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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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아무튼, 술』by 김혼비



읽은 날 : 2025.1.5.



주말에 제주를 다녀오느라 비행기를 탔다. 최초의 동력 비행기가 1903년,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건 그로부터 한세기가 거의 다 지날 무렵인 1998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뜬금없이 비행기라는 걸 한번 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탔다. 서울-부산 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렇게 잦지는 않게, 그렇지만 그렇게 드물지도 않게 비행기를 탄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나는 늘, 이 거대한 쇳덩이가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 무슨 마법 같고 놀랍기만 하다.



유체역학이니, 양력이니, 공기의 저항이니, 엔진 출력으로 일으키는 베르누이의 원리니, 뉴턴의 제3법칙이니 이런 걸 내가 다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해한다 해도 나의 단순한 감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걸 과학으로 백날 설명해봐야 나에게는 그저 마법 같은 일의 하나일 뿐이다. 이 감탄은 이해와는 별개의 어느 지점에 있다. 그야말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일이라고 할까.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남편에게 소곤거렸다. “당신은 이 비행기가 난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난 이륙 순간마다 항상 놀라.” 남편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도 나와 같은 본투비 문과이니까, ‘지금 내게 비행기가 뜨는 과학적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말이냐?’ 라는 표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옆에 앉은 남편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어처구니없는 것도 당연하다. 가는 비행기에서 하는 말을 오는 비행기에 또 한다. 매번 진지한 놀라움을 담아. 마치 비행기라는 걸 처음 타 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처럼 신기한 걸 어쩌랴. 친절한 인터넷과 백과사전 덕분에 뜨는 이유는 안다.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니까 경험도 했다. 안 믿을 도리가 없고, 이게 마법의 일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그럼 뭐하나, 신기한 건 신기한 거지. 나는 도리어, 나와 같은 놀라움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게 더 신기하다. “비행기보다 몇백 배는 큰 항공모함이 물 위에 떠 다니는 건 안 신기하냐”, 길래 아주 하찮은 것을 보는 표정으로 “물의 부력도 모르냐?” 라는 대답도 해 줬다. 아니 어쨌든 물은 형태와 밀도를 가지고 있잖아. 공기는 밀도가 없냐? 라고 묻는다면, 다시 과학 원리로 들어가야 하는데, 안다고, 안다니까. 아는 것과 납득이 되는 건 별개의 문제더라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나에게 이, “비행기는 대체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 류의 질문과 동급의 질문이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이다.



아버지가 술을 안드시는 집에서 자란 나는, 아마도 그 체질을 물려받았는지 술을 마시지 못한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술 분해효소가 없는 간을 가지고 태어난 게다. 그러다보니 술자리에 갈 일이 별로 없고, 누가 주정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더구나 나는 창밖이 어두워지면 무조건 집에 들어가야 맘이 편해지는 집순이여서, 어쩌다 참석하게 되는 술자리에서도 끝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술을 제대로 마시는 사람을 본 건 형부였는데, 말술인 우리 형부는 술버릇이 매우 얌전했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두 병을 마시고도 술자리가 끝나면 조용히 씻고 잤다. 심지어 아내가 거슬려 할까봐 침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부와 처제로 얼굴을 마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형부의 술버릇은 그처럼 얌전하다.



덕분에 나는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미혼의 친구들이 남편의 조건으로 꼽는 대표적인 것이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었는데, 그건 내 남편감의 요구조건에 있지 않았다. 술이 뭐, 뭐가 어때서. 마실 줄 알면 좋은 거 아냐? 가끔 가는 술자리에서 무알콜의 음료를 홀짝이며 술에 ‘적당히’ 취한 사람들을 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사람을 반듯하게 죄어놓는 나사가 한 바퀴나 반 바퀴쯤 풀려(나사가 빠지면 안 된다.) 살짝 느슨해진 사람들은 평소보다 유쾌했고 웃음이 헤퍼졌고, 너그러워졌다. 취옹(醉翁)의 경지가 이런 것이로구나, 나로서는 평생 도달하지 못할 어떤 부분이라 부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술에 관한 한 아주 해맑은 상태로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했다. 술버릇을 알아보고 어쩌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내가 술을 못 마시니 우리의 데이트는 늘 밥과 커피였고, 어쩌다 남편(그땐 남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난 늘 창밖이 어두워졌으니 집에 가야 하는 8시 신데렐라였으니. 그런 깐으로는 참으로 운이 좋게도(이게 운이 좋은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땐 몰랐지.), 남편도 술버릇이 형부만큼이나 얌전했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조용히 씻고 자는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아니, 내가 시부님의 주사를 직관하기 전까지, 남편은 자기 아버지의 알콜릭을 숨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아버지는 술 문제가 좀 있었어.” 라고 말을 했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리고 시부 본인까지, 시아버님의 알콜 문제는 기를 쓰고 숨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시댁과 다섯 시간 거리의 서울에 살고, 정해진 날에만 내려가거나 내려가기 하루 이틀 전에는 시댁에 미리 연락을 해 두니까, 우리가 갈 때는 시아버님도 술을 드시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았을 때의 시아버지는 그냥 평범하고 무뚝뚝한, 은근히 살가운 데도 있는 경상도 시부일 뿐이었다. 다만 친정과 시댁의 명절 풍경이 너무도 달라서 신기하긴 했다. 친정은 명절이 되어 자식들이 오면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형부와 사촌형부 둘이 마시고, 가끔 엄마도 곁에서 한 두 잔을 받아 마시고, 나머지 딸들과 아버지는 다른 음료를 마시며 유쾌한 명절이 지나갔다. 내가 결혼한 뒤에는 술 멤버(울 남편 말이다)도 늘었다. 그런데 시댁의 명절은 술이 한 방울도 없었다. 남편도 술을 먹는데, 시숙님도 술을 먹는다고 손윗동서에게 들었는데, 멀리 살다 명절이라고 간만에 만난 형제 둘이 소주는커녕 맥주 한잔 기울이는 법도 없었다. 신기했다. 명절인데 왜 술이 없냐? 고 물었을 때, 남편이 한 말이 그 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 문제가 좀 있었어. 그래서 엄마가 술을 싫어해.”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혼 10년이 지난 어느날 시댁 방문 스케줄이 꼬이는 실수로 직관하게 된 시부의 주사를 보고야 알았다.



흉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흉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어이없는 질문 목록이 하나 추가되었다.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의 다음 줄에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가.



술과 나는 아예 인연이 없으리니 하고 살던 내가 술을 처음으로 배운, 아니, 그러니까, ‘취기’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배운 곳은 마트다.(웃기겠지만 팩트다.) 이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트의 시음 코너. 40살이 되기 직전이었다. 코스트코의 와인 코너 앞에는 와인 시음 매대가 있다. 시음 와인은 매주 달라지고, 시음을 하겠다고 가면 소주잔 사이즈의 종이컵 바닥 1/4 정도를 채워 준다. 딱, 한 모금.



남편과 둘이 1층 매장에서 각종 공산품을 골라 카트에 담고 무빙워크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바로 보이는 게 와인 코너다. 매번 거기서 딱 한 모금의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지를 하게 된 거다. 마트에 가서, 와인 한 모금을 시음하면 딱 기분좋을만큼 취기가 돈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는 딱 한 모금의 와인에도 취하는, 알콜에 관한 한 매우 가성비가 뛰어난! 사람인 거다. 술을 못한다는 말보다야 알콜 가성비 좋다는 말이 훨씬 듣기 좋지 않은가. 그게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 니까.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한 모금의 와인을 마시고 난 뒤의 내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많이도 말고 딱 0.5센치 만큼만 땅에서 떨어졌다. 감각의 모서리가 아주 조금 무뎌져 살짝 몽롱해진 느낌은 오, 와, 사람들이 이래서 술을 먹는군! 하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취기는 마트 식품 코너의 쇼핑을 마칠 때쯤 완전히 사라져 계산할 때 나는 매우 명료하고 청명한 정신상태로 돌아온다. (이거 봐, 나 술도 이렇게 금방 깬다니까!)숙취 따위 있을 리 없는 나 혼자의 짧은 취생몽사醉生夢死다. 같이 장을 보러 가는 남편만이 아는 나의 음주벽이다.



이제 나는 술자리에서 딱 반 잔의 맥주를 받아 둔다. 그리고 그 술자리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그 반 잔의 맥주를 핥듯이 아껴가며 마신다. 첫 모금에 취했다가, 한 1-20분 뒤에 취기가 깼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취했다가, 또 깼다가 하며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취생몽사를 즐긴다. 그 알딸딸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이 취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라는 나의 오랜 질문은 답을 찾지 못했다.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 상태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도 갔다가 발리도 갔다가 부산도 갔다가 하는 것처럼,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나요.” 라고 묻게 되는 어떤 지점에 나는 서 있다. 술이라는 건 기분이 좋으려고 마시는 것 아닌가요. 술만 마시면 기분이 나빠지고 시비를 걸게 되고, 술에 취해 사고까지 치는 경험을 하고, 심지어 술을 마시면 폭력성향이 나오기까지 한다면, 아니, 술을 안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술 취한 내가 저지른 사고는 술이 깬 내가 처리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반복하는 건 너무 바보같지 않나요. 그같은 일을 몇 번 하고 나면 술이 깬 나는 두 번 다시 술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이번 술에는 절대 주사를 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더 놀라운 것은 주사가 있는 사람과 술을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다. 흉하지 않나??? 아,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느냐고요.



성석제는 “내가 아는 한 어떤 음식도 냉면처럼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성석제, 『소풍』, 창비, 2006, p.149)라고 말했지만, 냉면보다 훨씬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게 바로 ‘술’ 같다. 이건 술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 명약관화하다. 한창훈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썼고, 김혼비의 이 책에도 언급되는 권여선의 『오늘 뭐 먹지?』는 ‘음식’ 산문을 가장한 ‘안주’ 산문집을 표방하다 6년 뒤 아예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내가 꼽는 성석제도 음식 에세이 『칼과 황홀』의 한 챕터 전체를 술에 관한 글에 할애했다. 윤대녕의 맛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에도 술에 관한 꼭지는 두 개나 있다. (주제가 소주, 맥주, 청주, 막걸리다.)『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와 『낮의 목욕탕과 술』이라는 술을 주제로 한 에세이집을 두권이나 냈고, 하라다 히카의 소설은 제목이 아예 『낮 술』이다. 작가들이 그 빼어난 글솜씨로 술에 관한 예찬을 하는 것을 읽다 보면, 술을 먹을 줄 모르는 게 너무나 억울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술이란,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들어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을 불러오는(p.166) 그런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김혼비, 『아무튼, 술』, 제철소, 2019, p.61-62



그런 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의 힘으로 한 시기를 건너갈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반듯하게 죄는 나사가 살짝, 반바퀴에서 한바퀴쯤만 풀어지는 순간을 나는 기대한다. 그 술기운을 빌려서 하는 말이, 때로는 그 순간을 버티게하는 유일한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런 순간들 없이 사회적 약속과 규범을 반듯하게 잘 지켜 “지나고 보면 상대도 나도 적정선 안에서 ‘나이스’했”기에 결국 “지나고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p.167)게 되는 그런 관계를 나도 숱하게 맺어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명확하게 긋는 사람이라는 평을, 상대를 긴장시키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다. 아닌데, 나 만만한 사람인데, 라고 혼자 중얼거리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안다. 적정선 안의 ‘나이스’ 한 관계 맺기를 디폴트로 했던 후유증이다. 나도 술을 마시고 나사를 풀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마시지 못하는 술을 기어코 마시고 싶어하는 이유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술 예찬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을 나나요? 라고 묻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5.1.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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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온 여인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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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온 여인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28.

 

읽는 내내 박완서의 소설 욕망의 응달이 떠올랐다. 미리 말해두지만, 박완서 선생은 자신의 장편소설 전집을 세계사에서 이미 출간한 상태였지만 죽기 전 그 책과 목록을 다시 정리하여 결정판 전집목록을 만들었다. 박완서의 결정판 장편 전집에서 욕망의 응달은 빠진다. 박완서 선생은 그 소설을 사장시키길 원했다.

 

장소 그 자체가 이야기를 장악하는 소설들이 있다. 최근에 읽어 기억나는 책은 종로구 옥인동 벽수산장을 배경으로 한 심윤경의 영원한 유산이나 인천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한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이 있다. 둘 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와 그 집에 얽힌 역사를 배경으로 유령처럼 보이지만 유령이 아닌 사람과 사람처럼 보이지만 유령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장소의 특성과 맞물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이럴 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에도 푸른 저택이라는 특정 장소가 나온다. 그러나 심윤경이나 강화길의 책에서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한 사연을 지닌 장소는 아니다. 박완서의 책에 등장하는 저택집처럼, 이 책의 푸른저택은 어떤 시대 배경이나 역사를 지닌 장소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곳이다. 각자의 사연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곳. 그들이 만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 말이다. 또한 박경리의 푸른저택과 박완서의 저택집은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세상과의 분리, 단절은 시대와 현실과도 분리 단절됨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 모인 인물들은 세상이 무슨 난장판이 되든 상관없이 그들만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박경리의 인물은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토지에서 길상이는 서희를 떠보려 불쌍한 과수댁과 살림을 차리는 시늉을 한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에게 매달려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길상이는 그녀와 살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아주 개자식이다. 이런 개자식 길상이를 끝내 미워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은 길상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길상이가 사랑하는 존재인 서희의 매력에 있다. 독자가 용이의 간통과 두 집 살림에 대해 눈을 감게 되는 것은 박경리가 오래오래 공을 들여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을 독자에게 설득시킨 덕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용이라는 인물 자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낸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러한 설득에 실패한다. 오 부인의 강사장의 동생에 대한 집착과 구분되지 않는 애정의 문제라든가 주인공 신성표가 처음 석영희에게 마음이 갔다가 오세정으로 마음이 옮겨가고 그 마음이 다시 나의화로 옮겨가는 과정 등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 덕에 이 소설은 기괴한 인물들이 기괴한 말과 행동을 하는 광대놀음에 그치고 만다. 안타깝다.

 

다시, 박완서 선생은 죽기 전 자신의 장편 중 한 권인 욕망의 응달을 영원히 사장시키는 선택을 하였다. 박경리 선생도 아마 그러고 싶은 작품이 있기는 있지 않았을까.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독자에게 찾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텐데, 이 소설에도 그렇고 박완서 선생의 욕망의 응달에도 그렇고,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한운운의 헌사에 가까운 광고 문구가 참 많다. . 어쩌면 작가 본인들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더욱 안타까울밖에.

 

2025.1.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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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
시몽 위로 지음, 한지우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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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by 시몽 위로

 

읽은 날 : 2024.12.8.

 

2024년의 첫눈은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게 내렸다. 그 첫눈이 내리던 시기에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인 동네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03, p.7

 

라고 절로 중얼거리게 되는. 북악터널을 경계로 그곳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자랑이랄 것도 없지만(내 정원이 아니니까) 운이 좋게도 나는 사무실 문을 열면 아주 넓지는 않은, 그래도 그다지 좁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잔디 정원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그렇다고 내가 30년간 일을 해왔다는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발을 디딘 정원은 각각 달라졌지만 그곳에서의 내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사무실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는 것에 질리면 유리문을 열고 나가 정원의 잔디 위에서 손가락을 열심히 놀린다. 그리고 그렇게 잡초를 뽑을 때마다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 한구절을 떠올린다.

 

처음엔 재미삼아 하던 게 일단 잔디와 클로버로 편을 갈라 잔디 편을 들기로 작정을 하자 점점 클로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식이었다. 여북해야 그짓에 들려 헤어나지 못하면서 문득 인간의 광기 중 가장 무서운 인종청소에 들린 독재자의 심정을 다 이해한 것처럼 느꼈을까.

 

박완서, 두부, <봄의 환()>, 창작과비평사, 2002, p.107

 

같은 사무실을 쓰는 다른 직원들은 나의 광기 어린 풀뽑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잔디를 관리하는 분은 따로 있어왔다, 항상.) 그냥 재미삼아 하는 거예요, 라는 어쭙잖은 변명으로 나는 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숨기지만, 내가 잔디정원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내가 뽑아 제거할잡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그러니까 정원의 진짜 주인)과 나는 쿵짝이 잘 맞는 짝패여서 우리 둘은 곧잘 신나게 정원의 잡초 제거에 열을 올린다.(그래봐야 최장 10분이다. 그 이상은 허리 아파 안 한다.) 정해진 시기에 맞추어 정원사를 불러 나무의 전지를 하고, 시든 화초를 죄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화초를 심지만 제초제를 뿌리지는 않는다. 정원사는 매번 권하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과 나는 어물거리며 다음엔 뿌리지요, 라는 말로 말꼬리를 흐린다.(잔디 관리의 책임을 맡은 분은 이번엔 꼭 제초제를 뿌리라 강권하지만.) 제초제의 독성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잡초 뽑기 놀잇감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거다. 물론 잔디 정원의 잡초는 놀이삼아 뽑는 걸로는 절대 끝이 안 나기에 잔디 관리하는 분은 우리 둘의 고집에 치를 떤다. 음음, 죄송합니다.

 

제초제는 절대 사절이지만 수목 소독을 위한 약(살충제)을 치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는다. 잡초는 (뽑는 재미를 위해) 환영하지만 벌레만은 절대 사양이라는 이 이율배반적 모순이라니. 결국 내가 좋아하는 정원은 레이첼 카슨이 말한 침묵의 봄이다. 벌레가 없고,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형의 정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적인 고장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인 동네임에 분명하다.

 

그러다 이 책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정원에 관한 책이다. 심지어 아주 잘 만들어진 만화책이다.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라는. 동물들이 찾아온다는 건 글로 봤을 때까지만 낭만적이다. 우리 정원엔 분기별로 한번씩 솔거의 까치가 영면을 하고(솔거의 까치는 그림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되고 우리 정원 까치는 유리창에 비친 소나무에 앉으려다 그리된다.) 때론 작은 호랑이(호랑이는 식육목 고양이과 동물이다)에게 사냥을 당해 정원 가득 깃털을 흩뿌리고 사라진다. 그 사체를 치워야하는 입장에서 생태다양성이란 재앙이다. 물론 까치에게도 재앙은 재앙일터. 이 재앙을 재앙으로 보지 않고 긍정할 수 있을 때 생태다양성은 가능해진다.

 

이 소박하고 멋진 만화책을 그린 이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이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을 탄생시켰다. 그는 거미의 외모도 찬양할 줄 알고(맙소사!) 도마뱀이 살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주며, 뱀의 편을 들어 고양이와 싸우고(세상에!), 지렁이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반적이 삽이 아닌 갈퀴삽으로 땅을 일군다. 그가 가꾼 정원에는 나비가 찾아오고 나방이 찾아오고, 모기 살충제를 쓰는 대신 모기를 잡아먹는 박쥐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훗날 언젠가 내가 나의 정원과 농장을 가꾸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아마, 생태다양성을 추구하지는 못하리라. 내가 시골 살이를 접고 도시로 돌아오는 이유에는 아마도 지네를 포함한 벌레와 뱀을 비롯한 파충류가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될테니.

 

실천하지는 못할지라도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2024.12.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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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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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결혼생활by 임경선

 

읽은 날 : 2024.12.7.

 

며칠 전 결혼 19주년을 지났다. 그러면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생길 땐 결혼 20년 쯤 됐다는 말을 한 2-3년 전부터 하고 있다. 이 결혼 20년 됐단 이야기는 앞으로도 2-3년 더 써 먹을 생각이니까, 시간의 마디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란 이렇게 강박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느슨하고 대충대충 이다. 10주년, 20주년이라는 말의 무게나 힘이 너무 커서 앞 뒤의 2-3년씩을 지배하는 경향도 있고.

 

임경선 작가의 책 어느날 그녀들이를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의미의 경악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고, 그저 그 뒤로 이 작가의 책은 기를 쓰고 피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책이. 그런데 이 책을 굳이굳이 사서 읽은 건, . 20주년이라는 시간의 마디가 주는 파워 때문이다. 아이도 20년이 지나면 부모와 떨어진 독립개체가 된다고 법적인 인정을 하는데, 서로서로 별개의 인간 둘이 합체를 해 20년이 지나면 이제는 그 자체로 개별적인 무언가라고 인정을 해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던 중에 이 책을 발견했기에.

 

우리 부부는 대체로 무난무난하게 살아온 셈인데 이 무난의 기저에는 남편의 너그러움과 나의 무심함, 그리고 둘 다 가지고 있는 결벽성향이 있다. 남편은 그 너그러운 성품으로는 상상이 안 되게 예민한 면이 있고(그래서 이 남자는 불면증이 있다) 나는 무심한 것만큼이나 까칠하고 까다로운 인간인지라(그래서 나는 불안증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결벽성향에 감사한다. 이게 맞지 않았다면 이혼까지는 몰라도 불행은 확실 했을테니.

 

나는 세상의 기준이 나라고 생각할만큼 오만하거나 자기중심적이지는 않다. 아니, 뒤집어 말하겠다, 나는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지만 세상의 기준이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어순을 바꾼 두 개의 문장이 주는 어감의 차이 때문에 피식 웃는다.) 다만 그 기준이 남편과 내가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정신적 결벽의 기준이 같아서.

 

글이라는 건 작가의 사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건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상관이 없다. 에세이가 소설에 비한다면 한 겹의 가림막(허구성)을 벗어던졌을 뿐 결국 모든 글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의 반영이다. 어떤날 그녀들이의 경악은 거기서 왔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깔끔하지 못한 유무형의 관계를 혐오한다. 그건 그냥 추하다고 생각한다. 추한 것을 추한 것이 아니라고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임경선은 톨스토이가 아니다. (뭐 당연한 건가.)

 

이 글을 읽는 내내 그래서 불편했다. 허구성이라는 한 겹의 가림막도 치워진 뒤라 조금 더 많이 불편했다. “나는 가끔 다른 남자들에게 호감을 품은 적이 있다.”(p.84)는 유부녀의 고백을 솔직하고 쿨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나는 앞뒤로 꽉 막힌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욕을 먹을지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냥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다행한 건 이걸 같이 불편해하는 남자와 20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20년을 더 살 거라는 사실 정도. 이런 문장이 쿨하게 읽히려면 톨스토이 정도는 와야 한다. 뭐 그렇단 이야기다.

 

앞으로 임경선의 글을 더는 읽지 않을 것 같다. (이 한마디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024.12.0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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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진 들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노을진 들녘by 박경리

 

읽은 날 : 2024.12.01.

 

사주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사실 틀린 전승이고, 정확한 표현은 산천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고 자란 산천(환경)에서 도망쳐 본들, 사람은 결국 제 운명대로 살게 마련이란 소리다. 그 틀린 전승의 시작이 무지의 소산이었다 해도 은 언제나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산천 도망이라는 말 대신 사주 도망이라는 말을 쓰게 된 데는 그 말이 가진 힘이 주효했다. 운명에 대한 거부. 우리가, 인간이 정해진 운명대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사람이 산다는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시작하는 모든 서사는 그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또는 신-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신조차도 그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이 끝내 그 운명에 패배하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말도 있다. “성격이 팔자다라는. 타고난 사주와 상관없이 자신의 성격이 자신의 운명(팔자)을 바꿔놓게 된다는 말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이라는데 타고난 사주, 운명과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뜻 정도로 읽힌다.(주로 나쁜 쪽일 때.)

 

박경리의 소설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절손 모티프이다. 더 정확히는 부잣집의 유산과 함께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겨진 여아 하나. 박경리가 처음 토지를 구상하게 된 배경도 그 절손 모티프와 관련이 있다.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주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작가세계통권221994.가을, 박경리 특집, <삶에의 연민, 美學(송호근-박경리 대담)> , 세계사, 1994. p.47

박경리가 어릴 때 들은, 실화라는 이 이야기는 토지 뿐만이 아니라 박경리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도 그 절손 모티프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학병을 나가서 죽었고, 엄마는 고모와 함께 기차사고로 죽어버린 주실은 홀로 남은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과수원에 산다. 이 할아버지는 그 과수원이 있는 동네의 대지주이자 왕과 같은 존재다. 할머니와 단 둘이 남은 서희와 주실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지만(최서희의 대척점에 주실이 있다, 다만 박경리의 주인공답게 외모가 최상급이라는 사실만은 공통적이다) 언젠가 혼자남은 이 여자아이가 물려받게 될 유산을 노리는 존재가 있고, 그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혼인을 쓴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서희는 병수와의 혼인을 피해 간도로 도망을 갔고, 주실은 도망치지 못했지만.

 

그 외에도 침모 봉순네를 연상시키는 침모 영천댁과 수동이 또는 김서방을 연상시키는 박서방이 등장하고 임이네를 연상시키는 김서방댁과 삼수를 연상시키는 성삼까지 등장한다는 점에서 토지와 연결지을 수도 있는 소설이었다 싶지만 토지와는 전혀 다른 소설로 읽힌다.

 

우선 박경리 초기 장편이 가지고 있는 끝도 없는 우연의 남발은 이 소설에서도 이어진다. 뭐가 우연인지 꼽을 필요도 없이 이 소설의 전체 사건이 우연히, 어쩌다보니 그렇게. 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여자가 알고보니 친구의 동료요, 직장 상사댁의 가정교사로 연결된다거나 신혜가 우연히 터미널에서 만난 어리숙한 촌년이 알고보니 주실이었다거나. 주실, 동섭, 신혜가 밥을 먹는 식당에 마침 성삼이 들어온다거나. 나중엔 슬몃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와중에도 이 소설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서 단단히 땅으로 끌어내려 고정시키는 존재가 성삼과 김서방댁이다. 그야말로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과 태생을 빗대면 그들의 언행은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러니, 제발 좀 정신차릴 수 없어?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나머지 인물들에 비하면 그 모자는, 응응, 당신들은 그럴만 해. 라고 수긍하게 된다.

 

여기서 토지와 이 소설이 다시 갈리는 지점이 나온다. 위에서 운명(숙명)과 팔자,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토지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악스레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기를 쓰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쓴다. 절에 버려진 아이, 주인댁 아씨의 머슴이었던 길상이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서희의 남편이 되고자, 서희가 낳은 아이들의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자 간도에 남아 독립운동에 투신해 자신의 신분을 바꾸려 한다거나, 서희가 절손을 극복하고 자신의 아들 둘에게 최씨 성을 붙여 최참판댁을 재건한다거나.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한 집안의 가모로서의 자리를 지켜낸 윤씨부인이라든지, 무당의 딸, 백정의 사위. 끝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딴지를 거는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그야말로 운명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다 이 소설로 돌아오면, , 이 무기력한 사람들아.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주실도 영재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독자도 스스로 노력하는 인물을 응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연민할 수는 있으되 사랑할 수는 없고, 나중에는 그 연민조차 화로 바뀐다. 성격이 팔자라, 지 팔자를 지가 꼬고 있는 것이다. 그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성격 탓에 그들의 운명은 점점 더 나락으로 나아간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원숭이같이 자란 주실이야 그래, 못배웠으니 어쩌겠니 한다쳐도. 영재의 행동은. .

 

소설은 끝내 살인과 자살로 끝이 난다. 파멸과 파국이다. 산천도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당연히 팔자도망에도 실패했다. 작가로서도 이렇게밖에 끝을 낼 수 없었겠다, 싶다.

 

그 와중에도 소설은 진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인물들이 좀 더 구체적이고 개별화된다. 우연성의 남발이라는 단점은 여전하지만 사건이 속도감있게 진행되어 소설을 읽는 재미는 있다. 그야말로 글빨이란 이런 것.

 

ps. 오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오타가 없다고 오해는 마시라. 마로니에 사장님, 분발하시압!!!! 이 책에서는 오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죠? 9쪽 "가려면 아직도 삽십 분은 더 걸어야 했다" 라는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2024.12.7.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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