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월요일(1. 20) 한겨레 신문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 연재에 실릴 막스 베버 편 글을 올립니다. 

 

본격적인 연재의 시작인데,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 신문에 수록될 때에는 다소간의 첨삭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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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막스 베버: 정치의 비극-근대성의 쇠우리에 갇힌 러시아혁명

 

 

 

막스 베버(1864~1920)는 생애의 말년에 ‘직업’과 ‘소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독일어 ‘베루프’(Beruf)를 제목으로 삼아 두 차례의 강연을 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충격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인 1917년 11월 7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을 했고, 약 1년 뒤 이번에는 독일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19년 1월 28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은 막스 베버의 이론적 유언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그의 사상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강연은 왜 베버가 마르크스주의의 영원한 이론적 적수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혁명 및 독일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베버는 도처에서 볼셰비키 혁명과 독일의 혁명 운동에 대한 비판과 불신을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강연, 특히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일종의 ‘반(反)사회주의 혁명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베버를 반동적인 사상가, 적어도 보수적인 이론가라고 규정해야 할까? 베버의 정치 사상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사상은 단순히 보수주의로 분류되기에는 너무 심원한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 두 개의 강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더 나아가 해방의 정치 일반)의 한계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실로 베버의 문제제기는 죄르지 루카치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를 넘어 한나 아렌트, 모리스 메를로퐁티, 위르겐 하버마스를 거쳐 오늘날의 에티엔 발리바르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비판적 정치 사상에 지속적인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사상적 반향의 첫 번째 장소를 베버의 두 강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보면 베버의 두 강연의 핵심 주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양의 근대성을 탈주술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탈주술화란 세계의 배후나 근저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무언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 대신 합리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이 세계와 사물들을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근대적 개인이 미개인들에 비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개인은, 인류학자들이 잘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가령 미개인은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고 각종 약초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반면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전철을 타고 다녀도, 정작 그것의 작동 원리나 설계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베버의 논점은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를 통해 근대인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이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을 포함한 세계는 더는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더는 내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베버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찾는다. 생명의 유기적 순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전통 사회의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무한한 진보와 끊임없는 변화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근대의 인간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진보 자체가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삶이란 그 진보의 선상에 놓인 작은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버의 탈주술화 테제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의 사회학적 변용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베버는 그렇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우리 시대의 운명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이제는 집단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과거에는 예언자의 성령 아래 대중의 격렬한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이제 그것은 광신적인 종파를 만들어낼 뿐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베버가 볼셰비키 혁명을 “‘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장식되고 있는 광란제”(‘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조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대인에게 남은 것은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는 정령(Daimon)을 찾아 그에게 복종하는 길이다.

 

탈주술화의 사회ㆍ정치적 표현은 관료제로 나타난다. 베버는 근대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을 관료제의 발달에서 찾는다. 베버는 국가를 일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관계로 규정한다. 과거에는 군주나 지배자 이외에도 자주적인 귀족들이 독립적인 폭력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근대 국가에서 이것은 주권자에게 모두 귀속된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이 독립 생산자들의 소유물을 몰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면, 근대 국가도 행정 관리 및 노동자로부터 정치적 경영 수단을 몰수하고 그들을 직업적인 관료 집단으로 만들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료제는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정치가 합리적인 경영의 문제가 되면서 잘 훈련받은 전문적인 관료 집단은 더욱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국가라는 지배관계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행정이 필요하며, 위계와 규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료제 아래에서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된”(곧 독자적인 지적 판단 및 생산 능력을 상실하고 “물건처럼 되어버린”) 대중적 개인들은 독자적인 가치관과 판단 능력에 따라 결정을 하기보다는 지도자의 명령을 추종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따라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정치적 경영 수단으로서 ‘장치’(machine)를 수반하는 지도자민주정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정치, 곧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정치가의 지배를 택할 것인가? 신념윤리에 따라 위대한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결과들에 대한 책임윤리를 지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만이 탈주술화되고 관료제의 쇠우리에 갇혀 가는 근대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러한 베버의 관점에서 보면 볼셰비키 혁명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라는 점에서는 신념윤리에 충실할지 모르지만, 근대 국가 및 정치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며, 순진한 낭만주의에 빠져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이율배반에 대해 맹목적이다. 감격적인 혁명이 지나가면 일상이 찾아온다.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합리적인 경영이 요구된다. 가령 국가와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맞서 싸운 부르주아 제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외국 자본을 이끌어 들여야 하며, 과거 러시아의 비밀경찰 요원들을 국가권력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폭력의 악마성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베버에게 정치 윤리의 근원은 정치가 폭력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폭력을 사용하여 지상(地上)에 절대적인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요구되며, 이것은 추종자들을 도구화하는 것, 곧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해 성립한 새로운 질서 내에 이미 타락과 부패의 씨앗을 심어놓는다. 그들 각자가 고귀한 윤리적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는 한, 그들은 쉽게 또 하나의 지배 계급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버에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집단의 지배 사이에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점과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제외하면”(‘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울한 베버의 진단은 냉철하지만 또한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 젊고 야심만만한 사상가들에게 그것은 여러 모로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베버가 죽은 뒤 곧바로 두 명의 이단적인 제자들이 베버를 넘어서는 것을 이론적 목표로 삼았다. 한편으로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출신의 보수적인 법학자 칼 슈미트는 가톨릭 신학에 기반을 둔 정치학으로 베버를 넘어서려고 했다. 극히 대조적인 이 두 가지 시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의 정치와 사상의 경로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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