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머릿속에 각인하기 위해 도시는 스스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르마로부터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창문 높이에서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비행선들, 선원들의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 무더위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뚱뚱한 여자들로 만원인 지하철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정을 함께한 이들은, 맹세코 도시 첨탑 사이를 날던 비행선은 한 대밖에 보지 못했으며, 바늘과 잉크와 구멍뚫린 문신 도안을 의자 위에 늘어 놓던 문신 새기는 사람도 딱 한 명, 전철 승강장에서 부채질을 하던 뚱뚱한 여인도 역시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기억은 필요 이상의 것들로 넘칩니다. 기억은 도시를 존재시키기 위해 기호들을 반복합니다. (p.28-29)

실현되지 않은 미래들은 과거의 가지들일 뿐이다. 마른 가지들.
이때 칸이 이렇게 물었다.
"자네의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는 자네의 미래를 다시 찾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마르코는 대답했다.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p.40)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발드라다에 존재하는 것, 혹은 일어나는 일들 중 그 어떤 것도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쌍둥이 도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얼굴과 행동이 거울에서는 정확히 뒤집어진 얼굴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두개 발드라다는 계속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해 살아가지만 상대방을 사랑하지는 있습니다. (p.70)

"폐하, 폐하의 손짓 한 번에 따라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도시의 성벽들이 흠 하나 없이 높이 세워지는 동안, 저는 그 새 도시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졌을 다른 가능한 도시, 다시 세워지거나 기억될 가망이 없는 그 도시의 재를 긁어모을 겁니다. 그 어떤 보석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불행의 잔재들을 인식하실 수 있을 때에만 폐하께서는 마지막 다이아몬드가 가져야 하는 정확한 캐럿을 계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폐하의 계산은 처음부터 실수가 없을 겁니다." (p.76-77)

완벽함을 쌓아가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베르세바는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 데 골몰하는 우울한 열정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편안하게 긴장이 완화되는 유일한 순간들은 바로 스스로에게서 분리되어 그것을 떠나 보내고 스스로 확장되어 나가게 하는 순간들임을 도시는 알지 못합니다. (p.147)

그 도시를 보기 위해 도시 한가운데 서 있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도시처럼 보일 수 있다. 이레네는 멀리서 본 도시의 이름이다. 가까이에서 본다면 도시의 이름은 달라진다.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는 이에게 도시가 이런 모습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저런 모습이 될 겁니다. 그건 처음으로 도착하는 도시일 수도 있고 한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도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도시는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미 다른 이름으로 이레네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는 이레네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 (p.159)

[도시와 기호들 I]
여행자는 나무와 돌을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걷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 모래 위의 흔적은 사자가 지나갔음을 알려주고, 늪지는 수맥을 알려주고, 히비스커스 꽃은 겨울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서로 교환이 가능합니다. 나무와 돌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있을 뿐입니다.
마침내 여행자는 타마라 시에 닿습니다. 폐허는 벽마다 간판들이 튀어나와 있는 좁은 거리들을 따라 도시를 가로지릅니다. 눈은 사물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을 의미하는 사물의 형상들을 바라봅니다. 펜치는 이 뽑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고, 큰 잔은 술집을, 미늘창은 수비대의 막사를, 저울은 채소 가게를 가리킵니다. 상과 방패들은 사자, 돌고래, 탑, 별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가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자나 돌고래, 탑 혹은 별을 기호로 가지고 있단느 표시입니다. 다른 표식들은 특정 장소에서 금지된 일, 즉 수레를 끌고 골목에 들어가는 일, 가판대 뒤에서 소변을 보는 일, 다리에서 장대로 낚시하는 일 등과, 허용된 일, 즉 얼룩마들에게 물을 먹이는 일, 공을 가지고 노는 일, 친지의 유해를 화장하는 일 등을 미리 알려줍니다. 신전의 입구에는 풍요의 뿔, 모래시계, 메두사같이 각각의 상징들로 표현되어 있는 신상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상징들로 신들을 알아볼 수 있고 그에 맞는 적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물에 간판이나 표지가 없다면, 그건 도시 질서 내에서 그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그 기능, 즉 왕궁, 감옥, 조폐소, 피타고라스 학교, 사창가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수놓은 머리띠는 우아함을, 금도금한 가마는 권력을, 이븐 루슈드의 책들은 학식을, 발찌는 관능을 뜻합니다. 책장을 넘기듯 시선이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폐하께서 생각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게 합니다. 폐허에서는 자신이 타마라를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저 도시가 자기 자신과 각 부분들을 정의하는 이름을 기록하고 계실 뿐입니다.
도시가 이와 같이 조밀한 기호의 껍질 속에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타마라에서 나올 때에도 도시가 정말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숨기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도시 밖에는 텅 빈 땅이 지평선까지 길게 뻗어 있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구름이 떠갑니다. 우연과 바람이 만들어낸 구름의 모습들 속에서 여행자는 어느새 범선, 손, 코끼리의 형상들을 구별하는 데 열중해 있습니다.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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