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3)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72-73)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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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무라에게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 워도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써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64)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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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게 어떤 운명에 맞춰 살아온 사람만의 변하지 않는 특질이 그에게서 느껴졌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30년이 지나 사람들이 추하게 변해 갈 때도 그들은 마음속 분노와 함께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이상한 젊음, 고요하면서도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 같은 용기를 여전히 지니는 것이다. 그날 밤 비랄보에게서 발견한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바로 눈빛이었는데, 초연한 듯하면서도 모순으로 가득한 흔들림 없는 눈빛은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마주대하기에 너무나 벅찬 시선이었다. (12)

깃을 세우고 단추를 푼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기다란 몸을 흔들거리며 되돌아오는 그를 보자,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처럼 늘 무슨 과거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의 강력한 낌새를 이해하게 되었다. 비랄보에겐 실제로 과거가 있었고 그는 권총을 품에 넣고 다녔다. (20)

산티아고 비랄보는 그 불완전한 망각의 고통에 면역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산세바스티안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행동과 동시에 전기가 시작되는, 과거가 없는 오만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56)

한 사람의 얼굴은 항상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예언이다. (98)

어쩌면 그녀를 움직인 것은 애정이 아니라 서로가 혼자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2년이 지나 리스본에서 어느 겨울날 밤부터 해뜨기 전까지 비랄보는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을 연결하는 유일한 것임을 깨달을 터였다. 그 감정은 욕구도 추억도 아닌 바로 버림받았다는 느낌, 혼자 있다는 확신, 실패한 사랑을 용서받을 수조차 없다는 확신이었다. (102)

"그녀를 알았을 때,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쳐 왔잖아. 플로로가 항상 그랬어. 자네가 음악가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은 바로 빌리 스완이었다고."
호텔 침대에 기대어 있던 비랄보는 추웠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빌리 스완이든 루크레시아든 상관없어. 그땐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해야만 내가 존재했지." (108)

한번은 비랄보가 진을 서너 잔 마시고 나서 기분 좋게 취해 내게 말했다.
"이름들은 음악처럼 그것들이 암시하는 존재와 장소들을 시간에서 분리하고, 소리에서 나오는 신비로움이라는 무기는 그것들이 현재가 되도록 만들어." (113)

웃음은 항상 그들을 구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학적인 우아함, 그것은 각자가 쓰고서 서로 이해해 주는 가면이었다. 절망에 대한 가면이자 두 배의 두려움에 대한 가면이었다. 그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한없이 혼자이고 버림받고 방황했다. (114)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인 양 서로를 바라보았고 옛날의 열정적이고 부패한 사랑을,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그들을 성숙시켰다는 것과 그들의 충실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엇다. 냉혹하게도 비랄보는 그중 그 어느 것도 그를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간절한 탐색전이 외로움의 냉혹한 징표를 없애지는 못했다. 없애기는커녕 그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서글픈 진리인 양. (115)

어쩌면 사랑보다 더 큰 힘, 애정이 아니라 욕망이나 고독 같은 힘이 그의 의지와 이성에 반하여, 모든 희망에 반하여, 계속해서 그를 루크레시아에게 연결시키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나는 이해했다. (128)

그녀의 입술 양 끝의 움직임, 시간이 루크레시아의 눈빛 안에 정화시킨 조용한 용서와 체념의 표정을 그는 알았다. 하지만 이젠 몇 년 전과 같이 잠시 지나가는 체념의 징조가 아니라 그녀의 영혼에 완전히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150)

빌리 스완의 주장들 중 하나는 고상한 사람들은 모두 태어난 나라를 싫증내어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곳에서 영원히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183)

비랄보는 책을 무릎에 펼친 채 루크레시아가 말하는 내내 그 그림을 보았다.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밤, 도주, 죽음에 대한 공포, 루크레시아를 찾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가끔 사랑이 그랬고 거의 항상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그 그림은 이상하고도 고집스러운 정의의 윤리적 가능성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우연이 형태를 갖추고, 세상이 다시 살 만해지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비밀스러운 질서의 가능성이었다. 성스럽게 꽉 닫혀 있으면서도 일상적이고 주위에 녹아 있는 그 무엇이었다. 빌리 스완이 침묵 속으로 음이 사라질 만큼 나지막하게 트럼펫을 연주할 때의 음악 같고, 리스본의 오후 황혼에 비친 황토색, 분홍색, 회색 빛깔 같았다. 음악이나 색채의 함의를 이해한다든지 빛의 고정된 신비로움을 밝힌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수년 전에 이미 그 느낌을 알았으나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때 알았던 것처럼 지금 그것들을 되새기고 회복했다. 좀 더 지혜로워지고 조금은 열기가 식은 그는 자연스럽게 루크레시아와, 그녀의 한결같이 침착한 목소리와, 입술을 열지 않고 짓는 미소에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잃어버린 조국의 공기 냄새처럼 되살아나는 과거의 향수에 연결되어 있었다.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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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콜랭이에요. 콜랭, 클로에를 소개할게요."
콜랭이 침을 삼켰다. 뜨거운 튀김을 먹다가 덴 것처럼 입 안이 얼얼했다.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콜랭이 물었다.
"안녕하...... 듀크 엘링턴이 당신을 편곡했나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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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인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픈 눈이 되었다.˝와 같은 소설 속 문장들, 좋아하지 않는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을 파고들어 밑바닥까지 헤쳐볼 생각도 (또는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그런 얕은 문장들로 서정적인 음울함을 피상적으로만 만들고 싶어한다고 느낀다. 5분이면 흩날려버릴 얕은 우울한 공기 조성하기.

얽매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여자, 남녀 불문 모두를 홀리는 그 캐릭터까지 클리셰였다. 그런 그녀를 동경하는 주인공도. 자살이라는 마무리까지. 그녀를 더 환상적으로 연출하는 방법은 얇은 발목과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 일순간 사라지는 샴푸 향, 왜소한 체구 같이 청순하고 예쁜 외모를 대뜸 묘사하곤 하는 것. 지금까지 읽은 일본의 여류 작가 소설들이 비슷한 이유는 뭘까. 오래 전 읽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가 자주 떠올랐다.

‘그녀는 빨간색이 어울렸으니, 손목을 그어 자살한 욕조도 빨간색으로 물들었으리라‘는 문장을 보고는 그 순도 높은 중2병스러움에 책을 덮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읽고 나니 시간 아깝고, 차라리 조르바를 두 번 읽겠다 싶고. (1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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