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어떤 기술에 관한 내용을 글로 남기는 사람이나 글을 통해 좀 더 정확하고 확실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글을 습득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단순한 사람이라네...... 그런 사람은 씌어진 말, 즉 글이라는 것이 꽤나 대단한 것이라고 믿고 있거든. 사실 글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문제에 관해 애당초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회상의 보조수단에 불과한 건데 말야. (p.33, 첫번째 양탄자: 글은 고아소년과 같다)

이 책은 망각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한갓 모사물에 불과하며, 생생하고 구체적인 말들의 실루엣이다. (p.35, 첫번째 양탄자: 글은 고아소년과 같다)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만한 다른 원천들이 막혀 있지만 않다면 고독 자체가 멸시의 원천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p.102, 빈곤의 수사학)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작가들에게 어떤 특정한 과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그러한 원형적 드라마를 그때그때의 현재로 매번 새롭게 번역하고, 또 새로운 형식으로 선보여야 하는 과제 말이다. 작가란, 자신의 독서 기술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독자이다ㅡ내 말이 틀린가? (p.160, 일곱번째 양탄자: 이야기 속의 연극론)

그녀는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지적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유의 지성이었다. 그녀에게는 성적 매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유의 성적 매력이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온몸을 휘감고 다녔따. 그녀의 몸은 도처에서 찾아내어 게걸스레 집어삼킨 최신 텍스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이나 잡지를 덮고 나면, 그녀는 갑자기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인물처럼 보이거나 엘프리데 옐리네크처럼 음험하게 행동했다. 그녀가 새로운 텍스트를 입는 순간, 그전의 텍스트는 옛것이 되어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게다가 그녀는 요란스런 모방을 좋아했다. 자작나무 지팡이에서 펌프스 구두까지, 연보라색 멜빵바지에서 섬세한 나일론 스타킹까지, 작게 조여 감춘 가슴에서 풍만하게 드러낸 가슴까지, 그녀가 흉내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였을 뿐이다. (이런 것들이 어떤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 바란다.) 꿀색깔의 염색, 짧게 자른 단발머리, 곱슬거리는 파마…… 언제나 최신 유행에 따른 스타일, 늘 『브리기테』 『프로인딘』 『퓌어 지』에서 금방 튀어나올 듯한 모습. 언제나 『코스모폴리탄』에서 막 오려낸 듯한 모습. 팔크 라인홀트는 문화의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는 기분으로 그녀를 읽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흥미를 잃어갔다.
고향에 있었을 때 그는 아침에 본 그녀가 저녁때도 같은 글자를 입고 있을지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 집의 문을 따고 들어가면서 그는 종종 묘한 불안감마저 느끼곤 했다. 과산화수소로 탈색한 금발머리에 번쩍이는 검은색 에나멜 원피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면서─도대체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한 거지?─캄파리 광고에 나오는 포즈로 창 밖을 내다보는 저 여자가 정말 내 여자친구 맞나? 빨간 펌프스의 또각거리는 신호를 듣고서야 그는 여자의 입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구두는 얼마 전에 그녀와 함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처럼 오랜 시간 제화점 열도들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고른 것이었다. 로테. 아이 참, 이젠 로테라고 부르지 마. 리자라고 불러.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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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는 과학으로만 재현할 수 없는 의미와 느낌의 공동체이다. (책을 펴내면서, 12)

버거는 발자크의 소설을 통해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고 폭로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을, 다시 말해서 `사회학적 시각`을 얻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 한편에는 발자크의 캐리커처가 걸려 있다. 그 액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가끔씩 이렇게 중얼거린다. "좋은 사회학은 좋은 소설과 유사하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58)

유대인 출신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도 이야기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규정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면서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실제 그대로인 것들을 통해 동의와 화해를 이끌어낸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62)

그러나 예술로서의 사회학은 그냥 예술이 아니다.예술이면서 사회학이고 사회학이면서 예술이어야 한다. 예술이되 사회학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사회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결합시켜 예술적인 사회학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학자는 `사회학자/작가`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90)

니체가 볼 때 예술가는 "일의 즐거움 없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하기를 바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이 까다롭고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모든 이득 중에 가장 큰 이득이 아니라면 많은 금전적 이득은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예술론, 103)

대중은 낱낱의 구체적인 체험과 경험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학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여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으로 현실을 설명한다. 그래서 학자들의 언어와 대중의 언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른다. 노명우는 "이론이 이론을 낳고 해석에 해석을 덧칠하는" 학자들의 게토를 벗어나 대중을 향해 말문을 연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고 그들과 대화하는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제창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개인의 생생한 느낌"과 "삶의 리얼리티"를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한 사회학적 분석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힘겨운 시도다. (소통하는 사회학-노명우의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 326)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감싸 안으면서 인문학과 대화하는 기초 학문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사회학-송호근의 한국 근대 탐색, 417)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하나의 틀에 의거하여 일관되게 설명하는 인식틀을 해체"시켰다(김기봉 외,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 푸른역사, 2002, p. 12). 그에 따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지식이 파편화되고 상대화되었다. (‘우물‘ 밖으로 나온 사회학-송호근의 한국 근대 탐색, 418)

한 사회의 가치와 상징은 그 사회의 제도와 구성원들의 행위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 사회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게 한다. 그래서 얼핏 정치권력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상징 세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징 세계의 논리는 한번 형성되면 잘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경향을 갖는다. 박영신 교수는 이러한 이론적 입장에 서서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정치구조나 경제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상징구조의 변화에 있으며 그러한 상징 체계의 영역에서 ‘돌파‘를 추구하는 종교인, 학자, 예술가 들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징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사회운동 세력이 결합했을 때 한 사회의 심층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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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의 이름을 <파이낸셜타임스>에서, 아니면 <월스트리트저널>에 작은 활자로 쓰인 행간에서 찾아야만 했다. 서방세계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번영의 물결에 따라 떠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사업가들이 이런 잡지들의 요란하지 않으면서 우수한 수준 덕분에 영국 새빌 로 거리의 유명한 디자이너들보다 더 멋지게 포장되었다. (p.12)

미국인들은 문제에 해답이 없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서, 그들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힘든 민족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실패의 의미라는 `인간의 조건` 때문에 그들은 정신과에서 진찰을 받으며 힘이나 돈, 세계신기록의 대체물 쪽으로 미친 듯이 몰고 간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은 미국의 무능력일지도 모른다. 인조 남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것은 핵폭탄같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배관공 가게에 들어가듯이 정당방어 자세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섹스숍으로 들어간다. 미국인들은 아직 실패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한계 앞에서 고개 숙이기를 거부한다. (p. 80)

그렇게 그는 벼락부자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본성을 버리고 `조금씩 조금씩` `제 손으로` `인내심을 품고 오랜 시간을 두는` 방식과 인연을 끊었고, 얼마니 많은 사인을 해주었던지 사인이 의미하는 바도 망각했으며, 그러는 동안 엄청난 액수는 그 자체로 규모만큼이나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p.88-89)

나는 침대에 미동도 않고 똑바로 누워 있었다. 경솔하게 몸을 뒤척여서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경험, 조롱, 하찮은 말, 이성의 힘으로 온갖 것을 가정해본다. 그다음에 온 것은 모든 늙은 남자들이 분명 청소년 시절 첫사랑을 겪었을 때 느꼈던 고통스럽고 찌르는 듯이 가슴 아픈 혼란 상태였다. 게다가 난 이제 그다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행복을 망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가 말했듯이, 이 순간은 다른 어떤 순간들보다도 힘든 시간이다. 계속하고는 싶지만 캔버스에 한 번 더 손을 대면 모두 망칠 것이라는 사실을 화가라는 직업이 조곤조곤 알려주기 때문이다. 제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p.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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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도박장으로 달려가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열기, 소비 욕망과 지위 상승의 욕망, 도박 조건의 확산 등으로 인해 잠재적 도박꾼들이 되어 있다. 도박에 대한 의식과 태도가 우리의 몸에 체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지노의 신체`는 특정한 도박꾼들 개개인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화된 속성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투기적 무임승차에 의한 대박`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p.47, 김왕배, 대박 열풍과 `카지노` 사회)

하지만 욕망은 자연적이며 본유적인 속성을 지닌 욕구(need)와 달리 사회적 속성과 역사적 맥락을 갖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즉 욕망은 사회적인 것이며, 따라서 `부자 되기` 열망 또한 특정한 사회 역사적 맥락을 갖는 사회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p.55, 정수남, `부자 되기` 열풍의 감정 동학과 생애 프로젝트의 재구축)

오늘날 심리학이 사회 전반의 핵심 영역으로 떠오르는 현상에 대해 울리히 벡(1997)은 `사회적 위험의 개인화`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문제는 더욱 더 심리학적 성벽의 견지에서, 즉 개인적 부적응, 죄책감, 갈등, 노이로제와 같은 식으로 인식된다. 역설적이게도 개인과 사회의 직접성, 위기와 병세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나타난다. 사회의 위기는 개인의 위기로 나타나며 개인의 위기는 사회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인식되지 않거나 아주 간접적으로만 그러한 것으로 인식된다."(벡, 1997:171) (p.76, 정수남, `부자 되기` 열풍의 감정 동학과 생애 프로젝트의 재구축)

궁극적으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경영학적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부자가 되기 위한 `마인드`나 `습관`의 혁명이 더욱 필수적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학력, 세대, 성별, 계급, 지위, 지역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마음만 먹으면 실현 가능한 일로 비춰진다. <성공시대>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는 성공 요인도 `정열, 집념, 인내, 창의, 개성, 조력자, 도전, 완벽주의, 긍정적 사고, 인화, 현실 인정` 등이며, 이 프로그램은 "기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불평등 조건에 주목하여 저항하기보다는, 현재의 고통이나 불만을 개인적 노력의 부족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개별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성공에 이르도록 하게 한다."(백선기, 최경순, 2000: 271, 273) (p.76, 정수남, `부자 되기` 열풍의 감정 동학과 생애 프로젝트의 재구)

궁극적으로 특목고 등의 다양한 고교의 설립은 평준화 이후 대입에 집중된 과도한 경쟁을 뚫고 나와 좀 더 이른 시기에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려는 현실적 요구와 결합된 것이라 하겠다. 즉 1960년대 이후 정부가 상향 이동시킨 교육 경쟁이 그 한계에 달하자 민간의 요구와 결합하면서 다시 하향 이동하고 특정 집단에 집중되어가는 전환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p.185, 구난희, 신명문고 열풍으로 본 한국 교육 경쟁의 구조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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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머릿속에 각인하기 위해 도시는 스스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르마로부터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창문 높이에서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비행선들, 선원들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 무더위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뚱뚱한 여자들로 만원인 지하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정을 함께한 이들은, 맹세코 도시 첨탑 사이를 날던 비행선은 한 대밖에 보지 못했으며, 바늘과 잉크와 구멍뚫린 문신 도안을 의자 위에 늘어 놓던 문신 새기는 사람도 딱 한 명, 전철 승강장에서 부채질을 하던 뚱뚱한 여인도 역시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기억은 필요 이상의 것들로 넘칩니다. 기억은 도시를 존재시키기 위해 기호들을 반복합니다. (p.28-29)

실현되지 않은 미래들은 과거의 가지들일 뿐이다. 마른 가지들.
이때 칸이 이렇게 물었다.
"자네의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는 자네의 미래를 다시 찾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마르코는 대답했다.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p.40)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발드라다에 존재하는 것, 혹은 일어나는 일들 중 그 어떤 것도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쌍둥이 도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얼굴과 행동이 거울에서는 정확히 뒤집어진 얼굴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두개 발드라다는 계속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해 살아가지만 상대방을 사랑하지는 있습니다. (p.70)

"폐하, 폐하의 손짓 한 번에 따라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도시의 성벽들이 흠 하나 없이 높이 세워지는 동안, 저는 그 새 도시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졌을 다른 가능한 도시, 다시 세워지거나 기억될 가망이 없는 그 도시의 재를 긁어모을 겁니다. 그 어떤 보석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불행의 잔재들을 인식하실 수 있을 때에만 폐하께서는 마지막 다이아몬드가 가져야 하는 정확한 캐럿을 계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폐하의 계산은 처음부터 실수가 없을 겁니다." (p.76-77)

완벽함을 쌓아가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베르세바는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 데 골몰하는 우울한 열정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편안하게 긴장이 완화되는 유일한 순간들은 바로 스스로에게서 분리되어 그것을 떠나 보내고 스스로 확장되어 나가게 하는 순간들임을 도시는 알지 못합니다. (p.147)

그 도시를 보기 위해 도시 한가운데 서 있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도시처럼 보일 수 있다. 이레네는 멀리서 본 도시의 이름이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도시의 이름은 달라진다.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는 이에게 도시가 이런 모습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저런 모습이 될 겁니다. 그건 처음으로 도착하는 도시일 수도 있고 한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도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도시는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미 다른 이름으로 이레네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는 이레네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 (p.159)

[도시와 기호들 I]
여행자는 나무와 돌을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걷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 모래 위의 흔적은 사자가 지나갔음을 알려주고, 늪지는 수맥을 알려주고, 히비스커스 꽃은 겨울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서로 교환이 가능합니다. 나무와 돌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여행자는 타마라 시에 닿습니다. 폐허는 벽마다 간판들이 튀어나와 있는 좁은 거리들을 따라 도시를 가로지릅니다. 눈은 사물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을 의미하는 사물의 형상들을 바라봅니다. 펜치는 이 뽑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고, 큰 잔은 술집을, 미늘창은 수비대의 막사를, 저울은 채소 가게를 가리킵니다. 상과 방패들은 사자, 돌고래, 탑, 별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가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자나 돌고래, 탑 혹은 별을 기호로 가지고 있단느 표시입니다. 다른 표식들은 특정 장소에서 금지된 일, 즉 수레를 끌고 골목에 들어가는 일, 가판대 뒤에서 소변을 보는 일, 다리에서 장대로 낚시하는 일 등과, 허용된 일, 즉 얼룩마들에게 물을 먹이는 일, 공을 가지고 노는 일, 친지의 유해를 화장하는 일 등을 미리 알려줍니다. 신전의 입구에는 풍요의 뿔, 모래시계, 메두사같이 각각의 상징들로 표현되어 있는 신상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상징들로 신들을 알아볼 수 있고 그에 맞는 적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물에 간판이나 표지가 없다면, 그건 도시 질서 내에서 그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그 기능, 즉 왕궁, 감옥, 조폐소, 피타고라스 학교, 사창가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수놓은 머리띠는 우아함을, 금도금한 가마는 권력을, 이븐 루슈드의 책들은 학식을, 발찌는 관능을 뜻합니다. 책장을 넘기듯 시선이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폐하께서 생각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합니다. 폐허에서는 자신이 타마라를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저 도시가 자기 자신과 각 부분들을 정의하는 이름을 기록하고 계실 뿐입니다.
도시가 이와 같이 조밀한 기호의 껍질 속에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타마라에서 나올 때에도 도시가 정말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숨기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도시 밖에는 텅 빈 땅이 지평선까지 길게 뻗어 있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구름이 떠갑니다. 우연과 바람이 만들어낸 구름의 모습들 속에서 여행자는 어느새 범선, 손, 코끼리의 형상들을 구별하는 데 열중해 있습니다.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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