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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맷돌]
작정하고 나서지 않은 다음에야 쉬 짬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어쩌다 시골집 우물이나 뒷마당에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어수룩하고 무딘 손끝으로 돌을 쪼아 만든 그리운 마음들이 있음을.
오랜 세월 물이끼가 덧앉고,더러는 키 낮은 채송화,맨드라미,국화 따위 아무렇게나 피고 지듯 태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하지만 어줍잖은 꾸밈새나 모양새로도 끝내 정겨움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
'맷돌'은 흔히 물에 불린 곡식을 갈거나 가루로 만들어 쓰던 기구이다.아래 위 두 개의 돌을 겹쳐 아랫돌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춰 사용했다. 또한 윗돌에는 손잡이 나무를 박을 구멍이 있고 갈아야 할 곡식을 넣는 주구가 뚫려 있었다.

둘러주소 둘러주소
정둥 같은 팔다지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소라 같은 주먹으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홰홰칭칭 홰홰칭칭
둘러주소 둘러주소

외할머니는 대청에 초석을 깔고,그 위에 맷돌방석을 놓고,다시 맷돌을 앉힌 다음 맷돌노래와 함께 녹두나 밀을 갈아내시곤 했다.잘 갈아져 나온 녹두가루나 밀가루는 다시 녹두전이 되고 수제비가 되어 내 입맛을 당기게 하던 그런 기억의 앙금들은 이제와 어제 일처럼 마냥 그리웁기만 하다.
가루를 곱게 내기 위해 돌돌돌돌 곡식을 애벌로 갈아,몽근가루는 받아 내고 서너 번이나 들들들들 갈아낸 다음에는,마침내 몽그라진 가루가 쌓이던 정경이 눈에 선하기만 한데......
어쩌다 빈대떡을 만들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맷돌에 타개어 물에 불린 녹두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기고,거피한 녹두를 물을 조금 부어 맷돌에 넣고 되작하게 갈고,돼지고기는 훗추가루와 마늘 다진 것과 소금으로 양념하고,배추김치는 총총 채썰고,파는 어슷하게 썰고,고추는 동글동글 썰고,소금에 간한 녹두반죽은 갖은 양념한 돼지고기와 버무리고,뜨겁게 달구어진 조선 솥뚜껑에는 돼지기름이 둘러지고, 마침내 한 국자씩 떠낸 반죽은 파나 고추를 얹어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것이었다.
노릇해진 빈대떡을 뒤집어 천천히 익히기도 전에 내 마음은 지레 바빠져 외할머니 손길을 쫓기 바쁘고 진간장에 찍어먹던 그 맛이라니.....
"인석아,천천히 먹어라. 이 할미가 또 해주꾸마.목 맥히겄다.년석하고서는."
"어머니 애 버릇 나빠지겠어요. 상에 올린 뒤에 주시지요."
'괘안타.따로 챙기놓으먼 안되겄나."
"난 우리 외할매가 제일 좋더라 뭐."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 이 할미가 자꾸 만들어 주꾸마."
더러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팥이나 콩,메밀,녹두를 갈아 콩국수나,메밀묵,빈대떡 같은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만드는 정성 하나만으로도 외려 더욱 풍성했던 지나간 시간의 그 성찬(盛饌)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외할머니는 하늘 길 열어 먼 길 가시고,그리운 당신의 이름도 산에 묻고, 더러 기다려주는 이 있는 시골집도 없는, 산다는 건 때로 가열한 다스림으로 홀로 겪어 나가야 하는 목숨 같은 것이나 아닌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던가.
굽이굽이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인간사 그 잡다한 일상에 발목 빠뜨리고 살다가도 불현 듯 치달려간 시골집 들에는 오래 잊고 살아왔던 정겨움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재래 농기구나 가재도구들이 사라져 갔지만 아직도 찾고자한다면 더러 남아있던 맷돌들....
윗짝이 달아나거나 깨어지고 아무렇게나 땅에 처박혀 본래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런대로 그것들과 맞딱뜨리는 순간은 쏠쏠한 재미를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맷돌은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색을 갖고 있어서 가령 중부의 것은 위 아래쪽 크기가 같고, 남부의 것은 밑짝이 윗짝보다 넓고 크며 곡식가루를 흘러내리게 하는 주둥이 모양의 귀때가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과 구실에 따라 홈만 있는 것,홈을 둘리지 않은 것,굽이 붙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굽이 없는 것,귀때가 있는 것,손잡이가 옆구리에 있거나 머리쪽에 있는 것 등 저마다 화강석이나 청석,화산석 같은 돌의 질감에 따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각종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해놓아 단순히 낟곡식을 가는 도구 이상의 장치미와 세련미가 뛰어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온몸을 가려두르던 그 기쁜 먹거리를 장만했던 외할머니의 맷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더러 맷돌이 남아 있다손 그것들은 이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풍요롭던 시간의 추억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었다.
단순하고 우직하게만 보이는 맷돌.그런 것들에 눈 주어 즐겨 생활에 쓰고자 하기에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너무 팍팍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뜩찮은, 그 무엇이 이토록 나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 것이랴!
따지고 보면 각종 믹서기나 카트기와 녹즙기를 통해 5분만 하면 원하는 것을 구하는 이 좋은(?) 세월에 무어 그리 애닯아 자꾸 구태의연해지는가. 하지만 끝내 기억하고 싶다. 이제 뉘 있어 아쉽고 그리운 날의 정성과 입맛을 되돌릴 것인가?
예전,그리도 멀지 않은 예전에 어느 이름 모를 석공 있어 지극히 단순한 구실과 쓰임을 위해 무모하게 돌을 쪼아 맷돌을 만들었듯, 만드는 기쁨 하나로 왼종일 즐거운, 노동의 맛깔스럽고 정성 밴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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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추를 닦으며

밤늦어 매장 문을 닫고 돌아서는 길, 잔뜩 노곤하여 킬킬거리는 경유차가 마냥 미더운 건 그동안 적당히 길이 들고 차체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하긴 새로 뽑아 이 년 남짓만에 구만 킬로 탔다면 어지간히는 돌아다닌 셈이었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 몰두해온 하많은 시간동안 혹 나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집에 들어 판매전표를 확인하고, 새로운 고객카드를 훑어보고, 현금과 카드를 분리해내곤 하는 반복된 일상이 오늘따라 영 마뜩찮다.

사실 박가분이란 상호를 내걸고 화장품판매업을 한 지도 어느덧 반 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6년 전 시지동에 첫 매장을 낸 이래 하루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달려온 것은 나름대로 잘해보고자 하는 조그만 욕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화장품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십 년 넘게 화장품 관계 일에 매달리다 개인 장사를 한 터라, 내 뒤에는 메이커 직원 출신이라는 그 쓰잘데 없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녔었다.

어디 없이 그러하겠지만 장업계라고 별다르랴?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라거나 오 전을 보고 십리를 간다는 말의 깊은 뜻을 되새겨야 했고, 적당히 닳고닳아야 하건만 그러지 못해 머쓱했고, 그 바닥에 내쳐지지 않고, 온전히 바로 서기 위해 늘 허위허위 안간힘 해야 했다.

그런 날. 어쩌다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고 몹시 상심하고 삽삽한 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태무심하고 버려둔 저울추를 꺼내들곤 했다.

그게 언제던가? 벌써 십수년도 전에 내가 한 일은 대리점에 화장품을 쥐어 앵기는 일이었다. 적정물량이 요구되는데도 때론 과도한 물량을 쏟아 붓고, 시장 점유율 경쟁을 위해 리베이트를 미끼로 덤핑을 치고, 대리점 손실보전을 위해 빤한 지원을 내걸고....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면서 대리점은 조금씩 거덜나고 나는 조금씩 능력(?)있는 영업사원이 되어가고....어쩌면 그런 세월이 풍문처럼 지나가고....

아마 예천이었을 것이다.

예전 떡을 눌러 갖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곤 하던 ,박달나무나 발간 대추나무로 만든 판인 김한량(?)이 떡살을 처음 본 것이. 적당히 손때묻고 녹녹치 않은 관록이 느껴지던 그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고기가 있고 국화나 갖가지 꽃 모양을 이중 삼중으로 속 깊이 파들어 가며 왼갖 문양을 조각한, 그 빼어난 솜씨를 우리 시대 어느 장인 있어 감당하고 견주랴 싶었다. 왜 김한량이 떡살로 부르는 지 아무도 몰랐건만, 내 즐거운 상상은 저 봉화나 법전,영주,감천,예천을 들고났던 동가식 서가숙의 김씨 성가진 한량 같은 장인 있어 내 온 가슴 지지 눌러 전율 같은 그리움조차 심어주던 것이었다.

떡살에 눈이 가자 이번에는 무쇠를 두드리거나 놋쇠로 만든 옛 자물통이 들어오고 다시 장석좋은 반닫이나 맷돌이 다가서고 먹통이 안겨오고 마침내 저울추였다.

재미있었다.
요모조모 귀때기 반질반질 윤이 나 한 세기는 족히 넘겼을 돌 저울추 우연히 하나 얻어 걸러서는, 세상살이가 아무 인연 없이 무심하게 맺어지고 이름지어지는 게 아니다 싶었다. 조선시대 이름 없는 어느 보부상 발품 팔아 오백리, 천리를 오가며 그가 등짐져 나른 삶의 무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이 미치자 크고 작은 갖가지 저울추가 그렇게 귀하고 정겨울 수가 없었다. 우리네 삶의 이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달기 위한 수고로운 직분은 차치하고, 모든 저울추들은 그 각양각색 제가끔의 모양과 용도나 구실이 흥미를 주기에 족했다.

생각건대 저울추에 혹했던 시간들은 참 좋았다.상주,점촌,영주,안동,예천,의성을 오명가명 돌아서면 월말이던, 내 할당량의 판매목표와 발 밑에 차오르던 월말수금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한 흥미와 심심풀이 파적같은 시작이었지만, 그 시절 눈꼽 비비듯한 단조로움과 화장품영업이라는 엉뚱한 길을 가고있는 뜻한 외로움은 이제 은밀하게 키워나가는 병 같은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마다 행해지던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막돌을 무명천으로 싸매거나, 종이로 꼰 노끈으로 돌을 감싸거나, 구멍 뚫린 돌을 이용하거나, 지극정성으로 돌 꼭지를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도자기나 사기나 무쇠로 만든 저울추들 앞에서 난 어떠했던가? 늘 짧은 출장비에서 여투어내는....구멍 뚫린 주머니, 허름한 여인숙에서의 잠자리나, 한 두끼로 달래곤 하던 시장끼도 간단없이 잊혀지곤 하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 욕심이 생기기도 했는데 경주 옛 절터에서 나온 ,언감생심 표면에 12지상을 새긴 신라시대 청동 저울추거나 황동 또는 놋쇠로 만든 ○량 ○근이라고 무게의 수치가 새겨진 고려 저울추 하나쯤 구색으로 갖고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했었다.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십수년 전. 장안평 이름 모를 가게에서 만났던 이조 분원 가마에서 구웠음직한 백자 저울추 크고 작은 두 점, 못내 돌아서며 내 주머니 속으로 선선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던 그때가 가을이던가 겨울 초입이었던가? 눈에 밟히는 아쉬움을 애써 지우면서 순무식하게 생긴 대로 깍은듯한 먹통 하나 사들고 돌아서던, 때로 산다는 건 저울추를 사 모으듯 추억을 하나씩 가슴에 새기는 일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박가분 매장문을 연 지 오늘로서 딱 6년.

일찍이 성경 말씀에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했건만 나는 얼마나 장사꾼의 도리에 충실하며 마음의 부자로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록 분원가마나 신라시대 조각이 새겨진 저울추는 못 가졌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조잡한 대로 목화솜이나 머리카락이나 약재를 달던 우리나라 서민들이 쓰던 대저울 같은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대나무에 눈금이 새겨진 지렛대 위에 추를 평형이 되게 움직여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 수 있었던 대저울의 구멍 뚫린 돌이나 실로 짠 주머니의 돌 같은, 하찮아 보이지만 공평한 돌 곧 공평한 추 같은 삶이었다면 참 좋겠다.

하루일 을 마감하고 자정 넘어 조심조심 저울추를 닦으며 나는 아무래도 저울로 물건을 다는 장사꾼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혹 눈금반(盤)이나 저울대에 새긴 점 또는 금을 잘못 읽은 적은 없었던가. 눈금숫자를 잘못 새기거나 표준 추가 아닌 사제 추를 쓴 것은 아닌가. 내용물을 바꾸거나 무거운 것 대신 가벼운 것 주거나 정말 실수로라도 저울눈의 위치와 간격을 틀리게 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메이커 측과 적당히 짜고 협잡하거나 소비자를 속인 것은 아닌가.

알고 보면 개화기 이후 저울을 보급하고 취급하는 일은 정직하고 신용 있는 상인의 명예로 여겨졌다는데.....저울추를 닦으며 아무래도 난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재물이라는 게 평등하기가 물과도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하거늘 아무래도 내 지난 6 년 간 목숨의 풀무질, 화장품장사는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어야 할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어느덧 수십 개나 모인 저울추를 닦다보면 장사꾼으로서 거듭나 내가 가야할 먼 길이,저울추만큼이나 무겁고 소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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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것은 빈 사이다병에서 흘러 나오던 그윽한 휘파람 소리 같다?

무심코 화장터곁을 지나다, 폐교된 지 오래된 시골학교 좁은 운동장을 쳐다보다 때로 잔치날 같은 환호소리를 듣거나 어디서 숨죽인 울음소리 끊일듯 이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횡뎅그레하게 비어있는 골목길위로 휴지 섞인 바람만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아는 사람은 진작에 다 알고 있다.
살아가면서 길길이 퍼붓는 눈발같이 귀싸대기를 치며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그리움을. 차마 할 말이 진해 흉터처럼 쓰다듬지도 뫃하는 안타까움을. 뜨거운 그 한 마디 내뱉지 뫃하고 꾹꾹 눌러삼키며 먼 길 홀로 가야함을.

내게도 진작 하늘 길 열어 호올로 가신
여섯 살 터울, 꿈길에라도 친구 같던
목사 공부하던 고종형님이 계셨다.

[현종헌]님이 등록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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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살다 간 우리 외삼촌 이야기

........................... 빈 사 이 다 병
.............................................................................현 종 헌

부평 화장터에서 외삼촌은 병 하나 채울 만큼의 재가 되었다. 그야말로 하나 과장없이 빈 사이다병 하나만큼의 재가.......
메마른 바람만이 주위를 감돌 뿐 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구들은 25일 간의 피말리는 가해자와의 줄다리기에 지쳐 이젠 울 기력조차 없었다. 어머니만이 밑의 피붙이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몸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음까지 꺼내며 몸부림칠 따름이었다.
사라지는 외삼촌을 추모하는 식구래야 아버지, 어머니, 큰외삼촌, 그리고 나, 넷뿐이었다. 갓난애를 보내면서조차 많은 친지들이 모여 사방팔방 피눈물을 뿌려대는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를 떠올리기엔 너무나 썰렁한 분위기였다.
좀 전에 휴게실에서 보았던 중년의 외국인 남자를 생각했다. 이국땅에서 외동딸을 잃고 화장해서 보내는 슬픔을 맥주 한 잔으로 가누고 있었다. 혼자. 쓸쓸히.
외삼촌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 동서양의 문화 어느 한켠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사라져갔다. 한마디로 그는 떠돌이였고 주위에선 그림자조차 밟기 두려운 상대였다.
누군가 말했다. "거지가 달래 거지야, 가진 게 없으면 거지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를 떠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적(詩的)이다. 그가 가까이 오는 걸 주위 사람들은 꺼려 했기에 오히려 전자의 표현이 옳을 성 싶었다.
제주도에서 상경한 이래 20 수년 간,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는 늘 후미진 계곡에서 방랑하는 지친 모습뿐이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생존경쟁 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외계인의 모습이었다.
교통사고 중환자실에 누운 채 산소호흡기로 잔명(殘命)이 이울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이면 성에가 돋는 자연의 순리를 생각했다. 그래, 외삼촌은 죽어야 했다. 절대자가 내린 어쩔수 없는 숙명일 테지. 그때 앞을 가린 눈물 위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옛날의 추억을 자제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외삼촌은 나에게 푸근한 보금자리 같았다. 3살밖에 터울이 안지는 조카의 친구이자 앞뒷일 꼼꼼이 챙겨주는 자상한 후견인이었다. 부모님이 불화로 잠깐 떨어져 살던 시절 나는 늘 외톨이었다. 외삼촌은 그 심정을 알아 마을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알사탕을 책보 속에 넣어 주었고, 외가집 가면 낚시하러 바닷가로 데려가 뗏목을 태워주곤 했다.
외삼촌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씩씩했다. 마을 앞바다에서 동료들과 파도타기 곡예라든가 잠수하여 주낙배 아래로 통과하기 시합할 땐 꼭 앞장 서서 시범을 보였다.
사이나 넣은 콩을 적당한 곳에 뿌려 눈에 보이는 꿩은 모조리 잡아들였고, 꿩사냥 왔던 미군들 총포에서 나온 탄피를 수거해 벌이는 탄피따먹기 놀이에선 동네 아이들 것을 깡그리 쓸어모았다.
축구도 잘 하여 면 단위 체육대회할 땐 청소년부 우리마을 대표로 나갔다. 나는 갈색 츄리닝에 그려진 등번호 0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위기에 처하면 골키퍼로, 득점해야겠다 싶으면 전진공격수로 일정한 포지션이 없이, 말하자면 팀을 주도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체육대회 날, 나는 농약 잘못 먹은 조랑말처럼 날뛰는 외삼촌의 위용을 보기 위하여 혼자 할머니 몰래 성산면 사무소 옆에 있는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먼저 나를 알아본 그는 선수용 사이다 한 병을 선뜻 챙겨 주었다.
순간 나는 감격해버렸다. 육지 손님을 맞을 때나 구경할 수 있는 상류사회의 최고급 음료수였기 때문이다. 빈 병을 손에 들고 있어도 부잣집 아이처럼 보았던 까닭에 감히 맛을 볼 수는 없고, 비록 병마개를 땄다 해도 보배처럼 감싸 안고 다니다가 햇볕을 받아 맛이 다 간 후에도 한모금씩 입 안에 털어넣고 보글거리던 기억을 우리 시대 사람이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외삼촌 생각을 하면 먼저 한국경제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일곱 개 별이 그려진 사이다병이 그 위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곤 하는 환상을 본다.
그날, 외삼촌은 종횡무진 정말 용맹스러웠다. 양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듯 상대방 태클을 용케 피하며 날쌔게 적진을 파고들어가 골 세례를 퍼부었다. 시골 체육대회 특유의 종종 벌어지는 마을 자존심을 건 응원단 간의 싸움과 선수들 간의 잦은 시비를 그는 골 득점으로 해결해버렸다.
벗들 간에 잘 어울리고 용기가 넘친 그였지만, 집안에선 9남매의 막내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었던 처지여서 제주도에 눌러 앉아 빈둥거리기엔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방위를 제대하자마자 그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상경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서울 오류동 외곽지에서 고향사람이 경영하는 유리공장에 취직했다.
그길로 계속 초자(硝子) 계통의 회사에서 20여 년간을 떠돌아다녔다. 일가 친척이래야 생활형편 빠듯한 우리밖에 없었던 그에게 타향살이는 힘든 고행길이었으리라.
20대 후반에 잠깐 동거했던 여자 외엔 결혼도 못한 처지였다. 그 후 8년 여를 어디선가 숨어지내다가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최근엔 부천시의 어느 가내공업 공장에서 기계를 잘못 다루어 한 손 잘리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왔다.
서른 여덟 살, 갈 데까지 갔다. 보다못한 아버지가 막노동판의 경비로 취직시켜 주었다. 동네 여관의 구석방 하나를 월세로 얻어 겨우겨우 입에 풀칠해가던 터였다.
그가 죽고 난 다음 짐을 치우기 위해 그 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1920, 30년대 궁핍을 주제로 한 사회주의 소설 속의 배경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한켠에는 내게서 빌려간 일본 번역소설 "대망(大望)" 시리즈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일본 경제계를 주름잡기까지의 빈털털이 청년의 성공담을 담은 그 소설을 읽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하기도 했다.
중환자실에서 호흡이 가늘어지고 산소호흡기를 뗄 때까지 제주도에서 다녀간 일가친척 몇밖엔 내방객이라곤 없었다.
불꽃이 꺼져가는 시신을 붙들고 그들은 오열했다.
"이 병신같은 자식아, 제대로 장가 한번 못 가보고......"
"네 친구들은 집 한칸씩 장만하고 다들 잘 사는데......"
"너보다 못한 놈들도 살라고 용을 쓰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우월감은 대단했다. 거의 다 된 시신(腦死)을 증오하는 건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외삼촌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손놀림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빈 사이다병이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그의 시신은 자유롭지가 못했다. 가해자와 몸값 흥정하느라 8월 한여름인데도 병원 영안실의 냉동실에서 25일 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저쪽에선 떳떳하지 못하게 살다 간 서른 여덟 살 날품팔이 생애의 값을 깎아내리려 기썼고, 이쪽에선 시골출신답지 않게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호프만식 계산법을 근거로 보통사람들의 가격으로 맞섰다. 결국은 판매 유효기간이 지나 맛이 간 사이다처럼 헐값에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부평 화장터로 향하는 그의 시신은 사이다 병에 새겨진 일곱 개의 별보다 더 위품있어 보였다. 돈없으면 죽는 것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시신 치우는 일이나마 주위 형제들에게 빚지지 않았다는 당당함마저 엿보였다.
나는 웬만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강심장을 지녔지만 부평 화장터에서 재로 화한 외삼촌의 뼈를 빻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목줄기가 휘어지도록 울었다.
* * * *
뼛가루 담은 상자를 들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부평 화장터에서 그냥 뿌려버리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보수적인 그곳 어른들의 뜻에 따라 공동묘지 터에 상자를 묻고는 시멘트로 그 위를 씌웠다. 다른 처녀귀신과 짝을 이루어 사후(死後) 영혼결혼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잔디 깎아줄 이 없는 외로운 묘를 바라보며 괜히 슬퍼서 나는 또한번 울었다.
며칠 후, 옛날 외삼촌이 기세좋게 날뛰던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줄어드는 시골학급 탓인지 내가 어른이 되어서인지 교정은 매우 협소해 보였다. 문득 운동장 구석에 나뒹구는 사이다 병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 외삼촌이 준 걸 먹고 내버렸는데, 누군가가 깨뜨려 그게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나 보다며 잠시 착각했다.
나에게 아름다움과 가슴 미어지는 추억을 동시에 안겨다 준 외삼촌을 추모하고 있을 때 이따금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사이다를 다 먹고 난 후 병꼭대기에 입술을 포개 바람을 불면 귀신 홀리듯이 흘러나오던 휘파람 소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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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살다 간 우리 외삼촌 이야기

........................... 빈 사 이 다 병
.............................................................................현 종 헌

부평 화장터에서 외삼촌은 병 하나 채울 만큼의 재가 되었다. 그야말로 하나 과장없이 빈 사이다병 하나만큼의 재가.......
메마른 바람만이 주위를 감돌 뿐 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구들은 25일 간의 피말리는 가해자와의 줄다리기에 지쳐 이젠 울 기력조차 없었다. 어머니만이 밑의 피붙이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몸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음까지 꺼내며 몸부림칠 따름이었다.
사라지는 외삼촌을 추모하는 식구래야 아버지, 어머니, 큰외삼촌, 그리고 나, 넷뿐이었다. 갓난애를 보내면서조차 많은 친지들이 모여 사방팔방 피눈물을 뿌려대는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를 떠올리기엔 너무나 썰렁한 분위기였다.
좀 전에 휴게실에서 보았던 중년의 외국인 남자를 생각했다. 이국땅에서 외동딸을 잃고 화장해서 보내는 슬픔을 맥주 한 잔으로 가누고 있었다. 혼자. 쓸쓸히.
외삼촌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 동서양의 문화 어느 한켠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사라져갔다. 한마디로 그는 떠돌이였고 주위에선 그림자조차 밟기 두려운 상대였다.
누군가 말했다. "거지가 달래 거지야, 가진 게 없으면 거지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를 떠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적(詩的)이다. 그가 가까이 오는 걸 주위 사람들은 꺼려 했기에 오히려 전자의 표현이 옳을 성 싶었다.
제주도에서 상경한 이래 20 수년 간,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는 늘 후미진 계곡에서 방랑하는 지친 모습뿐이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생존경쟁 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외계인의 모습이었다.
교통사고 중환자실에 누운 채 산소호흡기로 잔명(殘命)이 이울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이면 성에가 돋는 자연의 순리를 생각했다. 그래, 외삼촌은 죽어야 했다. 절대자가 내린 어쩔수 없는 숙명일 테지. 그때 앞을 가린 눈물 위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옛날의 추억을 자제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의 외삼촌은 나에게 푸근한 보금자리 같았다. 3살밖에 터울이 안지는 조카의 친구이자 앞뒷일 꼼꼼이 챙겨주는 자상한 후견인이었다. 부모님이 불화로 잠깐 떨어져 살던 시절 나는 늘 외톨이었다. 외삼촌은 그 심정을 알아 마을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알사탕을 책보 속에 넣어 주었고, 외가집 가면 낚시하러 바닷가로 데려가 뗏목을 태워주곤 했다.
외삼촌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씩씩했다. 마을 앞바다에서 동료들과 파도타기 곡예라든가 잠수하여 주낙배 아래로 통과하기 시합할 땐 꼭 앞장 서서 시범을 보였다.
사이나 넣은 콩을 적당한 곳에 뿌려 눈에 보이는 꿩은 모조리 잡아들였고, 꿩사냥 왔던 미군들 총포에서 나온 탄피를 수거해 벌이는 탄피따먹기 놀이에선 동네 아이들 것을 깡그리 쓸어모았다.
축구도 잘 하여 면 단위 체육대회할 땐 청소년부 우리마을 대표로 나갔다. 나는 갈색 츄리닝에 그려진 등번호 0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위기에 처하면 골키퍼로, 득점해야겠다 싶으면 전진공격수로 일정한 포지션이 없이, 말하자면 팀을 주도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체육대회 날, 나는 농약 잘못 먹은 조랑말처럼 날뛰는 외삼촌의 위용을 보기 위하여 혼자 할머니 몰래 성산면 사무소 옆에 있는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먼저 나를 알아본 그는 선수용 사이다 한 병을 선뜻 챙겨 주었다.
순간 나는 감격해버렸다. 육지 손님을 맞을 때나 구경할 수 있는 상류사회의 최고급 음료수였기 때문이다. 빈 병을 손에 들고 있어도 부잣집 아이처럼 보았던 까닭에 감히 맛을 볼 수는 없고, 비록 병마개를 땄다 해도 보배처럼 감싸 안고 다니다가 햇볕을 받아 맛이 다 간 후에도 한모금씩 입 안에 털어넣고 보글거리던 기억을 우리 시대 사람이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외삼촌 생각을 하면 먼저 한국경제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일곱 개 별이 그려진 사이다병이 그 위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곤 하는 환상을 본다.
그날, 외삼촌은 종횡무진 정말 용맹스러웠다. 양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듯 상대방 태클을 용케 피하며 날쌔게 적진을 파고들어가 골 세례를 퍼부었다. 시골 체육대회 특유의 종종 벌어지는 마을 자존심을 건 응원단 간의 싸움과 선수들 간의 잦은 시비를 그는 골 득점으로 해결해버렸다.
벗들 간에 잘 어울리고 용기가 넘친 그였지만, 집안에선 9남매의 막내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었던 처지여서 제주도에 눌러 앉아 빈둥거리기엔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방위를 제대하자마자 그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상경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서울 오류동 외곽지에서 고향사람이 경영하는 유리공장에 취직했다.
그길로 계속 초자(硝子) 계통의 회사에서 20여 년간을 떠돌아다녔다. 일가 친척이래야 생활형편 빠듯한 우리밖에 없었던 그에게 타향살이는 힘든 고행길이었으리라.
20대 후반에 잠깐 동거했던 여자 외엔 결혼도 못한 처지였다. 그 후 8년 여를 어디선가 숨어지내다가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최근엔 부천시의 어느 가내공업 공장에서 기계를 잘못 다루어 한 손 잘리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왔다.
서른 여덟 살, 갈 데까지 갔다. 보다못한 아버지가 막노동판의 경비로 취직시켜 주었다. 동네 여관의 구석방 하나를 월세로 얻어 겨우겨우 입에 풀칠해가던 터였다.
그가 죽고 난 다음 짐을 치우기 위해 그 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1920, 30년대 궁핍을 주제로 한 사회주의 소설 속의 배경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한켠에는 내게서 빌려간 일본 번역소설 "대망(大望)" 시리즈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일본 경제계를 주름잡기까지의 빈털털이 청년의 성공담을 담은 그 소설을 읽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하기도 했다.
중환자실에서 호흡이 가늘어지고 산소호흡기를 뗄 때까지 제주도에서 다녀간 일가친척 몇밖엔 내방객이라곤 없었다.
불꽃이 꺼져가는 시신을 붙들고 그들은 오열했다.
"이 병신같은 자식아, 제대로 장가 한번 못 가보고......"
"네 친구들은 집 한칸씩 장만하고 다들 잘 사는데......"
"너보다 못한 놈들도 살라고 용을 쓰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우월감은 대단했다. 거의 다 된 시신(腦死)을 증오하는 건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외삼촌은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손놀림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빈 사이다병이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그의 시신은 자유롭지가 못했다. 가해자와 몸값 흥정하느라 8월 한여름인데도 병원 영안실의 냉동실에서 25일 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저쪽에선 떳떳하지 못하게 살다 간 서른 여덟 살 날품팔이 생애의 값을 깎아내리려 기썼고, 이쪽에선 시골출신답지 않게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호프만식 계산법을 근거로 보통사람들의 가격으로 맞섰다. 결국은 판매 유효기간이 지나 맛이 간 사이다처럼 헐값에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부평 화장터로 향하는 그의 시신은 사이다 병에 새겨진 일곱 개의 별보다 더 위품있어 보였다. 돈없으면 죽는 것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시신 치우는 일이나마 주위 형제들에게 빚지지 않았다는 당당함마저 엿보였다.
나는 웬만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강심장을 지녔지만 부평 화장터에서 재로 화한 외삼촌의 뼈를 빻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목줄기가 휘어지도록 울었다.
* * * *
뼛가루 담은 상자를 들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부평 화장터에서 그냥 뿌려버리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보수적인 그곳 어른들의 뜻에 따라 공동묘지 터에 상자를 묻고는 시멘트로 그 위를 씌웠다. 다른 처녀귀신과 짝을 이루어 사후(死後) 영혼결혼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잔디 깎아줄 이 없는 외로운 묘를 바라보며 괜히 슬퍼서 나는 또한번 울었다.
며칠 후, 옛날 외삼촌이 기세좋게 날뛰던 동남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줄어드는 시골학급 탓인지 내가 어른이 되어서인지 교정은 매우 협소해 보였다. 문득 운동장 구석에 나뒹구는 사이다 병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 외삼촌이 준 걸 먹고 내버렸는데, 누군가가 깨뜨려 그게 아직도 치워지지 않았나 보다며 잠시 착각했다.
나에게 아름다움과 가슴 미어지는 추억을 동시에 안겨다 준 외삼촌을 추모하고 있을 때 이따금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사이다를 다 먹고 난 후 병꼭대기에 입술을 포개 바람을 불면 귀신 홀리듯이 흘러나오던 휘파람 소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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