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개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관련된 것이면서, 집합적으로 구성되는 정교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느끼는가는 타고난 천성이나 성장 배경에 좌우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정서적 문법의 영향을 받는다고도 볼 수 있다. 모든 심리적 현상에는 생리적인 뿌리와 함께 역사적인 맥락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면, 사회의 실체를 보다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p.5)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또 다른 모멸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p.68)

`삶이 특별해진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인간은 무로 돌아간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라고 화를 내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몰라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나를 싫어할 수가 있어?` 그런 식으로 남과 세상에 삿대질하는 사람은 에고의 단단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있는 셈이다. `노바디`라는 근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남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살아 있는 만남을 향유할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말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p.272)

내면이 풍부한 사람은 구차하게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스스로 드높은 세계에 충실한 사람은 타인의 평가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머무는 마음의 정원은 타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억지로 은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범상한 사람들이 그 깊이에 이르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그럴수록 오묘한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의 건설적인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묵묵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갈 줄 안다.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자신의 특별함도 상대화시키면서 평범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과 이룬 업적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p.270-271)

[서준식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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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출판사, 서치헌 번역, 1993년 4월 30일 발행본.

블로와 경위보다 교수님이 훌륭한 점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이 침묵을 위해 쓰여진 책을 소리내서 읽는다는,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행위, 미리 예상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것일까?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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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는 한 가지 점만 더 지적하고 싶다. 개인이 계산된 비의도성을 내보이려 시도해도, 그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조작하는 능력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정보 게임이 몇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든, 목격자는 행위자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므로 의사소통 과정 초기의 비대칭성이 유지된다. (p.20)

일상 공연을 냉소적으로 보는 관점은 공연자가 조성하는 관점만큼이나 일면적이다. 공연자가 조성한 인상과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인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된 실체인지 가려낼 필요조차 없는 사회학적 쟁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쟁점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일상의 공연에서 조성된 인상은 무너지기 쉽다는 사실뿐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떤 종류의 실체가 조성된 인상을 깨뜨리는지 알려는 데 있다. 어느 쪽이 참된 실체인지의 문제는 다른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주어진 인상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이다. 이 질문은 "거짓 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는 다른 질문이다. (p.89)

아이들은 부모 중 한쪽의 애정을 포기한 대가로 나머지 한쪽의 배타적 애정을 얻어낸다. 이런 수법은 아이가 부모를 대립하게 만들어서 가족 상황을 통제하는 수단이지만, 이것은 아이에게 상대적 안정감만 줄 뿐이다. 이런 수법을 써서 성공을 거두건 했던 아이는 이후 양가 감정이 없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특별히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오이디푸스 상황을 재형성하면서 교직원의 다양한 성향에 따라 각기 긍정적, 부정적 양면적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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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이러한 운명을 당당하게 견디어 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그는 흔히 그러하듯이 전향자임을 공공연하게 떠들지 말고, 차라리 소박하고 조용하게, 옛 교회의 넓고 자비로운 품 안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교회 또한 그의 이러한 전향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는 이 경우 어떻든 지성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불가피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 희생 때문에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종교적 헌신을 위한 그러한 지성의 희생은 소박한 지적 성실성 의무를 회피하는 것과는 도덕적으로 여하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피는 자신의 궁극적 입장에 대해 명료해질 용기를 지니지 못하고, 이 지적 성실성의 의무를 나약한 상대화를 통해 벗어버리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p. 86)

우리는 이 운명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즉 갈망하고 고대라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것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만 한다는 교훈, 우리의 일에 착수하여 `일상의 요구`를ㅡ인간적으로나 직업상으로나ㅡ완수해야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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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p.119)

나는 분자물리학 관련 서적을 읽고 아무도 알지 못할 이론들을 만들면서 나의 나날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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