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16)

그 순간 냉소주의자는 단지 특별히 높은 기준을 가진 이상주의자일 뿐이란 금언이 떠오른다. (22)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그들은 진중한 사람들이다. 커스틴은 현재 ‘지자체 사업의 조달 방법‘이란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고 다음 달에 던디에 가 그곳 공무원들 앞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라비는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공간 구축‘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럼에도 별것 아닌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놀랍도록 자주 끼어든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가장 적합한 온도는 몇 도인가?
(…) 다른 쟁점을 살펴보면, 평일 저녁 밖에서 식사(특별한 약숙)를 하려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할까? (73-74)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 비결이다.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 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 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4)

운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강인함, 결국 눈물을 멈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녀에겐 작은 슬픔이라도 느끼는 것 자체가 사치다. 그녀는 다 부서지고 나면 다시 조각들을 어떻게 짜 맞추어야 할지 영영 모를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럴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곱 살의 어린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상처를 마비시킨다. (112)

그렇게 해서 세상은 에스터의 유년기 동안 일종의 안정성을 획득한다. 나중에 그녀는 그 안정성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고 느낄 테지만, 사실 부모의 확고하고 현명한 편집 덕분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견고함과 지속성이란 것은 인생이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변화와 파괴가 얼마나 상시적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는 환상이다.
(…) 에스터에게 그 카펫은 맨 처음 기기 시작할 때 느꼈던 태고의 감각으로 남을 것이다. 그녀는 그 독특한 냄새와 감촉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 카펫을 결코 가정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확고부동한 토템으로 미리 예정하지 않았다. 사실은 에스터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중심가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신뢰가 안 가고 얼마 안 가 문을 닫은 지역 판매점에서 다소 급하게 주문한 물건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에 안심되는 면면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의 허약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154-155)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란 쉽지 않은 선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높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 날을 위해서다. (155)

그가 침대 발치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가수는 옥타브를 끌어올리며 언제나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는데 그의 영혼 속으로 곧장 들어오는 외침을 듣는 듯하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그런 음악을 멀리했다. 삶의 제약들이 결연함과 무덤덤함을 요구할 때 황홀에 도취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205)

이 순간 그는 자기 연민, 그에게 일어난 일이 드물거나 부당하다는 그 얄팍한 믿음을 벗어났다. 자신이 순수하고 유일무이하다는 믿음도 어느새 잃어버렸다. 이건 중년의 위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30여 년이나 늦게 사춘기를 벗어난 것이다.
(…) 그래, 실패란 이런 것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침묵이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일도 전혀 없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실패를 엄청난 재난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왔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실패는 사실 겁먹은 무위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든 것, 심지어 굴욕에도 익숙해진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 나쁘지 않게 보이는 습성이 있다.
그는 이미 특별한 이득도 이렇다 할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삶의 은혜를 너무 많이 써버렸다. 세상에 온 지 수십 년이 흘렀거남ㄴ 단 한 번도 땅을 일구거나 배고픈 채 잠들지 않았으며 잘못 자란 아이처럼 자신의 특전을 대부분 손도 대지 않고 방치했다. (265-266)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분발심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천재의 몇몇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과거에 라비는 어떤 것이든 흠 없이 완벽해야만 소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차가 긁히면 운전이 즐겁지 않았다. 방이 지저분하면 쉴 수 없었다. 연인이 그의 어떤 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 전체가 가식이 되었다. 이젠 ‘충분히 좋은‘ 게 충분히 좋다. (267)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9-280)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성은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한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고, 커스틴은 그가 부주의하게 저지른 일에 성마르게 한마디 내뱉고, 그는 직장에서 직면할 힘든 문제들을 떠올리고는 두렵고 지루하고 망친 것 같고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이 사진의 최종 운명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미래에 이 사진이 어떻게 읽힐지, 보는 사람이 그들의 눈에서 무엇을 찾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진은 몇 시간 뒤 집으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나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일까? 또는 커스틴의 외도가 밝혀져 그녀가 집을 나가기 한 달 전에, 또는 에스텉의 증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에? 또는 이 사진이 거실의 선반에 수십 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먼지 낀 액자에 담겨 있으면서, 부모에게 약혼녀를 인사시키기 위해 돌아온 윌리엄이 무심코 집어 들기를 기다리게 될까? (291-292)

불확실성을 의식하는 만큼 라비는 더욱 열렬히 이 햇살을 붙잡아두고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는 커스틴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인내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293)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 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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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날 책벌레, 책 허기증 환자로 만든 것은 주변의 권유보다는 몇 안 되는 엄마의 금기(잠 잘 시간에 읽는 것), 현명한 충고(나이가 차기 전에는 읽지 않는 것), 학교 규칙(수학시간에는 소설책을 손에서 놓는 것)을 어기는 쾌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에게 페냑의 [소설처럼]에 한번 빠져보라고 적극 권한다. 특히 그들 서재에 아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아직 고추에 털도 안 난 녀석이 어딜 감히!"라는 모욕적인 말로 그들을 쫓아내라고. 그렇게 해도 책에 흠뻑 취하는 방식으로 반항하지 않는 아이는 진정한 반항아, 호기심도 없는 아둔한 녀석, 혹은 자극해봤자 씨도 안 먹히는 철학자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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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메어 제대로 끝맺지 못한 그 한마디 문장이 눈처럼 그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였을 때, 마침내 포화 상태가 되었을 때, 자기가 발음한 그 어색한 한마디가 내부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틈이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랑은 자기가 한 사랑의 말-"사랑해요, 나도"-에 의해 충만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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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너무나 적었건만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줄기 햇살, 가까운 들판, 한줌의 평온과 한 쪽의 빵,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19)

그래서 집을 찾아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나는 내 집은 아니지만 도라도 레스 거리의 널찍한 사무실로 돌아온다. 인생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성채라도 되는 양 내 자리에 정좌한다. 회계장부와 낡은 잉크병 받침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서 송장을 작성하는 동료 세르지우의 굽은 등을 보면 눈물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친밀감을 느낀다. 그들을 사랑하노라. 그들 말고는 사랑의 대상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또 원래 인간 영혼의 사랑에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별들의 광대한 무심함에 기울이는 사랑이든 내 잉크병 받침대의 한 귀퉁이에 대한 사랑이든 별 차이는 없다. (22)

나는 언제까지나 회계사무원으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 모레이라 관리장이 그리워지겠지. 하지만 영예로운 승진 앞에서 그리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바스케스 사무실의 회계관리장이 되는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일 테디, 나도 안다. 씁쓸하고 냉소적인 예감이지만 나의 지성을 걸고 확신한다. (32)

한 번도 이해받기를 원한 적이 없다. 이해받는 것은 몸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잘못 알고 있기를, 나를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며 예의바르고 혼연스럽게 대하기를 원한다. (170)

설혹 우리 주위에서, 우리인 척하던 것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가 무너지더라도 의연해야 한다. 우리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 위에서 세상이 무너질지라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 우월한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대결을 거부하는 꿈이어야 한다. (213)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로 퇴보하거나, 결국 소멸하고 말 존재로 성장하거나. 기로에 선 이 지독한 시간. / 아침이 결코 밝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이 작은 방과 그 안의 공기가 모두 ‘밤‘의 영혼의 일부가 되거나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려,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을 내 기억으로 더럽히는 그림자 하나도 내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241)

그러면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이들을 제압하거나 거부해야 하는데, 현실 속에서 그들을 넘어설 수 없기에 나는 결코 제압하지도 못하고, 무엇을 꿈꾸든 결국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 거부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243)

어떤 사람들은 희망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 있으면 공허하다고 말한다. 기대도 실망도 않게 되자 내게 인생이란 단순이 나를 포함한 한 장의 그림이 되었다. 그저 눈요기로 만들어진 줄거리 없는 공연 같은 그림 안에 있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춤,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 햇빛에 색이 바뀌는 구름, 도시 이곳저곳의 오래된 거리 들을 구경한다. (249)

내가 인생에서 찾아다녔던 모든 것들은, 찾아다니려고 나 자신이 직접 버렸던 것이다. (280)

인생은 얼마나 천박하고 저급한지! 아무리 피하고 싶다 해도 천박함과 저급함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은 당신의 의지나 당신의 의지에 대한 환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95)

타르드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부질없는 것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여정이다. 항상 불가능한 것을 찾아보자.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니까. 부질없는 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찾자. 다른 길은 없으니까. 다만 우리가 찾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고, 우리가 가는 길에는 애정이나 그리움을 품을 대상 하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자. / 고전에 주석을 다는 학자들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이해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해하고 계속 이해하여 이로부터 피어난 유령 같은 꽃송이들로, 역시 시들어버리고 말 화환과 화관을 솜씨 있게 만들어보자. (305)

인간의 영혼은 괴짜들이 모인 정신병원이다. 만일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부끄러움과 체면보다 더 깊은 수치심을 버리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영혼의 참모습은 우물, 공허한 메아리로 가득차고 혐오스러운 생명체와 생명 없는 끈적임과 흐느적거리는 민달팽이와 주관성의 분비물이 서식하는 불길한 우물일 것이다. (308-309)

이런 일들이나 이와 비슷한 재난을 충분히 예견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겪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이나 글이 정직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성적인 단언의 진실성은 즉각적인 감성의 자연스러움과 아무 관련이 없다. 삶에 아픔이 부족하지 않도록, 반드시 치욕이 주어지도록, 삶에서 감당해야 할 슬픔의 몫을 꼭 치르도록, 영혼은 그런 충격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륵 비통해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신세다. 느끼지 않는 사람만이 고통을 피한다. 가장 고귀한 이들, 가장 지위가 높은 이들, 가장 신중한 이들은 모두 자신이 예견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을 겪으며 고통받는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312-313)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지와 서로를 모르는 무지. 인간의 영혼은 어둡고 끈적끈적한 심연이고, 땅의 표면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다. 자기 자신을 정말 잘 알고 있다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영혼의 피인 허영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은 빈혈로 죽을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만다행이지, 만일 알았다면 우리의 어머니, 아내, 자식 안에서 가장 고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적을 만났을 것이다. (326-327)

우리가 사는 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 위대함과 존재할 수 없는 행복 사이를 흘러가는 오해이며,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누린다. 생각하고 느낄 때조차도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만족하고 산다. 우리의 인생인 이 가면무도회에서는 잘 맞아 흡족한 예복이면 더이상 바랄 게 없는데, 무도회에서는 예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마치 춤이 진실인 양 춤에 몰두한 우리는 빛과 색깔의 하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춤추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다면 다를지몰라도, 저 바깥의 깊고 추운 밤을 알지 못하고, 우리 몸보다 오래 살아남을 의복 아래 있는 언젠가 죽을 육체도 알지 못한다. 실제로는 우리가 추측한 진실의 내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데 본질적으로는 우리라고 여기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327-328)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다른 이들을 모르기에 서로 유쾌하게 어울리며 이 공연을 주관한 자들의 무심하게 깔보는 눈길 아래서 별들의 위대한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춤추다가, 쉬는 시간에는 인간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눈다. / 우리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환상에 갇힌 죄수들임을, 그들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환상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런 환상 또는 다른 환상이 있는지, 왜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환상에 속아 우리에게 이런 환상을 주는지, 그것은 분명 그들도 모를 것이다. (328-329)

권태……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영혼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느끼는,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불만.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픈 어린아이가 갖고 싶은 신성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느끼는 절망일 것이다. 어쩌면 심오한 감각의 어두운 길에서 이끌어주는 손이 절실히 필요한 데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침묵의 밤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텅 빈 길밖에 감지할 수 없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권태…… 신을 믿는 자에게는 권태가 없다. 권태는 신화의 부재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의심조차 불가능하고, 그들 안에 도사린 회의주의마저 의문을 던질 힘을 잃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권태다. 영혼이 스스로 착각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리는 것. 생각이 진실을 향해 굳건히 딛고 올라설 상상 속 계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34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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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고통의 외침 가운데서 태어나.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그 외침이 완화된 형태일 뿐이야. (135)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136-137)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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