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 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6)

저자는 1장에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영화에 나오는) 브뤼헐Pieter Brueghel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Richard Wagner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예로 하여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타자의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며, 결국 구원의 길임이 드러난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7)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사랑이 사유 자체의 필수적 조건임을 확언한다.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을 거부하는 세계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동반한 저자의 사랑 찬가는 사랑의 사멸과 함께 사유도 파괴된다는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알랭 바디우의 서문: 사랑의 재발명, 11)

타자의 아토피아(무소성)는 에로스의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23)

에로스, 에로스적 욕망이 우울증을 제압한다. 에로스는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피아로, 즉 완전히 다른 자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 (26)

아이는 텅 빈 하늘의 무한성에 매혹된다.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아이는 내면을 잃고 경계를 벗어나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아토포스적 외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Ent-Eignis,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 재앙." 그러나 이 재앙은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 여기에 바로 재앙의 변증법이 있다. 재앙의 변증법은 영화 「멜랑콜리아」의 구성 원리로도 작동한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27-28)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에로스의 이러한 관계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답은 그렇다이다. 만약 우리가 흔히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 한다면 말이다. 에로스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다." (41)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visage"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face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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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나는 아버지의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한 후에, 아버지는 내게도 가정생활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것을 사랑했고 이 다른 것을 완전하게 탐닉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차지하도록 해라. 남에게 넘겨주지 마. 자신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 인생의 모든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57)

"자유." 아버지는 반복해서 말했다. "인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무엇인데요?"
"의지, 자신의 의지야. 그것이 자유보다 더 좋은 권력을 준다. 원하기만 하면, 자유로울 수도 있고, 명령할 수도 있지." (57-58)

"괜찮아." 루신이 계속 말했다. "겁내지 말게. 정상적으로 사는 것, 집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네. 좋을 게 뭐가 있어? 파도가 휩쓸려 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도, 사람은 바위 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야 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기침을 해 대지만… 그런데 벨로브조로프에 대해선 들었나?"
"무슨? 아니오."
"소식도 없이 사라졌네. 카프카스로 갔다고들 해. 자네같은 젊은이에겐 교훈이 될 거야. 모든 것이 제때에 단념하고 그물을 찢고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네. 보아하니 자네는 다행히 빠져나왔군. 다시는 그런 것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게. 잘 가게." (134-135)

아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어느 것도 꺼리지 않는다. 그대는 마치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가진 듯해, 우수에도 위로받고, 슬픔과도 친하다. 자신에 넘치고 용감한 그대는 "보시오, 나는 혼자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의 날들도 흘러 흔적 없이, 속절없이 사라져 간다. 태양 아래 밀랍처럼, 눈처럼, 그대 안의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그대가 지닌 매력의 비밀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146-147)

그런 감정이 되풀이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면, 나는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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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47)

그리고 이번에는 한수의 몫이 더 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끝내 완전히 동일해질 수 없을 둘 사이의 상처와 고통의 불균형을 남은 생을 통해 가까스로 맞춰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53)

예컨대 근래 새삼스런 주목을 받고 있는 정영문의 소설책 열두 권 어디를 펼쳐도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아포리즘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그가 무의미한 세계의 무의미함을 빈손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증거다. (165)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이변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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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얘기하겠지만 창조적 작가는 자기 작품의 합리적 독자가 되어 억지스러운 해석에 반박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처럼 이미 자신의 글을 세상에 던져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호학에 관한 책을 낸 다음에는 내가 틀린 부분이 없는지 찾아보거나 내 의도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글을 오독했다는 걸 보여주는 데 온 시간을 쏟았다. 그에 반해 소설을 출판한 후에는 원칙적으로 독자들의 해석에 반론하지 않아야 한다는(또한 어떠한 해석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느꼈다.
이런 차이가 생긴 까닭은(여기서 우리는 창조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의 진정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론서가 대체로 특정한 이론을 증명하거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나 소설을 쓸 때 사람들은 모순 가득한 삶을 대변하고 싶어 한다. 여러 삶의 모순들을 펼쳐놓고 분명하고 통렬하게 드러내고자 하는것이다. 창조적 작가들은 독자에게 해답을 찾아보라고 주문할 뿐 공식을 정해주지는 않는다(싸구려 위안을 주려는 키치적 작가나 감상주의적 작가들은 제외하고). 내가 갓 출판한 첫 번째 소설로 강연을 하러 다니던 시절, 소설가는 때때로 철학자가 하지 못하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16-17)

첫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다. 오랜 격언에 천재는 10퍼센트의 영감과 90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은 종종 자신의 가장 뛰어난 시 중 하나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숲길을 거닐고 있을 때, 한 편의 시가 완성된 형태로 섬광처럼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마르틴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서재에서는 바로 그 시를 여러 해 동안 수없이 고쳐 썼던 방대한 분량의 원고가 발견됐다. (어떻게 쓸까, 21)

영감이란 서서히 떠오르기도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장미의 이름]을 완성하는 데는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덕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중세 미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고, 그 후로도 중세에 대한 연구를 더 이어갔다. 몇 년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과 고딕 양식의 대성당 등을 찾아다녔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마치 수십 년 동안 중세에 관한 정보들만 모아두었던 널찍한 벽장을 여는 것 같았다. 필요한 모든 자료가 내 코앞에 있었고, 나는 단지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 쓸까, 24)

[장미의 이름]을 출판한 후 맨 처음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영화감독은 마르코 페레리(Marco Ferreri)였다. 그는 내게 "영화 대본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셨군요. 대화 길이가 딱딱 맞아떨어져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글을 쓰기 전에 수백 개의 수도원 도면과 미로들을 그려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덕분에 등장인물 두 명이 대화를 나누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서는 구획과 배치에 따라 대화의 길이가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소설이 단지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는 걸 터득했다. 시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낱말의 음과 저자가 의도한 다중적 의미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는데다, 단어의 선택에 따라 내용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 같은 서사의 경우에는 정반대이다. 서사는 작가가 창조하는 ‘우주‘ 이며, 그 안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음률과 문체, 단어 선택까지 정해진다. 서사는 라틴어로 ‘렘 테네, 베르바 세쿤투르(Rem tene, vertba sequentu)‘, 즉 ‘주제를 고수하면 언어는 따라온다‘는 법칙에 지배받는다. 반면 시는 그와 반대로 ‘언어를 고수하면 주제는 따라온다‘로 바뀌어야 한다. (세계 설계하기,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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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혼자 있고자 하는 갈망은 부분적으로는 유전적이어서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하다. ‘사교성의 달인‘ 화학 물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뇌하수체 펩티드 옥시토신의 수준은 낮은 반면, 애정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는 바소프레신 호르몬 수준이 높으면 대인관계를 덜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다. (110)

"발전적인 생각을 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기로 했어요. 걱정은 생존과 계획을 빨리 세우라는 추가 신호이거든요. 나는 계획을 세워야만 했어요." (153)

나이트의 소로에 대한 무시는 바닥이 안 보였지만 -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요" - 에머슨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었다. 에머슨은 "다른 사람을 아주 적은 양씩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했다. (159)

카를 융은 오직 내향적인 사람만이 인간의 불가해한 어리석음을 알 수 있으리라고 봤다. 니체는 "군중이 있는 곳은 어디든 악취라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했다. 나이트의 가장 친한 친구 소로는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사회라 해도 모든 사회는 시민들을왜곡한다고 믿었다. 사르트르는 이런 글을 남겼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어쩌면 ‘왜 사회를 떠났는지가 아니라, 왜 사회에 머무르고 싶어하는지가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고 나이트는 넌지시 자신의 의중을 내비쳤다. (189)

자폐 범주에 속한 아들이 있는 남아프리카의 신경과학자 헨리 마크램(Henry Markram)은 자신이 만든 강렬한 세계(intense world) 이론으로 자폐를 설명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움직임, 소리, 빛이 자폐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공격처럼 다가오고, 삶이 정신이 하나도 없는 타임스 스퀘어를 영구적으로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압도되어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빨리 알게 된다.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섬광전구(순간적으로 강한 섬광을 내며 터지는, 사진 촬영에 쓰는 특수 전구)를 응시하는 것과 같다. 침대 스프링에서 나는 끼익 소리도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마크램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면 세부사항과 반복에 철저히 집중하는 능력을 키워서 인생을 되도록 있는 힘껏 통제해야 한다고 봤다. (193)

나이트의 내면에는 두 항해사가 다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 겨울의 음과 여름의 양. 그는 "고통과 기쁨‘이라고 했다. 둘 다 필수이며, 인간은 어느 하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2001년 한 해 동안 파타고니아에 있는 한 섬에서 홀로 살았던 로버트 컬(Robert Kull)은 "고통은 삶의 아주 깊은 부분이다. 너무 힘들게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면 결국 인생 전체를 피하게 된다"고 했다.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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