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회는 과학으로만 재현할 수 없는 의미와 느낌의 공동체이다. (책을 펴내면서, 12)

버거는 발자크의 소설을 통해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고 폭로적이고 전복적인 시각"을, 다시 말해서 `사회학적 시각`을 얻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 한편에는 발자크의 캐리커처가 걸려 있다. 그 액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가끔씩 이렇게 중얼거린다. "좋은 사회학은 좋은 소설과 유사하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58)

유대인 출신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도 이야기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규정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면서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실제 그대로인 것들을 통해 동의와 화해를 이끌어낸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62)

그러나 예술로서의 사회학은 그냥 예술이 아니다.예술이면서 사회학이고 사회학이면서 예술이어야 한다. 예술이되 사회학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사회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결합시켜 예술적인 사회학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학자는 `사회학자/작가`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왜 예술로서의 사회학인가?, 90)

니체가 볼 때 예술가는 "일의 즐거움 없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하기를 바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다. "이 까다롭고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모든 이득 중에 가장 큰 이득이 아니라면 많은 금전적 이득은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예술론, 103)

대중은 낱낱의 구체적인 체험과 경험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학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여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으로 현실을 설명한다. 그래서 학자들의 언어와 대중의 언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흐른다. 노명우는 "이론이 이론을 낳고 해석에 해석을 덧칠하는" 학자들의 게토를 벗어나 대중을 향해 말문을 연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고 그들과 대화하는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제창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개인의 생생한 느낌"과 "삶의 리얼리티"를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한 사회학적 분석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힘겨운 시도다. (소통하는 사회학-노명우의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 326)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감싸 안으면서 인문학과 대화하는 기초 학문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사회학-송호근의 한국 근대 탐색, 417)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사회의 현실을 하나의 틀에 의거하여 일관되게 설명하는 인식틀을 해체"시켰다(김기봉 외,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 푸른역사, 2002, p. 12). 그에 따라 역사와 사회에 관한 지식이 파편화되고 상대화되었다. (‘우물‘ 밖으로 나온 사회학-송호근의 한국 근대 탐색, 418)

한 사회의 가치와 상징은 그 사회의 제도와 구성원들의 행위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 사회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게 한다. 그래서 얼핏 정치권력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상징 세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징 세계의 논리는 한번 형성되면 잘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경향을 갖는다. 박영신 교수는 이러한 이론적 입장에 서서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정치구조나 경제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상징구조의 변화에 있으며 그러한 상징 체계의 영역에서 ‘돌파‘를 추구하는 종교인, 학자, 예술가 들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징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사회운동 세력이 결합했을 때 한 사회의 심층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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