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수컷을 매우 쳐라]-이정록

어물전이며 싸전, 골목골목 좌판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 십중팔구 여자다. 여자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여자다. 서로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심심찮게 이 여편네 저 여편네 악다구니를 끼얹는, 세 바퀴 반을 돌린 털목도리들이다. 생선 비늘 덕지덕지한 스폰지 파커들이다. 좌판이 키워왔는지 궁둥이를 중심으로 온몸이 뭉쳐져 있다

저 자리들을 모두 수컷들로 바꿔놓고 싶다. 마늘전 김봉길 씨와 옹기전 심정구 씨만 빼고, 썬그라스와 방수 시계를 파는 서부사나이만 놔두고, 종일 내기 윷 노는 담뱃진들과 주정이 천직인 저 가래덩이들을 검정 비닐봉지에 한 열흘 집어넣었다가 좌판에 꿇어 않히고 싶다. 나오자마자, 파주옥이나 당진집으로 달려갈 저 수컷들을 한 장 토막이라도 돼지쓸개처럼 묶어 말리고 싶다. 선거 철에만 막걸리 거품처럼 부풀어오르는 저 수컷도 아닌 수컷들을 외양간 천장이나 헛간 추녀에 매달아 놓고 싶다

궁둥이들의 가슴을 보아라. 밥이란 밥 다 퍼주고, 이제 구멍이 나서 불길까지 솟구치는 솥 단지가 있다. (이 땅의 여인들에게선 불내가 난다. 수컷들에게서도 설익은 불내가 나지만 , 그것은 너무 오래 쓰다듬어주기만 한 여인들에게서 옮겨 간 것이다.) 깔고 앉았던 박스를 접고 천 원짜리 몇을 다듬고 있는 갈퀴 손으로 저 잡것들의 버르장머리부터 쳐라. 그리하여 다리몽둥이 절룩거리는 파장이 되게 하라.돌아가 저녁상을 차리고, 밤새 또 술 주정을 받아내야 하는 솥단지들이여. 삼밭 장작불처럼, 이 수컷을 매우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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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도우려 화장품 장사에 발목 빠트린 아내는 나더러 '반풍수'라고 한다.
화장품 장사일을 전적으로 맡아 하는 것도 아니고, 책 한 권 쓴 것도 아니고,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사업을 하려면 세무 공부를 하거나 상공회의소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남들 어떻게 하는가 보고... 하다 뫃해 전국화장품전문점협의회에 나가 보고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성화이다.

한 때는 수석이나 난초, 분재를 좋아하다가 다시 옛 민속품 돌저울추를 거쳐 화장용구들을 모으다가 언제부턴가 고려시대 청동거울 문양에 집착하다가 남들 진작 강의하러 갈 나이에 전통목가구 강좌나 박물관대학 강의 들으러 갈 궁리를 하는 날 영 못 마땅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이젠 또 詩를 써볼까 잔뜩 시집을 주문해선 밤늦도록 깨어있는....

'朴박家가粉분' 대표 본분 직무유기하고 마냥 딴전만 피우며 살아온 날
누구 온전히 맨정신으로 외롭게 슬쓸히 숨가쁘게 살아온 사람 있으면
날 매우 쳐라. 수컷 같잖은 날 호되게 매우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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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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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가 밥이 되지는 않겠지만
영혼까지는 구하지 뫃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도
따뜻한 위안의 말씀, 아름다운 길동무는 되리
그 쓰잘 데 없는 믿음에 기대면서
오늘도 하릴없이 안부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詩를 올리네

왜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꽃피는 봄날 나 사랑을 하고 있네
나와 같은 덜떨어진 생각을 갖고
아름다운 詩를 품고갈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 어딘가엔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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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口/下口]-이중기

상구 수멍 죄 틀어막고 하구의 제 논에 물대다 틀킨
삼보에게 늙은 봇도감 이 사람아, 목구멍으로 넣고 똥구
녕으로 싸는 게 사람 염친데 자넨 어째 똥구녕으로
처먹고 아구창으로 싸는가, 대가리 털 나고 이런 경운
처음일세. 봇도감 꼬라보던 눈빛 풀며 삼보 대뜸 내뱉는
말본새

아 말이사 바른말이지
들어가는 거야 본디 꺼터머리부터 아잉기요?

뭐! 뭐?
꺼터머리, 꺼터머리.....되씹던 봇도감
파안대소!

예끼, 대가린 얻두고 꺼터머리야!

*
미루어 짐작컨데 그 피튀기는(?) 논물대기 싸움을 보는 시각이 건강하다.
성(性)이 성(聖)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슬픔과 분노로 점철된 '식민지농민'이나 '숨어서 피는 꽃'을 쓰던 시절을 지나고도 여전히 농부시인 이중기는 외로움의 변방에서 홀로 그윽히 깊어가고 있었구나.

창작과비평사의 시집 '밥상위의 안부'를 단숨에 읽으면서
거두절미하고 저 영천 말(馬) 거시기
복사꽃 환한 곳 녹전동
3월이 가기전 찾아 가서
내 부질없는 안타까움 실어
옛 친구의 등이라도 치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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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랑 은

............................. 현 종 헌


사랑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정오의 햇살

사랑은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는
아스라한 우주의 신비

사랑은
눈만 감고 있어도 멀리서 몸을 떠는
고감도의 교신

때때로 사랑은
먹구름을 몰고 오지만

나른한 육신을 가만히 누그러뜨리는
이른 봄날 한낮의 햇살처럼

사랑은
아무런 변명도 않는 것

사랑은
그래서 이 세상 끝이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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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2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아무런 변명도 않는 것, 이 세상 끝이라...
박가분 아저씨, 아침에 시 한 수 잘 보고 갑니다.
멋진 토요일 보내세요.
 

죽고 사는 것은 빈 사이다병에서 흘러 나오던 그윽한 휘파람 소리 같다?

무심코 화장터곁을 지나다, 폐교된 지 오래된 시골학교 좁은 운동장을 쳐다보다 때로 잔치날 같은 환호소리를 듣거나 어디서 숨죽인 울음소리 끊일듯 이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횡뎅그레하게 비어있는 골목길위로 휴지 섞인 바람만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아는 사람은 진작에 다 알고 있다.
살아가면서 길길이 퍼붓는 눈발같이 귀싸대기를 치며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그리움을. 차마 할 말이 진해 흉터처럼 쓰다듬지도 뫃하는 안타까움을. 뜨거운 그 한 마디 내뱉지 뫃하고 꾹꾹 눌러삼키며 먼 길 홀로 가야함을.

내게도 진작 하늘 길 열어 호올로 가신
여섯 살 터울, 꿈길에라도 친구 같던
목사 공부하던 고종형님이 계셨다.

[현종헌]님이 등록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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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살다 간 우리 외삼촌 이야기

........................... 빈 사 이 다 병
.............................................................................현 종 헌

부평 화장터에서 외삼촌은 병 하나 채울 만큼의 재가 되었다. 그야말로 하나 과장없이 빈 사이다병 하나만큼의 재가.......
메마른 바람만이 주위를 감돌 뿐 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구들은 25일 간의 피말리는 가해자와의 줄다리기에 지쳐 이젠 울 기력조차 없었다. 어머니만이 밑의 피붙이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몸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음까지 꺼내며 몸부림칠 따름이었다.
사라지는 외삼촌을 추모하는 식구래야 아버지, 어머니, 큰외삼촌, 그리고 나, 넷뿐이었다. 갓난애를 보내면서조차 많은 친지들이 모여 사방팔방 피눈물을 뿌려대는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를 떠올리기엔 너무나 썰렁한 분위기였다.
좀 전에 휴게실에서 보았던 중년의 외국인 남자를 생각했다. 이국땅에서 외동딸을 잃고 화장해서 보내는 슬픔을 맥주 한 잔으로 가누고 있었다. 혼자. 쓸쓸히.
외삼촌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 동서양의 문화 어느 한켠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사라져갔다. 한마디로 그는 떠돌이였고 주위에선 그림자조차 밟기 두려운 상대였다.
누군가 말했다. "거지가 달래 거지야, 가진 게 없으면 거지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를 떠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적(詩的)이다. 그가 가까이 오는 걸 주위 사람들은 꺼려 했기에 오히려 전자의 표현이 옳을 성 싶었다.
제주도에서 상경한 이래 20 수년 간,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는 늘 후미진 계곡에서 방랑하는 지친 모습뿐이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생존경쟁 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외계인의 모습이었다.
교통사고 중환자실에 누운 채 산소호흡기로 잔명(殘命)이 이울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이면 성에가 돋는 자연의 순리를 생각했다. 그래, 외삼촌은 죽어야 했다. 절대자가 내린 어쩔수 없는 숙명일 테지. 그때 앞을 가린 눈물 위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옛날의 추억을 자제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외삼촌은 나에게 푸근한 보금자리 같았다. 3살밖에 터울이 안지는 조카의 친구이자 앞뒷일 꼼꼼이 챙겨주는 자상한 후견인이었다. 부모님이 불화로 잠깐 떨어져 살던 시절 나는 늘 외톨이었다. 외삼촌은 그 심정을 알아 마을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알사탕을 책보 속에 넣어 주었고, 외가집 가면 낚시하러 바닷가로 데려가 뗏목을 태워주곤 했다.
외삼촌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씩씩했다. 마을 앞바다에서 동료들과 파도타기 곡예라든가 잠수하여 주낙배 아래로 통과하기 시합할 땐 꼭 앞장 서서 시범을 보였다.
사이나 넣은 콩을 적당한 곳에 뿌려 눈에 보이는 꿩은 모조리 잡아들였고, 꿩사냥 왔던 미군들 총포에서 나온 탄피를 수거해 벌이는 탄피따먹기 놀이에선 동네 아이들 것을 깡그리 쓸어모았다.
축구도 잘 하여 면 단위 체육대회할 땐 청소년부 우리마을 대표로 나갔다. 나는 갈색 츄리닝에 그려진 등번호 0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위기에 처하면 골키퍼로, 득점해야겠다 싶으면 전진공격수로 일정한 포지션이 없이, 말하자면 팀을 주도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체육대회 날, 나는 농약 잘못 먹은 조랑말처럼 날뛰는 외삼촌의 위용을 보기 위하여 혼자 할머니 몰래 성산면 사무소 옆에 있는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먼저 나를 알아본 그는 선수용 사이다 한 병을 선뜻 챙겨 주었다.
순간 나는 감격해버렸다. 육지 손님을 맞을 때나 구경할 수 있는 상류사회의 최고급 음료수였기 때문이다. 빈 병을 손에 들고 있어도 부잣집 아이처럼 보았던 까닭에 감히 맛을 볼 수는 없고, 비록 병마개를 땄다 해도 보배처럼 감싸 안고 다니다가 햇볕을 받아 맛이 다 간 후에도 한모금씩 입 안에 털어넣고 보글거리던 기억을 우리 시대 사람이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외삼촌 생각을 하면 먼저 한국경제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일곱 개 별이 그려진 사이다병이 그 위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곤 하는 환상을 본다.
그날, 외삼촌은 종횡무진 정말 용맹스러웠다. 양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듯 상대방 태클을 용케 피하며 날쌔게 적진을 파고들어가 골 세례를 퍼부었다. 시골 체육대회 특유의 종종 벌어지는 마을 자존심을 건 응원단 간의 싸움과 선수들 간의 잦은 시비를 그는 골 득점으로 해결해버렸다.
벗들 간에 잘 어울리고 용기가 넘친 그였지만, 집안에선 9남매의 막내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었던 처지여서 제주도에 눌러 앉아 빈둥거리기엔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방위를 제대하자마자 그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상경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서울 오류동 외곽지에서 고향사람이 경영하는 유리공장에 취직했다.
그길로 계속 초자(硝子) 계통의 회사에서 20여 년간을 떠돌아다녔다. 일가 친척이래야 생활형편 빠듯한 우리밖에 없었던 그에게 타향살이는 힘든 고행길이었으리라.
20대 후반에 잠깐 동거했던 여자 외엔 결혼도 못한 처지였다. 그 후 8년 여를 어디선가 숨어지내다가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최근엔 부천시의 어느 가내공업 공장에서 기계를 잘못 다루어 한 손 잘리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왔다.
서른 여덟 살, 갈 데까지 갔다. 보다못한 아버지가 막노동판의 경비로 취직시켜 주었다. 동네 여관의 구석방 하나를 월세로 얻어 겨우겨우 입에 풀칠해가던 터였다.
그가 죽고 난 다음 짐을 치우기 위해 그 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1920, 30년대 궁핍을 주제로 한 사회주의 소설 속의 배경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한켠에는 내게서 빌려간 일본 번역소설 "대망(大望)" 시리즈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일본 경제계를 주름잡기까지의 빈털털이 청년의 성공담을 담은 그 소설을 읽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하기도 했다.
중환자실에서 호흡이 가늘어지고 산소호흡기를 뗄 때까지 제주도에서 다녀간 일가친척 몇밖엔 내방객이라곤 없었다.
불꽃이 꺼져가는 시신을 붙들고 그들은 오열했다.
"이 병신같은 자식아, 제대로 장가 한번 못 가보고......"
"네 친구들은 집 한칸씩 장만하고 다들 잘 사는데......"
"너보다 못한 놈들도 살라고 용을 쓰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우월감은 대단했다. 거의 다 된 시신(腦死)을 증오하는 건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외삼촌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손놀림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빈 사이다병이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그의 시신은 자유롭지가 못했다. 가해자와 몸값 흥정하느라 8월 한여름인데도 병원 영안실의 냉동실에서 25일 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저쪽에선 떳떳하지 못하게 살다 간 서른 여덟 살 날품팔이 생애의 값을 깎아내리려 기썼고, 이쪽에선 시골출신답지 않게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호프만식 계산법을 근거로 보통사람들의 가격으로 맞섰다. 결국은 판매 유효기간이 지나 맛이 간 사이다처럼 헐값에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부평 화장터로 향하는 그의 시신은 사이다 병에 새겨진 일곱 개의 별보다 더 위품있어 보였다. 돈없으면 죽는 것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시신 치우는 일이나마 주위 형제들에게 빚지지 않았다는 당당함마저 엿보였다.
나는 웬만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강심장을 지녔지만 부평 화장터에서 재로 화한 외삼촌의 뼈를 빻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목줄기가 휘어지도록 울었다.
* * * *
뼛가루 담은 상자를 들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부평 화장터에서 그냥 뿌려버리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보수적인 그곳 어른들의 뜻에 따라 공동묘지 터에 상자를 묻고는 시멘트로 그 위를 씌웠다. 다른 처녀귀신과 짝을 이루어 사후(死後) 영혼결혼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잔디 깎아줄 이 없는 외로운 묘를 바라보며 괜히 슬퍼서 나는 또한번 울었다.
며칠 후, 옛날 외삼촌이 기세좋게 날뛰던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줄어드는 시골학급 탓인지 내가 어른이 되어서인지 교정은 매우 협소해 보였다. 문득 운동장 구석에 나뒹구는 사이다 병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 외삼촌이 준 걸 먹고 내버렸는데, 누군가가 깨뜨려 그게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나 보다며 잠시 착각했다.
나에게 아름다움과 가슴 미어지는 추억을 동시에 안겨다 준 외삼촌을 추모하고 있을 때 이따금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사이다를 다 먹고 난 후 병꼭대기에 입술을 포개 바람을 불면 귀신 홀리듯이 흘러나오던 휘파람 소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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