이 이전의 정치체제가 파시즘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체제로 갔다가 소련의 몰락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이되는 양식이다. 

물론, 제3의 방식엔 과거 동서 냉전 시절 비동맹외교를 주도했던 네루의 인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이들 두 국가의 발전 양태나 정치 체제, 외교는 이 두 정치 지도자의 과거 행적의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만큼이나 흡사하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이후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코민테른의 악명 높은 실책들만 엮어도 책 10권은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를 비롯해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생각했고, "사회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을 위해 기꺼이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길을 택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나치즘이 소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대신에 장개석을 유일한 중국 내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학살당했지만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나라는 다름 아닌 소련이었고, 그들은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의 몰락 이후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이념을 이용했다.

티토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모스크바로 간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고 장담한다. 그러자 기업가들이 수많은 정치 헌금을 헌납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테러에 나서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노이만은 공산주의자들도 앉아서 당하지 말고, 파시스트를 공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1931년 여름 노이만이 스탈린을 만나 나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활동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 서방세계를 휩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 소련이 한숨 돌리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이만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밀어낸다면 그 틈을 노려 프랑스를 압박해 동맹체제를 구축할 요량이었다.

티토는 그 시절 국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그가 소련에서 머무는 동안 스탈린의 후계자로 추앙받던 키로프가 암살되는(실제로는 스탈린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혐의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숙청당한다. 숙청은 이 두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국제공산주의자들에게도 시행되었다. 비밀경찰들이 밤마다 이들이 묶고 있던 숙소로 들이닥쳐 체포해간 뒤 이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이 때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른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한 이유를 묻자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했을 법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르주아들의 형무소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던 소수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련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 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 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이런 말을 대신하여 생각해볼 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면 티토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무렵 만약 소련과 스탈린을 거부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트로츠키처럼 멕시코 산골의 오두막에서 스탈린의 자객이 보낸 피켈에 정수리를 찍혀 죽거나,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정치적 위상과 활동 공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 죽산 조봉암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뒤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포기한 많은 이들이 훗날 파시스트가 되어 더욱 가혹한 억압자로 나선 것을 생각해볼 때 티토의 이 말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민테른을 신뢰하지 않은 티토는 스탈린의 시선 밖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침묵했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벨기에, 네덜란드 , 프랑스를 함락시켰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유고 공산당에서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다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실시했지만, 티토는 "불만 당원이라도 교화시키면 됐지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이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에 대해 내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단 하나 그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짜르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단 하나의 목적, 러시아의 패권 유지"란 차원에서 국제공산주의를 이용했다. 책을 읽는 내내 티토에게 쏟아내는 스탈린의 증오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이런 형편 없는 나라가 70여년 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도리어 의문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본래 러시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인민의 대의를 위한 그들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 우울하고 슬픈 역사 아닌가. 티토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도살자인가? 유고 통합의 지도자인가?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유고 내부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티토 자신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고, 그는 파르티잔 세력 못지 않게 모두의 미움을 받은 이슬람 교도들을 포용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파르티잔 세력 안에는 유고 내부의 잡다한 민족구성과 이념적 다양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 티토조차 전후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세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내전을 경험했다. 북의 김일성은 신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흥학살의 역사적 진실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의 우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좌파들을 숙청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우파를 다시 제거하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김일성은 신흥 학살 사건을 미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일소해버린다. 내부의 적 대신에 외부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왜곡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티토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우스타샤와 체트니크의 악행이 워낙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데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파르티잔 집단이 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티토 역시 이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서구에 의해 티토의 공격에 종종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블라소프와 코자크인들의 경우 그들이 영국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왔으나 그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국제정세의 미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랴나를 입양한다. 미랴나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냉혹한 인종청소로 악명 높았던 밀로셰비치가 바로 이 사람이다. 티토가 죽은지(1980년) 10여년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가혹한 내전을 경험하며 분열된다. 유고가 다른 동구 국가들이 걸었던 공산화의 길과 다른 공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 이들의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는 소련의 몰락 이후 그나마 국가의 분열이나 인종청소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은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구와 동구 사이에서 그네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유고가 티토의 사망 이후 동구 해체 과정을 겪으면서 나토(NATO)와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을 만큼 가혹한 해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하다. 우선 평전인 만큼 요셉 브로즈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만 치중해서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티토가 궁극적으로 보냈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전개 과정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리처드 버튼이 1971년 티토 역을 맡은 영화) 그의 파르티잔 시절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비동맹 외교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이 책이 티토의 개인적 삶은 물론이고, 역사를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기 출간붐을 타고 판매되는 수많은 평전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도 몇 가지 단점이 보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제스퍼 리들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티토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티토의 모습이 객관성이 결여된 그에 대한 상찬으로 거듭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가 티토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장점에 어긋나는 몇몇 부분들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집권 이후 티토와 유고 공산당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그것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전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유고가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와 티토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두고 싶다. 미국과의 관계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약해보인다. 그 이외에 이 책은 번역이나 기타 편집 부분에서 역자인 유경찬 선생(그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도 번역했는데)의 깔끔한 번역 솜씨에 힘입어 흡족한 수준이지만, 무려 53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 그것도 21세기 초엽인 제1차 세계대전부터 20세기 말엽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를 다루는 책에서 책 말미에 인명, 지명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과 편집자주, 옮긴이 주와 같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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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이 책은 내가 알라딘 서재에 올리는 200번째 리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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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수들은 침묵하고 있을까

고교등급제 파문에도 양심선언 하나 없어…소수 통제 가능한 교수들만 평가 참여

▣ 강성만 기자/ 한겨레 사회부 sungman@hani.co.kr

지난 3년여 동안 소문과 의혹으로만 떠돌던 고교등급제의 실체가 확인되자 서울 강북이나 지방의 학생·학부모·교사들은 경악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일부 사립대와 강남 그리고 특목고의 ‘검은 유착’이 한순간 그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교육부식 표현에 의하면 “고교등급제를 일부 적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고려대는 물론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출신 고교와 지역이 아니라 학생 개인의 학업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대학의 올 1학기 수시 합격생 수의 분포를 보면 항변은 설득력이 없다.


△ 전교조 등 교육단체와 학부모단체들은 이번 파문을 계기로 대학의 학생선발권에 대해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사진 / 김진수 기자)

학교별 가이드라인 마련해 활용했다

교육부는 서초와 강남, 그리고 송파 등 서울의 3개 구 출신 합격생 비율과 강북·지방과 함께 비교한 자료를 내놓았다. 부동산업계쪽에서는 강동까지를 이른바 강남권역으로 치지만 대학쪽에서는 강동 지역 학교를 강남에서 제외한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3개 구의 일반계 고교 학생 수는 전국 대비 5%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이에 따른 교육열을 감안할 때 합격생 비율이 전국 대비 2~3배 정도 높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최대로 늘려 잡아도 20%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실제 국감 자료를 보면 지난해 고려대의 수시 1학기 합격생의 9.5%가 서초와 강남 지역 학생이었다.

하지만 교육부 실태조사 결과 드러난 연세대와 이화여대의 올 수시 1학기 강남 학생 비율은 이런 상식을 여지없이 짓이겨버렸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입학생 가운데 36.1%와 35.3%가 전국 대비 5%에 불과한 강남 학생들이었다. 고교등급제를 하지 않았다는 이들 대학의 반박의 허구성은 실태조사 대상에 오른 서강대와 성균관대, 한양대 등 다른 대학의 강남 학생 비율을 살펴보면 확연해진다. 세 대학은 각각 11.4%, 8.3%, 12.6%의 비율을 보였다. 이대·연대의 강남 학생 비율과 3~4배의 차이를 보인다.

이들 대학의 부인에도 교육부는 왜 이대 등이 고교등급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평준화 체제에서 고교간 학력차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각 고교들은 2000년 이후 각 고교의 수능성적과 당해 대학 입학생 수 등 학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을 축적해놓고 있다. 실제 이번 조사로 등급제 적용 의혹을 털어버린 한양대의 최재훈 입학관리실장도 “고교별 특성을 분석해놓은 자료를 모으고 있으며 입학제도개선 연구팀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즉,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수시 전형의 서류평가 등에 참여하는 교수들에게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화여대와 연세대는 고교별 학력차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이런 자료들을 교수 평가위원들에게 직접 전달해 평가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는 게 교육부 설명이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에서 고교 유형과 지역별로 서류 평가 때 각각 어느 정도의 점수 차이를 둘 것인지 명시하는 구체적인 지침 등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들 대학이 학교별 점수 차이를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활용했으리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등급제 적용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것까지 까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화여대의 경우 자기소개서 평가에서 특목고와 강남, 강북 등 학교 유형과 지역별로 일정한 점수대가 형성되어 있고 같은 학교 출신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점수차가 나지 않았다. 자기소개서는 학생별로 천차만별일 텐데 특정 특목고의 경우 지원자 모두 80점 이상을, 특정 비강남고 지원자는 모두 70점 이하였다는 것이다. 학교를 차별하라는 문서상의 지침이나 구두 지시가 없었다고 부인하더라도 실제 드러난 결과가 확증이 되는 셈이다.

평가위원 교수의 수도 밝혀내지 못해


△ 고교등급제 파문은 교육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사진 / 김진수 기자)

지난 8월30일 <한겨레>의 ‘고려대 고교등급제 적용 시사 파문’ 기사가 나가면서 물 위에 드러난 ‘고교등급제’를 취재하면서 가장 큰 의문은 “왜 교수들은 침묵하고 있을까”였다. 대입 전문가들이나 교사들은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의 고교등급제 적용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분야에 오래 종사했고 전문가일수록 그 확신의 강도는 셌다. 그런데도 연세대 교수사회 안에서는 어떤 양심선언이나 제보도 없었다. 서류 평가 등에 상당수 교수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는 교수들이 몇명은 있지 않겠느냐는 상식적 판단이 배반당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교육부쪽은 나름의 판단을 제시했다. 학교별 차이를 일사분란하게 적용한 이화여대의 경우 자기소개서 평가에 전·현직 입학처장이나 대학의 통제가 가능한 교수 몇명 등 핵심 소수만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연세대의 경우도 이화여대에 비해 다소 많지만 다른 대학들에 비해서는 현저히 적은 교수만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교육부 판단이다. 이화여대에 비해 많을 것이라는 예측은, 같은 고교 지원자 가운데도 서류 평가 점수차가 나는 등 일부 평가위원들은 자료를 일률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재량을 발휘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쪽은 아울러 두 대학이 각기 축적해놓은 자료를 공유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에서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교수의 수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물론 구체적인 교수 명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대학쪽에서 대외비라는 이유로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실태조사 발표 뒤 뒷말이 가장 많이 나온 학교는 고려대다. 이 대학의 수시 1학기 강남 학생의 비율 18.2%가 말해주듯, 이화여대와 연세대에 비해 ‘학교 차별’의 정도는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연대·이대와 비슷한 수준의 제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대학은 서류와 내신 석차 백분위 평가 때 최대 2점까지 학교에 따라 다르게 가산점을 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산점의 규모가 크지 않아 실제 강남이나 특목고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학교에 따라 차등 배점한 증거는 세 대학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다. 이를 두고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고대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반면 자료를 주고 교수들 재량에 맡긴 연세대를 두고는 “지능적”, 빈틈없이 학교를 차별한 이화여대에 대해선 “단순하다”는 수식어를 달았다.

교육부는 애초 세 대학의 재정적 제재 수위를 거론하면서 ‘수도권 대학 특성화’ 지원금 20% 삭감안을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년 전 한양대가 본고사형 지필고사를 치른 사실이 적발됐을 때 지원금의 15%를 삭감했다. 20%면 올해 이화여대의 특성화지원금 36억원 가운데 7억2천만원이 삭감되는 것이다. 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중대 사안이었음을 감안하면 왠지 액수가 초라해 보인다. 교육부는 실태조사 발표 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뒤 추후 결정하며 전액 삭감도 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 이번 파문은 입시생과 학부모들의 줄소송으로 번질 전망이다. (사진 / 김진수 기자)

가장 큰 책임은 거짓말 방조한 교육부

이번에 적발된 세 대학은 교육부 발표 이후 “고교간 학력차가 엄존하는데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있겠느냐”는 판에 박은 항변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대학에선 본고사 불가피론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 주장의 정당성은 제쳐놓더라도 이번 조사 결과는 이른바 명문 사학이 수험생을 상대로 ‘앞과 뒤가 다른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탄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연세대는 수시 전형 요소로 내신(60%)과 서류(20%) 그리고 면접(20%) 등 세 가지를 내세웠다. 내신은 지역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외형적인 요강만으로는 강북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연세대는 은밀히 고교별 자료를 활용해 학생들의 서류 평가를 왜곡함으로서 강북이나 지방 학생들을 차별한 것이다. 구체적인 전형 기준 등을 비공개로 했기 때문에 대학쪽에선 “거짓말한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강북·지방 수험생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시간과 돈을 탕진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고려대는 명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한겨레>가 이 대학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고교간 학력차 자료를 수시 전형에 활용해왔다고 보도하자 며칠 뒤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자료만 축적했을 뿐이라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기여입학제를 금한다고 말만 했을 뿐 이를 강제하기 위한 어떤 실효적인 노력도 해오지 않았다. 언론과 전교조 등의 문제제기로 쟁점화하자 뒤늦게 칼을 빼든 교육부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대의 등급제 시행 의혹이 제기되자 교육부는 고려대쪽에 사실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함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부인하는 해명 자료를 내놓도록 재촉했다.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유도한 셈이다. 학수고대하던 해명 자료가 나오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던 교육부 당국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학의 사회적 신뢰를 땅으로 내팽개쳐버린 고교등급제 파문은 그동안 ‘사회적 합의’로 간주해온 대학의 학생선발권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교육계 안팎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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